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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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who could not make up his mind.....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8년 영화 <햄릿>은 이런 문구로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햄릿'을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이다. '작심하지 못한 한 인간' 햄릿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석기의 <나의 '햄릿' 강의>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런 햄릿 상이 19세기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서는 햄릿을 빗대어 " 갸날픈 꽃이나 자랄 수밖에 없는 화분에 오크 나무를 심어 놓은 격"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유약한 햄릿이라는 상식적인 이름은 현재의 시대에도 통용되고 있다. 과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 역시 그런 역사의 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김정환 역의 '세익스피어전집' 중 <햄릿>을 가장 먼저 읽었다. 과거처럼 줄거리나 쭉 쫓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수 백년 동안 다른 이름의 '햄릿'이 있어 왔듯이 내 독서에도 다른 양상으로 읽히는 '햄릿' 을 주조해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난 한 해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자기를 과장하여 말하는 습관을 지속하며 말한다면- 실존의 고민들을 '햄릿'의 부스러기 속에 비추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그리스인인 것처럼 우리 모두는 햄릿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가?

 대개의 고전이 그렇겠지만 햄릿 역시 문제적 작품으로 해석의 다양성이 <햄릿>을  <햄릿>이상으로 만들었다. 나는 먼저 가장 구하기 쉬운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8년 영화<햄릿>을 봤다. 나중에 한 번 더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가장 인상적인 것은 흑백대비가 강한 공간 설정이었다. 첫 장면의 파수꾼 교대 장면과 궁전 복도씬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햄릿이 왕비 거트루드를 비판하는 침대 씬이다. 그 둘의 키스 장면은 보다가 깜짝 놀랐다. 다분히 오이디푸스적인 키스였다. 뒤에 읽었던 여석기의 <나의 '햄릿' 강의>에서는 내가 올리비에의 영화에서 본 장면들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쪽지 시험을 맞춘 아이처럼 철없는 자부심을 느꼇다.) 20세기 초반 <햄릿>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이 부각된 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어네스트 존스의 <햄릿과 오이디푸스>에서 촉발된 것이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키스씬은 정확히 그의 반영처럼 보였다. 침대라는 장소 설정부터가 그런 느낌을 준다.  프로이트적 해석에 의하면 결국 햄릿은 복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햄릿은 살부의 욕망과 어머니와의 동침 욕망이 공존하는 존재인데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존재가 바로 삼촌 왕인 클로디오스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의 투사가 바로 그이기 때문에 햄릿의 에고는 제지당하는 것이다. 여석기 교수는 이런 가설을 도식적이라고 비판한다.  

앞서 말했듯이 여석기의 <나의 '햄릿'강의>는 괜찮은 조타수 역할을 해주었다. 텍스트와 텍스트 바깥의 것을 나누어 본다면, 개인적으로 텍스트 외적인 것의 재미가 더 컸다. 판본의 문제라든지 햄릿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들,그리고 책 후반부에 나오는 햄릿과 관련된 연극,영화등에서 해석의 문제들. 실제로 텍스트 부분은 조금 더 보강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회가 되면 여석기의 책만 따로 리뷰를 작성할 생각도 있다.  

 이번에 햄릿을 읽을때는 평소 안하던 짓을 했다. <햄릿>의 영어 원문을 놓고 함께 읽었다. 판본도 잘 모르고 해서 그냥 최근에 나온 signet 시리즈의 페이퍼 북을 구했다. 이 책에도 원본 텍스트 이외에 읽을꺼리가 꽤 있다. 서론을 비롯해서 대여섯개의 에세이들이 있는데 꼼꼼히 읽어보면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대충 눈으로 훑어보다가 포기했다. <햄릿>은 연극대본이고 또 운문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낭독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었다. 독특한 리듬감은 번역으로는 결코 감당해 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햄릿>처럼 언어유희가 잘배치된 책에서는 그 단어와 운율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원문이 필요하다. 

햄릿 1막에 왕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첫 대면 장면이 있다.언젠가 알라딘의 로쟈님이 번역 비교를하면서 예로 들었던 문장이 나온다. 

왕 클로디어스: but now, my cousin  Hamlet, and my son (그렇고 자, 내 친척 햄릿,그리고 내 아들)  

햄릿 :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 자식보단 조금 더 친한) 

번역은 여러 형태가 있는 걸로 안다.어찌되었거나 비교급 뒤에 kin과 kind를 배치해서 생기는 운율적 효과를 옮기기는 힘들다. 여석기의 <나의 햄릿 강의>에는 이 문장 뒤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를 통해 번역자의 곤란함을 말한다.

"Not so, my lord, I am too much in the sun" 

천만의 말씀, 볕을 너무 받아 아들 노릇이 눈부십니다: (여석기 역) 

그게 아니죠,폐하,오히려 햇볕을 너무 많이 쬐고 있는 거죠(김정환 역) 

김정환 역은 원문대조해서 보기 좋은 점이 거의 직독직해에 가깝다. 행을 원문에 거의 맞추고 있다보니 따라 가기 좋다. 그런데 저 문장을 처음 봤을 때 김정환 역으로는 '엥...뭥' 그랬다. 오히려 여석기 역이 클로디어스가 '햄릿 너 너무 우울해 보이는데...'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 비꼬는 식의 대답으로 어울린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in the sun이 앞서 말한 and my son의 댓구라는 것이다. 번역자는 그것까지 옮길 수는 없다. <햄릿>에 등장하는 이런 문장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특히 운문이라서 읽다보면 입에 감기는 무언가가 있는데 대개가 대조나 비교,동음이의어,또는 이음동의어등을 통한 말장난들이다. 원서와의 비교 낭독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 

햄릿 5막에 나오는 이런 말들도 한 번 읽어 보자. 이건 우리말로 번역되어도 그런 효과를 발휘하기는 하지만....밑줄 그은 말이어서 옮겨보자 

참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그게 지금이라면,앞으로 오지 않을 것. 앞으로 오지 않을 거라면,지금일 것.지금이 아니라면 그래도 올 것. 

There is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 if it be not to com,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  

낭독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무지에서 오는 짜증을 감당해야 한다. 현대어도 아닌 옛날 잉글리쉬를 뜻도 모르면서 따라 읽는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햄릿> 읽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같은 이가 자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햄릿>의 주인공들의 독백을 1막부터 하나씩 따로 읽어보면 주인공 햄릿의 내면적 변화가 드러난다. 특히 5막에서 햄릿은 과거와의 어떤 단절이 있다. 그가 4막에서 포틴브라스의 군대를 보고 했던 독백처럼 '위대하다는 것은 위대한 명분없이는 움직이지 않는게 아니라,지푸라기 하나를 놓고도 위대하게 싸우는거다' 라는 위치에 올라섰다. 여석기의 책에는 그래서 5막에는 독백이 없다라고 한다. 햄릿의 독백만 모두 따로 떼어 읽어 본 것도 이번 <햄릿> 읽기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인생의 어떤 국면마다 바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개인 안에 들어 있는 비겁함과 용기,선과 악 사이의 끊임없는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햄릿을 읽다가 '존재'와 '죽음' 사이, 그 어떤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햄릿>의 첫번째 대사가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이었고 햄릿의 마지막 대사가 '나머지는 침묵이로다'이다. 죽음은 말을 할 수 없다. 햄릿이라는 텍스트 안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형식상으로도 그런 틀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존재' 에 대해 말하길 좋아하지만 '죽음'에 대해 말하기 싫어 한다. 아니 오히려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도 안다. 특히 좀 의식있다는 사람들,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모두 거짓이다. 샛빨간 거짓이다. 자기 조차 속이는 거짓이다. 그런 초연함 속에서도 당신은,아니 나는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초연한 그대는 새치기 하는 자동차에 욕지거리를 하고, 더러운 승냥이가 당신의 이웃을 물어뜯고 있어도 눈만 살짝 돌리며 어제처럼 아이에게 밥을 먹인다. 살아 생전 언제나 '죽음'은 타자이다. 햄릿 역시 실존의 딜레마 앞에서 언제나 '죽음'이란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 '죽음'을 두려워하든 비웃든 부러워하든,어떤 형태로든 그 앞에 이 문제는 장애였다. 우리는 '죽음' 앞에 겸손할 수 있을까? '죽음' 앞에 걸려 있는 나를 넘어갈 수 있을까? 언제쯤 되면 이런 미력한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누군가 내 생명줄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때, 그 때서 비로소 '삶'과 '죽음'의 진실에 눈을 뜰 것인가?  내가 큰 궤적을 그리며 땅으로 쓰러질 때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알 것인가? 나는 나를 왜 구타하지 못하는가? 사라지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 나비가 못되었구나.(바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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