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많이 있음. 스포일러 싫은 분은 보지 않기를 권고함.

박찬욱은 B급 영화감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B급 영화의 정서에 동화적인 인물이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볼 때 그는 B급 영화의 경계선을 통과하며 독자적인 박찬욱표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다.  

 박찬욱의 영화는 B급 정서에 공감을 보내기는 하지만 '하드고어'하지는 않다.그런 면에서 A급에서 활동하며 B급의 정서를 호시탐탐 넘보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특히  B급 정서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와 형식의 사변성과 혁신성 그리고 탈규범성에 대해 박찬욱은 지속적으로 눈길을 준다.  

영화<올드보이>의 상업적, 미학적 성공은 박찬욱의 대표작을 <공동경비구역JSA>,<올드보이>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영화<올드보이>는 스토리텔링의 고전성과 스타일리쉬한 영상의 완벽한 조합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영화이다. 그렇지만 <올드보이>는 박찬욱의 '복수영화' 삼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작품이었다. 복수 삼부작이 '시리즈물'처럼 어떤 인위적인 연속성의 구속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앞선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파악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박찬욱의 영화세계는 물론이고 최신작 <박쥐>도 이해하기 용이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박찬욱의 대표작은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이다. 특히 '복수'는 박찬욱 스타일의 출발점이며 지금까지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된다. 영화<박쥐> 역시 연속선상에서 보면 흥미롭게 중복되는 좌표가 지도위에 나타난다. 

영화<박쥐>를 보면서 나는 이 작품이 박찬욱의 이행기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물론 아직 새로운 빛은 나오지 않았고 어둠의 미명이 희뿌옇지만 이 경계와 어떤 단절을 기대케하는 정적이 있다. 영화팬으로서 '복기의 자기순례'가 끝나고 나서 등장할 새로운 국면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영화<박쥐>는 그런 면에서 '시작이며 끝'인 어떤 점이 되어주었면 하는것이 나의 바람이다. 

영화<박쥐>의 도입부는 사건의 개연성이 중심역할을 맡지 못한다. 마치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보듯이 장면은 툭툭 넘어간다. 사건 전개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나 인과관계 등에 무심하다는 듯 관객을 단절된 듯 보이는 시퀀스들의 빠른 진행으로 끌고 간다. B급 영화에서 즐겨 쓰는 방식이며 또한 <올드보이>에서 감금되기 전까지 사건의 진행이 이루어진 스피디한 방식이다. 도대체 왜 송강호가 뱀파이어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오로지 성경 구절 나레이션 밖에 없다.  마치 불교의 지방보살의 현현처럼 '희생자들 속에 남아 있을 희생'에 대한 강독 같은 것 말이다. 

이제 사건은 수요 마작방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고아로 자란 송강호를 친구로 대해준 신하균의 집이다. 박찬욱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따뜻한 우정의 관계로 설정하지 않는다. 부상당한 어린 짐승들의 필요적 연대의 느낌이 훨씬 강하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둘을 묶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빈 공간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영화 내내 '아버지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부터 송강호를 보아온 원장 신부쯤 되보이는 박인환 역시 영화 후반 뱀파이어 송강호에게 살해당한다. 신하균의 엄마로 나오는 김해숙의 대사는 인상적이다. "상현이..아니 신부님. 기억나시지요. 제가 라면 끓여주고..우리 애가 워낙 착하잖아요." 이 대사는 억지로 어떤 인연을 상기시키려는 비굴함과 상투성이 묘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그런데...그래서 어쩌라구" 라는 답이 뒤에 숨어 있을 것처러 말이다. 영화의 사건은 한복점이자 살림집인 신하균의 집을 무대로 발전한다. 이 곳은 송강호와 김옥빈이 만나는 곳이고 모든 애욕과 음모,살인,죄의식이 뒤얽히는 공간이다.박찬욱의 공간 미장센은 과거 70년대 영화에서 자주 쓰였던-나는 한국형 고딕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2층 거실방이다.갈색 베니아판, 좁은 테이블, 키치적인 인테리어,복도로 연결된 몇 개의 방들, 이런 상투성과 폐쇄성은 좁은 복도를 따라가는 소실점 구도로 바뀌어 자주 영화에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 박찬욱은 이런 베니아판의 상투성을 사방이 하얀방으로 또다른 상투성으로 바꾼다. 밤에만 활동하는 뱀파이어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만 이 흰색 방은 살인의 상징인 피를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공간/뱀파이어의 공간을 이원적으로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마지막 카니발이 끝나고 나서 인간/비인간의 층위에서 정치적 선택을 하던 원조 뱀파이어 송강호는 그런 휴머니즘적인 개량 투쟁이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다. 즉 '뱀파이어와 인간'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역설적이게도- '휴머니즘적인 자기희생'의 돌파구가 결정되는 공간이다. 송강호가 살육의 카니발에서 살육에 참여하지 않지만 흰색 방의 창문을 닫아 주며 묵인하는 행위와 필리핀인 신부의 목숨을 구제해주는 행위 사이에는 '근대적 휴머니즘'이 담고 있는 역설적인 딜레마가 들어 있다.  

영화에서 송강호의 캐릭터는  전형적이며 엘리트적이다. 그는 가끔 억울함을 호소하기는 하지만 있는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것에 대한 통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반면에 캐릭터의 굴절이 심한 것은 김옥빈이다. 김옥빈은 '트라우마적인 아내 혹은 며느리'에서,'성을 통해-또는 성으로 인해-자기해방'의 가능성을 점치는 여자로, 그리고 '남편 살해'를 도모하는 팜므 파탈로, 죄의식의 주체이자 자기해방의 외인적인 힘에 대해 부정하는 이중적 주체로, 그리고 다시 부활한 뱀파이어로, 마지막에는 창조자를 위협하고 살해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비인격적 존재로 변모한다. (김옥빈의 캐릭터의 변신 과정만 가지고도 충분히 텍스트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꾸려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송강호-김옥빈의 캐릭터에서 사실 '지식인-민중'이라는 이항적 도식을 꾸려낼 수도 있다고 보인다. 자기 해방의 주체역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외부적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혁명사에서 들어본 말 아니던가? 그리고 혁명은 그런 민중주체를 역사의 우두머리로 보지만 실제로 민중적 주체는 다분히 모순적이다. 김옥빈은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송강호에게 "왜 우리 셋이 잘 살고 있었는데... 너 같은 악마가 나타나서 다 망쳐버렸어.불쌍한 우리오빠.." 라고 말한다. 자기변명이자 자기퇴행의 일면이다. 결국 이것은 송강호의 폭발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송강호의 존재가 세속화의 극점을 치면서 폭발하는 장면은 뛰어나다. 영화 내에서 갈등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장면이자 또다른 전환의 신호점이다. 신부를 그만 두었을 때도, 살인을 저질렀을 때도 송강호는 자기의 존재출발점이 된 성직자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송강호는 아주 상스러운 방식으로 일시적인 단절을 보여준다. 물론 송강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애욕과 인간성에 의탁하여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부활시킨다. 

영화에서는 과거 박찬욱이 던졌던 질문들과 주제의식들이 간간히 표피에 뛰어 오른다. 박찬욱이 단절시키고 싶었던 것은 분명히 '밀납화된 도덕주의'이다. 물론 이것은 종교의 외피를 쓰고 있다.<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했다면 영화<박쥐>에서 송강호는 성기를 노출한다. 자기를 성자로 취급하는 병든자들에게 마지막 보시를 한 셈이다. 송강호는 위악적인 방식을 택했고 그런 위악은 병든 자들을 돌들게 했다. 송강호는 씨익 웃으면서 위악의 성취를 즐거워한다. 상당히 진부하고 조악한 방식으로 송강호는 계몽주의적 아이템을 전달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위악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박찬욱의 의지와 그것의 표현양식이다. 여기에 성기노출은 다분히 박찬욱 개인의 현실적인 불쾌함이 있는 것 같다. 영화적으로 보자면 굳이 감독이 성기를 노출하지 않고도 설명은 가능했다. 성기 노출이 꼭 필요했다면 그것은 다분히 '물질성'의 각인을 위한 효과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전에 박찬욱이 제작했던 영화<홍당무>에 대한 '청소년관람불가'에 대한 박찬욱의 개인적 항거가 들어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 영화는 몇 가지 장면과 극중 대사의 자극성으로 인해 의심쩍게도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박찬욱도 당시 감독이었던 홍경미도 모두 의외의 반응이라고 여겼다. '어차피 쟁쟁한(?) 정사씬으로 청소년 관객은 포기한 마당이니 그럼 한번 가보자..어떻게 할건데? ' 라는 박찬욱의 선동적인 저항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미학적 의미에서든 정치적의미에서든 두 부분에 대해 박찬욱의 결정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착한 것들의 착각'에 대하여서도 박찬욱은 생각날때 마다 한번씩 들추어낸다. 송강호는 영화에서 이런 말을 간혹 꺼낸다. "내가 뭔 잘못이 있어. 난 그냥 그들을 도우러 갔다니까?" 뱀파이어가 된 자기를 꺼려하는 이들을 보고 송강호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영화<복수는 나의 것>에서 개울가 씬과 묘한 울림을 갖는다. 그 영화에서 송강호는 신하균에게-신하균은 '복수'에서는 칼침 먹고 물에 빠져서, '박쥐'에서는 호수에 빠져서 죽는다-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안다. 네가 착한 놈인거"  영화적으로 보면 화자는 동일 배우이고 답과 질문이 도치되었다. 이 두 대사는 메비우스의 띠처럼 박찬욱의 영화세계에서 돌고 있다. 흔히들 사람들은 말한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이 어디있어요?' 그렇다. 세상은 그런 착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망치고, 그들이 탐욕하고, 그들이 힘을 부리고, 그들이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한다. '착함'은 아무런 형식도 내용도 갖지 못한 펄럭이는 깃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박찬욱은 B급의 상투적 표현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하면서 또한 '막연한 착함'이라는 동경을 후벼파고 있다. 관객은 시각적 잔혹극에 불편하고 심리적 괴롭힘에 불편하다. '착하기 때문에 착하다'는 식의 도덕주의적 순환에 대한 박찬욱의 답변이다. '그래 나도 안다. 네가 착한 놈인거.' 이 영화에는 B급의 전매특허인 오이디푸스, 죄의식, 서구의 뱀파이어 신화, 반복되는 송강호식 유머, 몇 몇 영화들의 패러디 들이 등장한다.개인적으로는 송강호가 김옥빈을 살리기 위해 상호 수혈하는 장면은 상당히,매우 인상적이다. 뱀파이어 영화에 그다지 전문적인 지식은 없으나 그동안 봐온 어떤 영화에서도 이런 혈맹적인 피의 순환을 그린 장면은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나의 혈관과 타인의 혈관이 흡혈행위를 통해 그래도 연결되어 소통되는 듯한 쾌감을 준다. 나는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문명/야만'의 상호작용인가? 육도순회의 무한공간인가? 피라는 상징을 통한 육체/이성의 전일적인 소통인가? 하여간 이 장면은 좋다.  

전체적으로 영화<박쥐>는 과거에 비해 조금 더 풍자적이고 스타일리쉬하지만 형식은 신화적인 양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박찬욱이 박찬욱을 탐구하는 영화같기도 하고 자가 복제를 통해 재생하려는 의지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이 박찬욱의 필모그라피에서 그의 대표작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만약 그렇게 되려면 다음 작품에서 영화<박쥐>에 대한 주제와 양식의 변증법적인 통합이 아니라 일종의 연속선상의 사건적인 전환이 있어야 그 의미가 다시 전유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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