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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 ㅣ 대한민국 보고보고 시리즈 1
배연형.서희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여행이다. 물에 가라 앉은 고향 마을의 돌담길을 따라가는 듯한 여행이다.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다. 그런데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는- 제법 거대한 제목의-시간의 역행이다. 몸집으로 뱉어낸 거미줄을 다시 삼키는 거미처럼. 되감기하는 릴테이프의 회전처럼. 소리길을 찾아 나선 여행에서는 공간의 수평선과 시간의 수직선이 교직된다.
길을 나서자.
<한국의 소리,세상을 깨우다>의 여정은 서울에서 시작된다.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서울 살면서 광화문 근처를 자주 다녔지만 비각에 눈길을 준 적 없었다. '교보 앞에 무슨 비각이 하나 있었다. 그 정도.' 도로원표...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 '광무대'....동대문 근처였다구?
여행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1900년대 초반 세워진 협률사,원각사,광무대 등 근대식 극장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길은 100년이 지난 현재의 서울에서 끝난다. 추측컨데 지금 우리 소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온고지신'의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새로운 각성을 갖자는 것이 여행의 목적인 듯 싶다.
소리길은 남쪽을 향한다. 한반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돈다. 여행 경로의 방향을 생각하며 잠시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위 전국 여행이라고 할 만한 기행을 살 면서 두 번 했는데 모두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육상 트랙을 돌아도 시계반대 방향으로 도는 데, 왜 나는 그 반대로 햇을까?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본 동해 바다의 수평선의 파란 강렬함이 끌어 들이는 힘 때문이었을까? 하여간 다음 번 여행은 꼭 시계 반대방향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이 여행은 사당패의 본거지 안성부터 시작해서 충남 서천-논산-익산-전주- 고창 -담양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여행 길라잡이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번 여행에서 특히 살펴보고자 하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 배연형 선생은 고음반연구회 활동이나 방송진행 경력 등으로 판소리계에서는 나름 이름이 알려진 분이다. 노재명,정창관, 최동현 선생들과 함께 판소리 대중들에게는 음반 해설이나 판소리 관련 글들을 통해 익숙한 이름이다. 이 분들과 함께 판소리의 대중화에 주력하고 계신 분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 소리기행을 전반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핵심은 조선 성악의 최고 예술이었다는 '판소리'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책의 분량으로 보더라도 4개의 챕터중 2개 부분이 '판소리기행'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행 가이드 배연형 선생을 따라 본격적으로 소리 기행 중 특히 판소리 여행을 떠나야 할 때다. 안성 청룡사를 떠나면 본격적인 판소리 이야기가 시작된다. 판소리 관련된 2-4장의 첫번째 소제목과 마지막 소제목을 보자. 여행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셈이다. '중고제의 끝자락 ,거장 이동백'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현대 국악의 중심, 보성소리와 창극'으로 판소리 이야기가 끝난다. 공간적으로 보면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서 시작해서 전남 보성군과 고흥군 거금도에 해당한다.(거금도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나로호를 발사한 우주센터가 있는 외나로도이다.) 이렇게 여정을 잡은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 여행의 출발이 서울에서 시작해서 남하하여 다시 서울로 끝나는 것도 사실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단지 저자가 서울에 살아서 그런 것 만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도록 하자.
둘러볼 여행지는 모두 판소리 명창들의 고향이거나 활동 무대들이다. 그곳에 무슨 화려한 유적지 같은 것은 없다. 박물관이나 동상 정도 만나면 다행이다. 하지만 발걸음 마다 '오리정의 이별'을 앞두고 울부짖는 춘향이의 설움과 '상좌 다툼'을 하는 민화 속 동물들의 웃음이 묻어 있다. 여기 등장하는 명창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서천 장항의 이동백, 김창룡 명창, 판소리의 중시조 송흥록 명창, 30년 앞을 보고 판소리를 했다는 익산의 정정렬 명창, 최초의 판소리 이론가라 할만한 고창의 동리 신재효 선생, 순창의 김세종 명창, 장판개명창, 서편제의 시조 박유전 명창, 최초의 여성 판소리 스타 이화중선 명창, 쑥대머리의 임방울 명창, 구례의 유성준,박봉술 명창, 보성소리의 정응민 명창, 창극의 개척자 김연수 명창.....그 외에도 소리의 사숙 관계를 통해 수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덩쿨칡처럼 얽혀있다.
저자는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도 않은 판소리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개략적으로 판소리의 역사와 명창들의 계보를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 동편제,서편제,중고제의 계보와 판소리 다섯바탕의 전승 계보를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딱딱하게 씌여질 수 있는 개론서들 대신 쉬엄 쉬엄 여행하는 기분으로 판소리 이야기와 명창들의 야화들을 섞어 들으며 판소리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에 나오는 주요 지역들 중 이미 가 본 곳들도 꽤 있다.그렇지만 나 역시 판소리에 관심을 갖기 전까진 하나 같이 그냥 스쳐 지나쳤다. 5-6년전에 보성 차밭에 갔더니 한복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인이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아..보성. 차말고도 판소리도 유명하지'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 그랬으니 정응민의 고택을 애써 찾을 일 만무하다. 낙안 읍성도 흥미롭게 돌아다녔지만 그곳이 송만갑,오태석 명창과 관련있는 전혀 알지 못했다.(아이가 크면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전라도 소리 여행'을 한 번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진도도 포함될 것이다.)
판소리 명창들의 일화들과 야화들은 사실 이런 저런 판소리 책을 읽다보면 여러번 중복되는 내용들이다. 그들이 살았던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풀려나오니 현장감이 높다는 것이 장점이 될 터이다. 여기서는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다 언급하지는 않겠다. 과거 명창들의 소리는 대략 저작권도 만료되었을 테니 조금만 공을 들이면 음반을 통하지 않고도 온라인 상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껏 소리를 잡아 올렸다 '턱'하고 내려놓는 이동백 명창의 소리나 과거 명창들의 더늠을 잘 흉내내었다는 김창룡 명창의 소리, 장자백, 이선유,이화중선 등등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이 여행의 발걸음을 따라 간다면 훨씬 좋을 듯 하다.
자...앞에서 이야기한 배연형 선생이 '충남 서천부터 보성까지 판소리 여정'을 잡은 이유를 이야기할 때다. 그것은 '판소리 전파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판소리를 들으시는 분들은 이미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판소리 발생 논쟁은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판소리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누린 음악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무가기원설, 설화기원설,광대소학지희설,육자배기토리설, 창우기원설 등등... 그런데 이중 핵심은 '무가기원설'이다. 주장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판소리에 있어서 창자들이 전문적인 집단이나 사람이었다는 점과 판소리의 시작이 시나위권 중에서 주로 전라도 지역이라는데는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발생론의 기점에 대해 다른 이견이 '중고제 기원설' 또는 '경기충청 기원설'이다. 이 책의 저자 배연형이 바로 대표적인 주창자이다.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의 구성이 남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출발해서 땅끝인 보성과 거금도에서 끝나는 것, 즉 남하하는 여행을 채택한 것, 이것은 판소리의 남하를 주장을 해온 저자의 판소리 전파론을 여행 여정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여행의 여정이 저자가 주장하는 판소리의 진화 방식과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중반부에서 부터 주류의 '무가기원설'에 대해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다가, 중반부와 결말부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한다.
흔히 동편제와 서편제의 경계선을 섬진강으로 보지만 그보다는 전라북도와 남도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다. 요컨데 판소리는 경기와 충청에서 발생하여 점차 전라북도로,그리고 전라남도로 퍼져나갔다. p250
그러니까 저자의 주장으로 보자면 판소리는 경기,충청의 중고제 소리(그 전에 고제 판소리가 있다) 가 전라북도 쪽으로 가서 동편제 소리가 되고, 이후 계면조와 기교를 더한 서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편제 중에서 박유전으로 부터 정씨가문으로 계승된 보성소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과정이 200년쯤 걸리게 되면서 맨 먼저 시작된 중고제는 전통이 끊기고, 송씨 가문의 동편제 소리도 송만갑을 경유하여 조금 변모하고, 주로 서편제와 보성소리가 현대 판소리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경기 충청에서 시작해서 보성에서 판소리 기행을 끝맺는다. 그리고 이런 도정을 통해 남하한 판소리가 보성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주류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난해 말<판소리 100년의 타임캡슐>이라는 책을 통해서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통해 이를 입증했다고 하여 학계에 관심을 끌기도 했고,또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소리>이 책은 <판소리 100년의 타임캡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책인 셈이다.
그럼 과연 무엇이 판소리 기원론 또는 전파론의 정답이냐? 누가 알겠는가? 여하튼 그의 각고의 노력으로 판소리에 대한 연구의 폭이 넓어질 것 만은 사실일 듯 하다. 그러나 배연형 선생의 '경기충정지역 기원설'은 판소리계에서는 비주류적인 견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나오는 설명만 믿고 어디 가서 '판소리는 경기충청에서 시작해서 내려간 거다.'라고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좀 갸우뚱 하거나 머뭇거릴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내 관심을 끄는 또 한가지 빠뜨리기 쉬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명창들의 전신 사진들이다. 여러 판소리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사진이다. 명창들은 모두 한결 같은 포즈다. 그들은 모두 한시 한폭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었다.그런데 이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을 사진사이다. 이 사진은 모두 벽소 이영민 선생이 찍은 것이다. 그는 전문사진사도 아니고-그 시대에 그런게 있었겠는가?- 판소리 명창도 아니다. 그는 일제시대 순천사람으로 우리 소리의 중요성을 알고 명창들의 사진뿐만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귀명창이다. 진정한 남도의 문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옥섭의 <노름마치>에도 보면 이영민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명창들 뒤에 있는 시는 바로 벽소 선생이 명창들의 소리를 평한 내용이다. 자존심 강한 당대의 명창들이 자신의 소리를 평가한 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벽소 선생의 문장이나 공력이 명창들의 소리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자를 다 모르고 한문시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해서 사진 속의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없음이 무척 안타깝다. 이 책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벽소 선생의 이런 글이 쉽게 찾아진다.
복사꽃 훈훈한 밤 봄성(春城)엔 달빛이 가득
버들 숲엔 안개끼고 누각엔 바람이 부네.
한 마디 맑은 노래 하늘은 강물결과 같은데
하늘음악(仙樂) 구름 중에서 울리는 듯 하여라
장흥 김녹주 명창에 대한 벽소 선생의 한시.
어차피 명창이 될 수는 없는 몸들이니 벽소 선생의 마음 자락 한 줌만 훔쳐도 즐거이 소리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