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가는 폭력에 기반한다."  

레온 트로츠키의 말이다. 사회주의자였던 트로츠키는 궁극적 의미의 '국가 해체' 라는 방식을 통해서 이런 폭력 역시 종식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것은 눈 앞에서 당장 벌어질 일도, 또 누워서 기다리면 도래하는 일도 아니다. 또한 나는 트로츠키의 원대하지만 소박한 꿈에 회의적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보면 사형제도는 국가 폭력의 사회적 합의태이다. 이는 '법과 제도'를 통해 현실화된다. 우선 우리는 두 가지 지점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하나는 '국가의 형성' 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합의'이다.  앞의 것은 다분히 인류학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분석만 가능하다. 함수로 치자면 종속 변수에 해당한다. 반면 '사회적 합의'는 유동적인 독립변수이다. 사형제를 두고 각 국 마다 다른 태도를 취하고 또 일국 내에서도 논쟁이 있는 것은 독립변수를 재구성하기 위한 대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결과에 따라 함수-여기서는 국가-의 성격도 달라진다. 이 말은 '악'의 국가가 갑자기 '선'이 된다거나  '사형제폐지'가 범죄를 늘리거나 줄인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적 논의라는 담론 투쟁의 장을 통해서 도출된 합의는 일종의 사회적 상식을 규정하고 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전체적인 신념 수준을 규정한다.( 마치 구조주의자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거대한 방법론과 상관없는 상식적인 말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이라는 제의를 통해서 인류에 묻어 있는 폭력의 흔적에 대해 말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폭력과 희생양의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원초적 폭력' 이라는 것은 카인의 호적을 받은 모든 이들의 장부에 붉은 줄이다. 만약 니체였다면 이런  '원죄모델'에 근거한 지라르식의 기독교적 죄의식 문화에 대해 통렬하게 반박했을 것이다. 인류의 계보를 쫓아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국가의 탄생에서 만나게 되는 폭력을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근대 국가 형성의 역사가 짧은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해방 이후 근대국가 형성기에 빈번했던 '사법살인'들, 그리고 인혁당 사건으로 기억되는 '독재정권'의 만행들, 군부의 제노사이드라고 말해야 할 '광주'의 살인들... 이 모든 것은들 '국가 폭력'의 직접적 예이다. 우리는 이런 거대한 종류의 '국가 폭력'에 대해는 어느 정도 민감한 촉수를 세운다. 반면 '법'과 '상식'의 이름을 이루어지고 있으며, '응징'의 대상에 명백환 형사상 범죄인에 대한 '사형'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갖는다. 상식적 수준으로 말하자면 '사형'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자에 대한 사회의 징벌'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 라는 통념적인 생각이 들어 있다. 나 역시 연쇄살인범이나 성폭행자같은 범죄자들을 볼 때 가끔 '저것들을 잡아다가 모두 거리에서 육실을 시켜 버려' 이런 생각이 순간 순간 든다. 그리고 나와 그가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 또한 확실히 든다. 그렇지만 '생명' 이란 이름 앞에서는 사실 머뭇거리게 된다. 그와 나는 분명히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지만 '생명'의 이름 앞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이야기를 하자.  

근대국가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 해주는 자유주의의 이념하에 성립했다. 물론 전근대시기 국가에도 지배계급에 의한 폭력은 있었다. 이것이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에 통합된다. 근대국가는 '폭력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한다는 말이다. 여기는 '법'에 의한 처벌이라는 것이 합의를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다. 근대 국가는 주권 영역 안에서 '법'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이제 '독점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된다. 또한 근대국가는 대외적으로도 국가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 또한 확보한다. 헌법 등에 보장된 교전권같은 것들이 그런 항목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독재권력이 행사한 독점화된 국가폭력이다. 무수한 희생자들이 있었고 또 그 상흔은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다. 조봉암 선생이나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같은 경우들은 단지 정권을 위협한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두가지 문제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는 '독점화된 국가폭력'을 어떤 식으로 견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인 '법'은 어떻게 구성되어지는가? 라는 문제이다. '법대로 하자'에 대해서 '법'은 무엇이고 '법'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 를 질문하는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상식적인 질문이다.나는 그 중에 하나가 '생명'을 법의 이름으로 앗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정적을 제공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는 의미때문 만은 아니다. 또한 '존엄사' 문제와도 관련이 없다.(난 개인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한다. 의학과 법원의 엄격한 규정하에서 집행되어야 하겠지만 이것과 사법제도에 의한 사형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카톨릭같은 경우는 여기에서 '생명'에 대한 종교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사형'제도가 가지고 있는 법적인 효과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형이 아무런 범죄 예방효과가 없다는 걸로 말이다. 결국 사형이 존속하는 이유는 사회심리학적으로 대중들의 공분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 에 가깝다. 이 '위령제' 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게다. 그렇지만 '위령제'라는 방식 말고도 우리는 이성의 힘에 의해 사회적 공분을 처분할 수 있다. 우리는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더욱 이성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못믿을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그 정도의 역할을 해낼 만큼의 충분한 용량은 확보되어 있다.( 물론 희생자 가족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경험을 했어봐?' 라고 무식하게 묻지마라.죽는다. ㅋㅋㅋ )  

국가폭력이 일상화되고 관대한 나라일 수록 사형제도에 대해 우호적이다. 그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 형태에 나타난 양상이다. 현재 우리 눈에 비치는 국가폭력의 형태와 사형제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현 정부는 '새로운 시대' 로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군인들이 대접받던 시대로 시대를 재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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