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여행'에 대해 말한다. 담장을 넘지 않고 사유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여행이다.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 하여 모든 것이 한 뿌리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굳이 담장 밖을 넘지 않아도 세상의 이치를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하안거 해제를 한 선가의 스님들이 화두정진하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관념을 통한 여행이 온전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먼저 개인의 부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태공 '여상' 이 낚시로 세상을 구한것 처럼 호숫가에서 세상을 알만한 내공이 부족해서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못난 인간들은 실제로 결코 살아생전 그런 경지에 이르지도 못하면서도  도가풍의 서적 몇 권과 참선 몇 번에 마치 그 경지 언저리를 이해한다고 믿는 인간들이다. 화두를 부여잡고 있다 보면 어느날 문득 '돈오'한 것 같은 마음이 든다고 한다. 경박한 젊은 스님들은 그 때 더 이상의 가르침은 필요없다면서 하산하려 한다. 큰 스님들에게 죽비 한 대 제대로 맞으면 돌아오는 스님들도 있고, 자존심 강한 스님들은 '자신의 깨우침'을 믿고 산문을 나선다. 대한민국 국정 교과서가 사람들에게 '속류 유물론"을 잘못 박아 놓는다면 스스로 관심이 불러 일으킨 섯부른 공부는 '속류 관념론' 을 한 단계 높은 경지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우를 범한다. 

관념의 여행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도 산 속 야생화들이 내뿜는 향기를 느낄 수는 없다. 잠시 걸터앉은 평상에서 발을 쭉 뻗었을때 날아가는 노독의 그림자를 볼 수 없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굵은 주름살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여행은 언제나 석고처럼 굳어져가는 몸의 모든 감각을 되살려낸다. 뜨거운 아스팥트를 걷는 발바닥이 어떻게 아릿한지, 귓 밑으로 흐르는 땀방울이 얼마나 간지러운지, 바람이 내 머릿결을 어떻게 쓰다듬는지....여행은 반복적인 일들로 화석화 되어가는 도시인들에게 사람이 얼마나 사방으로 감각을 펼칠 수 있는 존재였는지 알게 한다. 나는 그래서 여행이 좋다. 묶여 있던 모든 근육들이 어색하게 기지개를 편다.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게 몇 번 팔을 돌려보지만 이내 적응된다. 그리고 들판을 뛰어다니던 조상들의 유전자가 내 몸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듯이 기억 속의 DNA가 좌심방의 펌프질과 함께 동맥 사이로 뛰쳐나온다. 여행은 그래서 좋다.

나의 휴가가 사실 조금 더 아날로그가 되길 나는 바란다. 그렇지만 당장에 쉽지는 않다. 내가 세상의 의무들을 조금 더 충실히 해 놓고 난 이후에는 그런 시간들이 올 것이다. 나는 조급해 하지 않으려고 다독인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나 나보다 먼저 많은 의무들을 감내해낸 사람들의 여행기를 볼 때면 늘상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시간이 있는 법임을 안다. 그것은 봄처럼 더디온다. 내가 재촉한다거나 염원한다는 행위는 그닥 상관이 없다. 물론 그것이 내게 왔을 때 멀뚱멀뚱 지나치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의 채비를 할 수 있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번 휴가는 하동에서 며칠, 무주에서 며칠, 청주에서 며칠을 보냈다. 가는 마다 산은 깊었고 잎새는 빗방울을 맞아 더욱 짙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아름답게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미는 우리가 가는 모든 여행지를 따라다닌 친구였다. 지상에서의 짧은 시간을 우리 가족과 함께 해준 매미가 잘 되길 바란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그 매미의 자식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을게다.도시는 목소리 높은 말매미들이 점령했지만 아직 시골에는 어린 누이의 목소리처럼 카랑카랑한 참매미들이 많이 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대개 그렇지만 여름 휴가는 아이를 위한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Baby First' 이다. 하루의 동선도 여유있게 잡아야하고 잠시 머물 곳도 그렇다. 여행 중에 카메라의 렌즈는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담는다. 백 여장의 사진 속에 정작 내가 등장하는 장면은 두 세컷 뿐이다. 아이는 쌍계사 계곡에서 첨벙첨벙 방개처럼 놀았고 비 내리는 청학동에서 슥슥슥 땅강아지처럼 산길을 올랐다. 삼성궁을 내려가는 동안 등에 닿는 아이의 통통한 볼 느낌도 좋았다. 무주에서 아이는 팬션 앞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가 바람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즉석에서 안무를 했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해바라기의 떨림처럼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일명 '해바라기 춤'이다. 팬션 주인은 아이의 춤사위를 보고 파안대소를 지으며 앞선 손님이 주고간 숯불장작 고구마를 건네주었다. 처음 타본 케이블카에서 아이는 아닌 척 했지만 내심 긴장했다. 산 정상은 운무의 바다였다. 고사목들이 마치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보였다.

청주에서 하룻 동안 일명 '액자 휴가'를 얻었다. 너무 피곤했던 탓에 가져간 책은 채 두 장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오랜만에 <풍월당>에 들러서 몇 장의 음반을 샀다. 늘 틱틱거리지만 사실 오랫동안 내 팬클럽임에 분명한 풍월당 실장이 주는 향긋한 커피향도 좋았다. 새로산 음반은 풍월당에서택배로 부쳐주기로 했다. 휴가가 끝난 오늘쯤 도착할터이다. 압구정 CGV에서 영화 <다크나이트>를 흐뭇하게 보았다. '명불허전'이다. 읽어낼 텍스트도 무척 많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자웅동체'같은 '배트맨/조커' 라는 캐릭터다. 돈은 많지만 아직 머리가 덜 깨인 배트맨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책머리에 괴테를 인용한 이런 글이 나온다.

".... 그래서 결국 너는 누구란 말이냐? " 

"나는 영원히 악을 원하면서, 영원히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이지요."  -괴테, <파우스트>

이 말은 그 반대로 읽어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선을 원하면서도, 영원히 악을 행하는 힘'으로도 말이다. 배트맨의 가장 큰 실수는 '악'을 섬멸할 수 있다고 믿는 의지이다. 물론 정의를 이루려는 작은 바람에서부터 시작했겠지만 시종장 알프레드의 말처럼 '선을 넘었다.' 는 것이다. 히스레저가 맡은 조커라는 캐릭터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돈'보다 '메시지'를 중요시여기는 악이다. 그러니까 정작 상대하기 힘든 것은 '사욕'을 달성하기 위해,'돈'을 중요시 여기는 '대한민국의 보수우익'들이 아니다.(이 놈들도 상대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작 힘든 상대는 '악무한의 악'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려 다른 무엇일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게임이론'도 등장하고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또한 프레임을 걷어차는 방식의 '탈주'에 대해서도 언뜻 이야기한다. 마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마 안톤 쉬거의 동전던지기를 거부한 여인처럼 말이다.

서울에서 알라딘의 몇 몇 분을 만났다. 생각했던 이미지와 유사하면서도 또 조금 씩 다른 면들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사람이란게 늘 그런것이다. 글 속에 나타난 자기는 언제나 미화된다. 그렇지만 실재에서는 그 사람의 향기가 난다. 그것은 철장 속의 동물과 초원에서 만나는 동물을 만나는 것 만큼이나 다르다. 전자가 더 안전하고 편안하지만 실재 모험을 즐기는 나에게는 후자가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여간 술을 잘 못하시는 분들에게 '소맥'을 몇 잔 드린 것이 부담스럽지 않으셨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편안하고 즐겁게 잠들었다... 시냇물 위에 종이배를 띄워 놓고 넘실거리는 좋은 꿈을 꿨다.  

다음날 창문을 열었더니 조금 흐렸다. 마치 눈이 금새라도 올 것 같은 날씨였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날씨다. 출근길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쉰다' 라는 통쾌함같은 것을 느끼고 싶었지만 그날은 국가공휴일이었다... 부드러운 카페 라떼같은 웃음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힘들겠다구? 그렇지 않다. 일상의 소중함은 그것 자체로 중요하다. 여행의 즐거움이  그 자체로 소중한 것 처럼 말이다. 언제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지만, 우리는 그 때 그 때 인생의 가장 정점을 지나고 있다. 모든 순간이 어쩌면 '구름 속에 잠시 고개를 내민 빛'과 같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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