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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스튜어트 홀 지음, 임영호 옮김 / 한나래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대처'를 처음 보려고 했을 때 현재적 의미의 작용점은 MB정부였다. 물론 오래전 역사의 이불 속에 들어있는 추억을 다시 꺼내는게 현재 무슨 도움이 될 것이냐는 생각도 있었다. 또한 우리와 다른 정치환경 속에서 발생한 일인데 어떤 적용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읽기'를 한 것은 30년전 영국에서 발생한 일을 그대로 가져와서 한국이라는 주형에 억지로 맞추기 위함은 아니다. '타산지석'을 '나는 그렇지 않지만 남들은 다른 산의 돌을 그대로 가져다 옮겨놓는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은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든 68혁명이든 아니면 어떤 역사든 우리가 읽고 공부하는 것은 그것으로 아이디어를 얻고 성찰하려는 것이다. 결코 그것의 클론을 이 땅에 이식하려는 행동은 아니다. (일부에서 그런 이식작업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를 읽다보면 커다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그것은 대처와 MB를 직접 대입하려는 유혹이다. 기본적으로 MB는 대처가 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대처가 실시한 정책과 철학의 큰 틀은 MB의 그것과 유사하다. 신자유주의, 기업하기 좋은 사회, 민영화, 복지정책의 축소 등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처읽기'를 하다보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자꾸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이자- 또한 희망은- MB가 대처만큼 '헤게모니적'이지 않다는것. 그만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간 '대처리즘'과 MB노믹스'의 유사한 점을 중심으로 폭로성 리뷰를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를 유혹한 방식은 그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마 알라딘의 추천이 몇 개는 더 늘겠지만 나는 그런 유혹을 물리친다. 이유는 스튜어트 홀이 이 책에서 그람시를 경유하여 그런 기계적 대입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세와 국면'이란 것이다.
이 책의 글들은 '철의 여인'이 몰락한 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씌여진 현장성 있는 글들이다. 때문에 후반부에가면 중복되는 느낌을 받을때도 있다. 스튜어트 홀은 먼저 대처리즘의 특성을 분석한다. 이전에 '대처읽기'에서도 몇 번 쓴 내용이어서 자세히 반복하지는 않겠다. 스튜어트 홀은 대처리즘을 두 가지의 모순적 결합체로 이해한다. '퇴행적 근대화'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다. 앞의 것을 상징하는 구호가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였다.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라는 개방 정책을 택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도덕운동 성격을 갖는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스튜어트 홀이 풀란차스의(이 책에서는 풀랑자라고 번역한다.낯설다.)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라는 개념에서 빌어온 것이다. 풀란차스의 개념은 '민주적 계급 지배의 외형들은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면서, 스펙트럼에서 강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강제/동의의 새로운 조합'(p300) 을 말한다. 스튜어트 홀은 이 개념에 몇 가지 국면적 비판을 가하고 난 이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authoritarian populism)이란 용어를 만든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대처리즘을 '헤게모니 전략 프로젝트'로 이해한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튜어트 홀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선 이해가 필요하다. 홀은 '이데올로기 간의 인정투쟁과 헤게모니를 얻는 과정'을 (광의의)정치로 본다. 즉 대처는 단지 집권을 하고, 신자유주의를 영국사회에 이식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처와 당시 집권 세력의 꿈은 그것보다 원대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국의 재구성', '상식의 재구성'이다. '대처리짐의 역사적 프로젝트는 정치지형의 재구성,재정의 하고,정치 세력들 간의 균형을 바꾸어 놓으며,새로운 종류의 대중적 상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를 통해 시장,사적,소유적,경쟁적, '인간/남성'이 미래에 어울리는 유일한 방식들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p397 ) 이를 위해 대처는 아주 긴 시간동안 그리고 집요하게 이 문제를 추진해왔다. 그리고 대처의 집권기동안 영국은 어떤 형태로든 변한다. 이제 그 변화는 좌파든 우파든 현실로 인정하고 갈 수 밖에 없는 토대가 되어 버린다. 대처 후 블레어의 동당은 상당부분 대처리즘 하의 노동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스튜어트 홀의 기본적인 목적은 '좌파의 갱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홀의 작업은 대처가 숙성할 수 있었던 영국 사회의 토양과 노동당 내부와 좌파의 경직성에 대해 돋보기를 들이덴다.
영국은 전후 '조합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기본적으로 정도는 나르지만 케인스주의라는 휘장아래 손을 잡았다. 문제는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노동당의 이념이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 '의회주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는 파비안주의의 흐름이 강했다. 파비안주의는 그람시가 말한 위로부터의 혁명 즉 '수동혁명'의 변형판이다. 결국 노동당은 정도는 다르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빠졌던 가장 큰 함정인 '국가주의'에 함몰되고 만다. 변화하는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외면한 노동당의 국가주의는 '관료제'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에는 당연히 비효율의 문제와 정책집행기관과 대중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대처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집단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개인의 힘'을 강조하는 '자유'의 가치를 가지고 대중들의 상식을 장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처는 노동당 보다 오히려 더 그람시의 '블록'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노동당이 경제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고 홀은 지적한다. 즉 '노동계급=노동당'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정책의 집행방식 역시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홀은 -계급을 부정하진 않지만-그람시를 인용하여 여러가지 욕망과 이해의 상관관계가 불균형하게 규합되는 '역사적 블럭'을 대입한다. (가끔 분기탱천한 이런 류의 글을 본다. 왜 '계급투표'를 하지 않지? 답답하네...라는 식의 댓글들 말이다. 대개 전통좌파의 설명방식은(또는 계급 개념에 별 생각 없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 조차) '대중들이 스스로 계급의식이 부족해서.또는 지배집단이 헤게모니작업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생각을 갖는데 방해를 하고 있기때문에..라는 식이다. 그러니까 '거품'을 물수 밖에 없다. 물론 그 지적이 전혀 거짓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계급'문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왜 다른 계급에 투표하는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 좌파들이 그람시의 블럭개념을 모를이 없다. 그런데 그런 대답을 하는 것은 지키고 싶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욕망때문이다.물론 이는 내가 가진 '비본질주의적'입장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노동당이 전통적 좌파의 중심인 남성중심의 노동자 지지층에 기댄 반면 대처는 이미지 표상의 선두에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내세운다. 대처 스스로 그런 집안 출신이었기때문에 누구보다 강한 흡입력이 있다. 그리고 대처는-가장 능했던 방식인데-맥락의 단순화와 부정적 극단화를 통한 개념의 재배치구도로 만들어낸다. 즉 나른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국가의 틀에서 안주하고 파업이나 하려는 노동자들과 맘모스처럼 거대해진 국가적 기업들 속에서 자기의 가정과 성공,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규모 자영업자들. 이런 식의 대결구도 말이다. 말이 안되는 이데올로기적 장난질이다. 그런데 이 안에는 일단의 진실이 있고 물질화하기 쉬운 대중 이미지를 만든다. 결국 이런 구도가 만들어지는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어..하다' 가 끌려가는 것이다.대중들과 좌파들은 이런 대처의 작업에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스튜어트 홀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 책에서는 그런 비판에 대한 스튜어트 홀의 반비판도 만날 수 있다. 홀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 계급 문제에 대해 흐리멍텅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 대처에게 있지도 않은 어떤 일관성을 부여했다는 것 등등이다. 엘린 메이신즈 우드의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에서는 NTS, 즉 '뉴 트루 소셜리즘'이라고 해서 '신사회운동가'로서 스튜어트 홀을 직접 언급하며 '전통적 좌파'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 비판은 스튜어트 홀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문화연구를 비롯해서 68년 이후 유럽 좌파내에서 힘을 받은 '신좌파'들에 대한 성찰적 비판이다.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는 2,30여년전에 씌여진 글이다. 앞서 말했듯이 상이한 정치적 토대와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 국면에서 그의 논의를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국면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꽤나 설득력있는 아이디어들을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자유/평등이냐 묻는 질문등에 대해서와 같은...뒤에 설명하자.) 스튜어트 홀이 좌파의 재구성,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제안하는 말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엔 어느 정도 통속적인 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의미한 것은 이것이 제대로 실천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그는 일단의 세계사적 변화의 길들을 정확히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대처리즘에게도 그가 일단의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면 대처는 그 길목의 어떤 지점들에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좌파가 '보증받은 사회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어서 '급진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라고 주문한다. 마르크스의 '사회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좌파의 '국가주의'에 맞서서 오히려 '국가'에서 사회로의 이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 계급 중심성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소수계층을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등이다. 결국 좌파의 성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적 블럭'들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고 그것은 다양한 욕망의 결을 따라 이를 통합해낼 수 있는 정치의 역능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좌파는 스스로의 '용어'를 가져야 한다. 이 용어들은 대중들의 상식에 바탕을 두고,또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나갈 비전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좌파에게 부족한 것은 결국 '능동성' 이다. 반대는 반대로서 훌륭한 가치이지만 생산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대중은 생산의 정치를 원한다.
P.S) 가끔 '자유/평등' 중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 질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도덕 교과서 '더 생각해볼 문제'에도 나오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질문은 연원도 깊고 논의도 심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공동체주의'도 따지고 보면 이런 근간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사회주의도 그런 문제에 대답하는 한가지 형식이다.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면 좀 난감하다. 왜냐하면 질문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고 있기때문이다. 대처가 가장 즐겨쓰는 방식이 일면의 진실을 극단화하여 배열하는 '선택요구'이다. 나는 예전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돌파구로서 지젝이 '반유태주의'에 대해 말한 '질문의 거부'하는 방식이 유효하다고 말했다. 이런 질문 자체는 질문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배열에 의해 구획시켜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선택하면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 '평등'을 선택하면 '공동체주의=(확장하면)사회주의' 라는 식이다. 스튜어트 홀은 대처가 '자유'의 이념을 어떻게 도용하는지 보여준다.
'자유 이념의 특정한 버전(신자유주의에 해당)을 전유하고 다른 반동적인 이념들과 연결시킴으로써 하나의 전체적인 철학을 만들어 우파의 강령과 세력들 속에 연계지었다. 이들은 소극적 자유라는 이념을 '시장의 자유'와 같은 것이고 거기에 의존하는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평등 이념과 대립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사회적 해방이라는 더 폭넓은 의미에서 소극적 자유나 적극적 자유는 좌파의 철학에서 항상 핵심적인 요소였다. .... 시급한 것은 소극적 자유개념을 다시 탈환한 후 민주적 삶 전체의 심화라는 맥락 안에서 거시에 대안적인 접합을 부여하는 일이다.(p435)
누군가 '자유/평등이냐? '묻는다면 장난스럽게 응하지 마라. 그리고 잠시 숙고후 질문지를 수정하라. 1)소극적 자유 2)적극적 자유 3) 사회적 자유 4) 기회의 평등 5) 분배의 평등 6).... 7).... 이렇게 하고 여러 개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좀 답하기가 쉬워진다. 질문을 거부하면서 다시 주체적인 질문을 만듦으로서 이분법을 통한 '선택'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피하는 거다. 그리고 동그라미 친 가치들에 대해 꾸준히 실천해 나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