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만료로 인해 회사 노조가 새로운 위원장 선거에 들어간다. 요즘처럼 '무지 잘해도 본전인 상황'에 누가 후보로 나서겠는가? 결국 1차 추천기간을 넘기고 연장 기간을 동안 한명의 후보가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다. 물밑에서 새로운 집행부 구성이 논의되는 듯 하다. 내게도 제안이 왔다. 사무국장직이다. 노조 내 랭킹으로 보자면 넘버3다. 임단협에도 참석해야하고 위원장이 상급 노조 차원의 문제로 외유가 잦기때문에 실제적으로 역할이 많다. 장기적으로는 언젠가 위원장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아마 선배들 중에서 내가 그동안 왈왈거리니까 할 만하다 싶어서 추천을 한 듯 하다. 문제는 내가 최근 회사는 물론이고 이 회사의 조직운동자체에 상당히 많이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걸 알턱이없다. 나는 가끔 후배와 이야기할 때 과장되긴 하지만 '환멸'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나는 제의를 거절하면서 솔직한 내 현재 상태를 설명해야만 했다.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평소 희생양에게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물론 조직 내에서 내가 최근에 갖는 일조 피해의식 같은 것 일 수도 있다. 복잡한 내용을 모두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전혀 타당성없는 일방적 오해만은 아니다.  

일단 내가 너무 완강하니까 잠시 물러서긴 했다. 그리고 한 선배는(그나마 그동안 나랑 가장 의견이 같았던 선배다.) 내게 소박한 이런 문자를 남겼다. "너의 고민이 인간에 대한 애정과 노동에 대한 긍정의 토대에서 함께 하길"  

좋은 말이다. 내게 만약 6개월전에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면 나는 수락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좀 지쳤고 누적된 실망에 몸살이 났다. (격려나 위로는 필요없다. 몸살은 그냥 쉬면 낫는 병이다.)  

 사실 내게 반MB나 촛불집회등은 기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득이 필요없는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당연스러움'의 부분은 내게 '강조점'이 아니다. 내게는 그런 다음의 '성찰'이 더나아가야 하는 지점일 뿐이다. 그런데 가끔 나를 흥겹게 만드는 것은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와서 '반MB하세요' 라고 전도하는 거다. 이건 마치 '독실한 기독교인에게 '예수 믿으세요. 주일에 교회 꼭가세요. 천당갑니다.' "라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조직운동을 하는 것은- 노조든 시민단체든 일단의 운동조직에 들어가 있는 것은 - 시위대에 끼여 있거나 틈틈히 정치후원금을 내는 것과 완전히 다른 문제다. 특히 개인의 의지/조직의 선택 사이에서 간극이 발생할 때 무척 피곤해진다. (몇 달전인가 나는 알라딘에 한 분에게 그런 류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 이미 답을 본인이 알고 있다는 것 정도만 일깨워 줄 뿐이었다. 그 답을 스스로 명징하게만 만들면 되는 거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기때문에 이런 선택의 상황에 예술적으로 대처를 해야한다. 조직운동에 있어서 가끔은 '내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길을 지지하고 추진해야 할 때도 생긴다. 그 타협의 폭이 너무 커지면 그 조직운동 내에서 견디기 힘들어진다. 나는 아마 이런 걸 이미 예견하고 피하는 것같다. 특히 내가 별로 이 회사에 애정이 없다는 것과 구성원들의 답답한 수준같은 것들도 영향을 미쳤다.  

분명 이 지점은 정치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지점임을 나는 안다. 조직운동을 하려면 유연해야 한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도 타협의 길을 가야한다. 또한 구성원들의 성향이 늘 동질적이지 않다는 것, 때로는 반동적이라는 것 역시 담고 가야한다. 그 모든 '토대'를 인정하고 가야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게 바로 '믿음과 애정'이다. 문제는 최소한 내가 이 조직에 그런 '믿음'도 '애정'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에서의 전투에서 외연으로 물러나는 거다. 결국 가까운 적들과는 싸우지 않고-높은 놈들은 머리에 똥이 차고 사욕으로 더럽고 치사한 거고 가까운 놈들은 못미더우니까- 국운을 걸고 멀리 있는 MB를 몰아세우는 '촛불의 투사' 내지는 '성찰적 키보드 워리어' 가 되어주면 된다. 그게 뭐 그렇지 라고생각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 스스로 이런 부분에서 약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이성적으로 말이다. 높은 놈들이 똘보수여서 어쩔 수 없는 공간도 있다. 맞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나직히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야지 변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몸을 최대한 낯추고 있더라도 변명으로 낮추고 키보드의 워리어가 되는 것과 부끄러움으로 낮추고 투사가 되는 것은 다르다. 몸살이라는 변명과 부끄러움이라는 변증법 사이에서 그길로 가려고 하는 거다. 그러니 이 아니 부끄럽겠는가.  이 아니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나같은 자유주의자들-언젠가 내가 자유주의를 비판해 놓고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는게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유의 개념파악이 잘 안된거다. 내가 비판한 '자유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정치학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여러 가치 정체 중에 하나이다. 자유민주주의 내에서는 이걸 '자유주의'대 '공동체주의'로 나누어 이야기를 한다. 거기서 '자유주의'의 극단에 '상인적 자유주의'가 있다.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좌파인 척 하는 내가 '자유주의'란 말을 하니 이해가 안될 거다. 그런 논리로 따라가면 좌파는 몽땅 '집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난 이해가 잘 된다. 내가 말한 '자유주의'의 '자유'는 소극적이면서도 인간실존의 근거가 되며, 또  미학적이기도한 '자유'이다. 쉽게 말해 '리버럴 소셜리즘'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스탈린처럼 국가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것 만이 좌파가 아니란 거다. 마르크스가 사회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누구보다 '자유'를 중요시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것이다. (알면 알고 말면 말고) 내가 학교 다닐때 아주 작살나게 싫어했던게 운동권 내의 그런 집단주의적 맹아들이었다.  

그러나 변혁운동에서 '조직'은 또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다. '조직'이란 말이 구태의 냄새가 난다면 '단체'라고 하자. 어떤 목소리들은 그런 결사의 형태를 통해 반영된다. '다중'에 대한 왜곡되고 몰지각하고 비현실적 이해는 '조직부정론'이다. 직접적으로 '다중론'이 조직부정론으로 간 적은 없다. 대신 다른 강조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좀 변화되는 경향성을 말한 것이다.그렇기때문에 너무 강조하다보면 도를 지나쳐서 나아갈 수있는 함정도 있는 법이다.포스트 포드주의 시대에 그런 새로운 주체양식이 나온다하더라도 노동현장에서 또 조직 내부에서 '저항 세력'으로서의 '대항 조직'의 역할은 마비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가까운 내 일상 투쟁의 거점이 된다면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내가 스스로 몸살을 핑계로 거리를 두려고 한다. 무너진 집이라서 못하겠다는 꼴이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뭐가 잘된 집안이라면 갈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쪽팔린 거다. 그런데 좀처럼 이 놈의 회사와 조직에 애정이 안생긴다. 그러니 계속 좋은 책이나 읽고 리뷰나 쓰고, 노조 뒷줄에서 가끔 손이나 들고,알라딘에서 거국적 차원의 분노에도 참여하고 할테다. 그나마 변명되는 것은 그동안의 회사 노조는 '타협적인 단체'였다는 것이다.노조 집행부역시 노조를 '이익단체'정도로만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늘상 초기에는 말하지만 결국 욕안먹은 노조위원장이 없다. 임협하다가 안풀리니까 그 중대한 순간에 대충 도장찍고 1주일간 휴가를 가버린 위원장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기가 잘했다고 늘상 떠벌이는 노조위원장 출신 모인사는 지난번 파업결정때(실제 아무것도 한건 없지만) '너네들 그런 식으로 해봐'라는 투로 팀원들에게 말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 노조가 내가 말하는 그런 운동의 전위로 작동한적은 단 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우리 회사 노조에 삐딱하더라도 덜 미안하긴 하다. 어쨋거나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면 두 개의 층위의 싸움 중 하나로 부터의 퇴각이다. 그런데 폼 나게 이야기해도 쪽팔린 건 가시지 않는다. 편안한 싸움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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