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정치적이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 마음은 공통된 감정이다. 5일장까지 계속 추모의 정을 이어가지 않는다고 나를 몰인정하거나 각박한 인간으로 폄하하진 않길 바란다. 그저 '김수환추기경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담론 형성의 텍스트가 현재 길거리에 마구 뿌려지고 있기 때문에 이 '즐거운 현상'을 그냥 목도할 수 없어서라는 소박한 이유때문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도 계속 추모한다. 하여간 '나와 친구들'의 의견외에 토달면 '분파주의'라고 하니까 매번 글을 쓸때마다 사족을 달아야 한다. 그건 좌파나 우파나 반MB나 친MB나 마찬가지다. 자기의 투쟁방식, 자기의 인식 수준에서의 연대방식 외에는 모르기때문이다.) 

지금의 텍스트는 '김수환추기경 1면기사'들이다.  인터넷으로 보거나 하지 말고, 직접 종이신문을 통해서 보는게 좋다. PDF도 괜찮다. 왜냐하면 인터넷 신문의 텍스트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편집의 '공간성'이고 그런 '배치'가 주는 정치성이다. 편집이라는 또하나의 권력 양식을 생각해보면 인터넷 기사는 독립적이긴 하지만 맥락적이지 못하다. 지면 신문에서 기사를 어느 위치에 어떤 제목활자체로 어떻게 쓰느냐 등등은 별거 아니지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지면 신문은 텍스트의 비평과 텍스트를 배치하는 비평을 동시에 할 수 있다.(신문방송학에서는 기본적인 일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걸 해보면 좋을 듯 하다. 

조중동이 김수환 추기경 텍스트의 주제어를 하나로 꼽는다면 '화해'이다. 몇 장에 걸친 특집 기사들이 끊임 없이 양산되고 수많은 시민들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이런 저런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중점은 '국민통합'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죽음을 작동시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중동은 김수환 추기경의 삶 중 어떤 측면을 자의적으로 절단하여 자신들의 용어'국민통합'의 이름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의 삶 중 상당부분은 현재 조중동이 지키고자 하는 '기업가주의' 가치관과 배치되는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병상이 아니셨으면 용산참사를 보고 '철거민'들을 위로하셨겠는가 아니면 강제진압하고 나몰라라 하는 정부와 경찰의 등을 두드려주셨겠는가?  조중동의 죽음으로 부터 뽑아낸 이데올로기 선점이다. 

한겨레는 사실 오늘 대충 보고 말았는데...편집도 그렇고 좀 무미건조하다. 생명존엄사이야기도 있었고...뭐 대략. (경향은 오늘 보지 못했다.) 

이래 저래 오늘 가장 눈에 띄는 신문은 중앙일보다. 전술적인 측면과 감각적인 측면에서 발군이다.(이런걸 무시하는 것이 좌파라면 좌파는 좀 더 세련되어져야 한다.) 중앙일보는 '명동'의 길게 늘어선 인파에 주목했다. 명동이 거의 마비된 수준이다.20만명이라고 했던 것 같다. 중앙일보의 1면 상단부터 해서 무려 여덟면에 걸친 머릿부분 사진에 주목하시길. 길게 늘어선 줄을 연속사진 접사처럼 계속 배치하고 있다.  

무미건조한 한겨레와 감각적인 중앙일보 사이에서 독자는 어디에 눈이 더 갈까? 그리고 이런 시선끌기는 텍스트가 만들어 놓는 주름에 따라가게 만든다. 중앙일보가 죽음에서 뽑아내는 정치적 골을 따라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추모기사는 정치적인 NIE로 쓰기에 좋은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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