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을 생각하며

                                   김수영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ㅡ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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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자유가 영원히 궁기에 찬 빈 그릇이듯 혁명이란 말도 그렇지 않을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상상력으로만 근근히 보릿고개를 넘기는 혁명을 보면서도 말이다. 

혁명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빈 방이었다. 혁명은 그 빈 방 앞에서 마치 만 개의 열쇠꾸러미를 뒤지는 성 바오로처럼 꾸물거린다. 늘상 먼저 열쇠구멍을 열고 들어간 '혁명 이외'의 것의 뒤통수를 주머니나 뒤적이며 바라보는 것이다. 집을 찾지 못하는 혁명은 투덜거리며  동사무소로 향한다. 면서기의 고압적 눈길을 정수리에 받으며 삐둘 삐둘 빈 칸을 채우고 자신은 다시 세입자로 살거나 또 다시 길을 헤맨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말이다. 맞는 말이다. 역사의 적층하는 힘을 너무 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전통적인 혁명을 나는 꿈 속에서도 그리지 못한다. 작은 반란들은 가끔 꿈에 출몰해서 졸린 눈 속에서도 혼자 멋적게 한다.  '방만 바꾸고, 가벼움마저 재산이 되어 버렸는데도 가슴만은 풍성한'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리케이트를 넘는 것도 혁명이지만 생활세계에서의 혁명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평생을 걸만큼의 의지와 용기가 바탕이 되어야 '가래침'이라도 뱉을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멀리 있어 아무 소리도 전달되지 않는, 또는 소리가 들려도 들으려 하지않는 푸른 집의 어느 인사와 싸우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당장 내 코 앞에서 이를 쑤시고 있는 과장에게, 틈틈이 넓은 사무실에서 퍼팅연습하고 있는 전무이사에게 목소리를 전달하고 반항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멀리있는 적에게 고양이처럼 도도하면서도 가까운 그의 분신들에게는 먹이를 구하는 강아지처럼 쪼그라드는 것은 아닌가?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혁명은 내적 혁명부터라는 식의 자기초월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고 또 경험하는 그 비루함.  

거기 일부러 손을 대는 것은 상처에 염증을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무슨 강박적인 근본주의자가 되기 위함도 아니다.  

 내 스스로에게 묻는거다.  

멀리 있는 적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덜질 수 있는 비수를 가까운 곳에서도 머뭇거림없이 던지고 있는지 말이다. 그냥 '무시'라는 간판을 내건 '회피'의 이름으로 돌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상처에 파상풍이 깊어져 내 영혼이 도려내어져서는 안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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