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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훈장이고,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내 분노를 폭발시키기 위함이라면 그 싸움은 이미 흔들린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런 싸움은 상대를 궤멸시키고 나를 망친다.
"세상에 혁명을 울부짖는 사람은 많지만 실재 그 중에 혁명을 향유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는 옛 경구를 떠올려 본다.
나를 정의에 두고, 나를 상식에 둘 때 그것은 언제나 폭력과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깊은 성찰이 늘 필요하다. 이 말은 보편성에 대한 부정이 결코 아니다. 나의 정의가 겸허하길 바라는 소망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 "
빅토르 하라의 노래를 듣다보면 그의 비극적 죽음 앞에 마음 한 켠이 내려앉는다.
그의 노래 Luchin 이다. 하라가 만났던 가난하고 병든 아이의 이름이다.
<Luchin>
바카랑스의 지붕위에 떠있는 연처럼/ 연약하게 어린 루친이 놀고 있다.
찬 바람에 두손이 파랗게 언채/누더기 공을 꼬옥 쥐고/고양이와 개와 말들이 그것을 구경한다.
그의 두 눈은 넘치는 초록빛 연못/그 짧은 인생을 벌거벗은 배로/진흙 바닥을 기면서 살아왔네
그 비좁은 공간 안에서/함께 살던 그 말은 루친의 장난감/말도 그 역할을 좋아하는 듯 했지
누더기 공을 쥐고/고양이와 개와 더불어/루친은 뼛 속 까지 젖어 있었네
세상에 루친 같은 아이들이 있어/흙과 벌레들을 먹고 있다면/그들을 가둔 우리를 열어 젖히자.
누더기 공을 쥐고/개와 고양이와 말과 더불어 날게 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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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와 함께 ... 평화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