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운동 - 독일, 서유럽, 미국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지음, 정대성 옮김 / 들녘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상상력에게 권력을'

'웃음이 우리의 정치적 깃발이다'

마치 2008년의 '촛불집회' 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말 같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40년이나 묵은 슬로건이다. 

올해는 '68 혁명' 40주년이다. 반짝이는 희망의 촛불을 등불삼아 지난 역사를 읽기에 금상첨화의 해이다. 역사를 대할 때 66으로 불어난 몸매를 잊은채 55사이즈에 억지로 맞추려는 강제 대입 강박증만 경계한다면 말이다. 역사는 반면교사가 될 때 무덤에서 기어나온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난 다음 싸늘하게 등을 돌린 예 여인처럼 '정세'와 '정황'을 읽어야 한다. 나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큰 차원에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미시적인 반복이 동시에 발생한다고도 생각한다. 무슨 대단한 역사관은 아니다. 그냥 살아보니 그런 것 같다는 아주 민중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책 <68운동>(혁명이 아니라..)은 상당히 얇은 분량이다. 또 건조하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결코 흥미진진하게 혁명을 따라가지 않는다. 이 책에는 혁명의 낭만이나 후일담같은 것은 끼일 자리가 없다. 그녀가 68을 바라보는 전체적 시각을 먼저 간단히 설명해야 겠다. 그녀는 68혁명을(내겐 이 말이 더 익숙해서 이렇게 쓰기로 한다.) 68년에 한정된 운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상식적인 말이다.) 68년은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지는 '68혁명'의 정점에 해당하는 해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 저항운동을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전 사회적인 대항구성을 보유한 최후의 저항' 이었다고 본다.  쉽게 말하자면 '68혁명' 만큼 그 이후에 파급이 큰 '기성 체제 도전'을 상정한 운동은 없었다는 것이다. 

홀타이는 68혁명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68혁명은 분명히 실패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은 '문화혁명'으로 존재하는 68의 영향력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68은 영원하다.' 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촛불'의 상상력을 직접 68과 연계시키기도 한다. 나는 이 말도 부분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68혁명이 실패했다고 말한 저자 역시 이 점을 인정한다. 아렌트가 야스퍼스에게 쓴 편지를 재인용하여 이렇게 말이다.

" 우리가 1848년에서 배우듯 다음 세기의 아이들은 1968년에서 배울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68혁명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단지 6-70년대의 락음악과 포크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말고도 말이다. 어쨋거나 레토닉으로 끝없는 승리를 외치는 것은 잠시 중단하자. 그렇게 따진다면 '민중의 역사'가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낭만적 도취로의 회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결코 그 '혁명'의 위대함과 의미에 흠집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언제나 승리할 수 만은 없다는 '겸손함' 정도는 갖고 있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68혁명은 전세계적이었다. '촛불집회'가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의 일부인지 아니면 국내적 운동인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반세계화운동에서 항상 중심적인 것이 '먹을거리'와 관련된다는 점,그리고 이 운동이 '다중'을 중심으로 작동된다는 점등은 시간적으로 68처럼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그 흐름에 포함시킬 수 있을 여지가 충분하다. 이 책에서는 68의 주도세력들을 이념적으로 상징하는 글이 세 권 소개된다.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체 게바라의 <제2.3의 더 많은 베트남을 창출하자> 그리고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이다. 이 책들이 상징하는 것은 68혁명의 '제 3세계 해방구상' '비타협전략' '체제거부를 통한 새로운 인간상 구현' 이라는 주요 주제를 대표한다.  구체제뿐만이 아니라 구이념과도의 결별이다. 사회학에서는 이 흐름을 신좌파라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신좌파도 신-신좌파에게 밀린다. 언젠가는 신-신 좌파도 신-신-신 좌파에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힘써야하겠지만
 

 68혁명과 촛불집회가 가장 큰 변별이 생기는 부분이 있다. 우선 집회의 주체가  다르다. 68이 대학생과 노동자들 중심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봐서 '촛불'이 훨씬 더 '진화' 한 것이다. 대신 이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태도'와 '체제 도전'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다르다. 촛불이 결코 68이 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68에서도 폭력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순수한 비폭력주의' 에 동의하지 않았다. 68은 현실적으로 '폭력'이 강제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하지만 가장 정작 중요한 차이는 '체제 도전' 문제이다. 68이 도전했던 것은 '정권' 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 동안 인류가 이룩해 놓은 모든 기존 체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것이다. 여기에는 구좌파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4.19혁명, 87혁명, 그리고 촛불집회 보다 훨씬 어머 어마하고 거대한 기획이다. 이 점이 이해되지 못한다면 앙꼬 없는 단팥빵으로 68을 이해하는 것이다.

홀스타인은 미국,프랑스,서독,이탈리아의 68혁명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붕괴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려낸다. 한 형제라도 아이들 마다 장단점이 다르듯 비교사적 분석으로 본 68의 성격도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결합된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반베트남 운동'의 불이 좀 처럼 붙지 않는다.68년에 시위대에 쫓겨 도망다닐 운명인 드골이 서국 국가중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68년도에 다른 국가에서 몇 년간에 걸쳐 축적된 운동 성과를 단기간에 추월하면서 68년에 가장 폭발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만 독특하게 노동자들이 총파업으로 학생들의 힘을 실어주었다. 이 책이 조금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은 구체적인 행동이나 사건들을 세세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보다 조직의 운동노선과 이념간의 갈등 등을 중심으로 68이라는 사건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백가쟁명처럼 분출되는 담론과 실천들을 따라가면서 68을 구성하고 있는 전체적인 그림을 객관적으로 잡아가겠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인 듯 보인다. 따라서 흥분하지 않고-하지만 읽다보면 '야..여기서 이렇게 가는거야' 하며 흥분하게 된다.- 정도를 따라 68을 읽어 낼 수 있다. 물론 68이 갖는 후속적인 문화 변화의 내용이나 후 논의등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조금 양에 안찰 수 도 있다.  

68혁명이 붕괴되는 과정과 다른 형태로 전화되어 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들이 많다. (촛불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 집권당은 보수대연합을 조속히 이루어내 공룡여당으로 어리버리한 야당을 동원하여 국회개원을 했다.)

 홀타이의 말을 그래도 인용해보자.

'사회현상은 유동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어렵고 동원국면이 지나면 와해된다.사회운동은 특수한 과제가 있는 조직으로 바뀌거나 기존 정당에 흡수된다.사회운동은 조직으로 가는 문지방을 넘어서지 않으면 복잡하게 얽힌 소집단이나 하부문화적인 생활방식 혹은 특수한 세대의 기억 공동체 속으로 용해된다.그로 인해 일상문화의 다양성은 커지지만 원래의 운동은 정치적으로 중립화된다.'

한윤형인가 하는 인터넷 논객을 자처하는 친구가 모 잡지에 실은 글에서 최장집의 '대의정치부활'을 조금 넓은 의미로 이해하면서 현재 진보 정당의 헛질을 비판한 것을 읽었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적인 혁명을 촛불에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면 '조직'과 '정당'의 역할에 대해 그렇게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68혁명도 개인의 자유를 조직의 자유보다 앞세웠으나 그것을 추동하는 조직들의 연대가 있었다. 한윤형의 표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민주노동당은 촛불 초기에 앞서 나사보려다가 망신당했고,진보신당은 '아고라의 자식'이 되어서 칼러 TV만 들고 쫓아다녔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촛불' 집회에서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활약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C8 도대체 이 말을 몇 번이나 더 '진보'인사들에게 해야되는지..) '조직은 뒤로 가라,당은 필요없다 '는 이론적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 보다는 현실정치의 냉혹함의 메커니즘과 그를 통해 작업할 수 있는 전술이 필요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88만원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이 그랫던가? (기억안난다.) "개인을 억압하는 조직이 필요없다는 것이지 전술이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오늘 아침 나는 웃긴 상상을 했다. 하지만 공포스러운 상상이었다. 만약 이명박이 도박사적 기질을 발휘해서. 정치적 도박을 한다면..(물론 현실적으로 절대 그럴 일은 없다.그러니까 상상이다.)

2MB퇴진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촛불에게 이명박이 국민담화를 통해

" 그래 알겠다. 나도 드럽다. 그렇다면 한 달내에 대통령직 재신임 국민투표를 하겠다.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하겠다 " 라고 했다면 어찌되었을까?

거리의 촛불은 '승리'했다고 환호를 보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을 곧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뻐했을 것이다. '거리의 흥분'된 상황에서는 곧 넘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정말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런데 한 달의 시간을 거쳐 투표를 했다면 100일 조금 넘긴 이명박이 불신임되었을까? .... .... .... 온건한 사람들의 '아무리 그래도 1년도 안되었는데'부터 해서 노인들의 '동정표',등등 ...헌정질서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 등등...하여간 '중도보수표의 대결집'이 이루어졌을 테고, 이명박은 지난 대통령 선거때보다 높은 지지율로 재신임되었을것이다.

아니라고 믿는다면 '찬물'로 샤워하고 다시 생각해봐라.

그 때가 되면 촛불이고 뭐 나발이고 없는 거다. 치명적인 거다. 이명박이 말하겠지 "여러분이 하자는 대로 국민투표까지 했다. 그런데 국민의 다수가 여전히 나를 지지하고 있다. 당신들은 이제 할 말 없다.'

좀 웃기게 썻으니까 끝까지 기조를 유지하면 '진보고 촛불'이고 당분간 박살나는 거다.

1968년에 국외까지 도망갔던 드골이 그랬다. 총선거라는 전술로 말이다.

68혁명을 이야기하다가 왔다 갔다 했다. 내가 첨부터 이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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