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희망을 잃지 않는 패배주의' 글도 나오고, 유물론적 현장의 정치변혁을 미학적,문화적 운동으로 추렴하려는 분위기도 얼핏 나온다. 68혁명이 정치적으로 실패했어도 문화적으로 성공했던 것을 유비하는 듯 하다. 68의 문화혁명적 속성을 촛불에 직접 투사하는 글도 봤다. 수사학적 미학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역사를 그렇게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조금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먼저 촛불의 성격과 68혁명의 성격론 차이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길게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68혁명은 기본적으로 '전세계적,반체제,반문화'성격을 같고 있었다. 또한 그것에 기대어 '하위문화' 를 중심으로 '대항문화'를 형성했다. 촛불이 그럴 여지가 있는지 답을 할 수 있다면 촛불과 68혁명의 동일 DNA구조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의 문화가 '반체제적인가?  반문화적인가? " 나는 '결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모두 체제 내적일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정권퇴진 같은 수사에 대해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운동이다. (현 상태에서 정권퇴진운동은 모험이기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 참여자 내부에서도 '정권퇴진'같은 것에 부담을 갖는 온건한 성격의 참여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저항은 부당한 폭력정권에 대한 저항의 양상을 띠지만 같은 적을 두었다고 그 운동의 성격도 같다는 식의 논리는 정말 아름다운 수사일뿐이다.

연대를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촛불 초기부터 반드시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것이 해결되지 못하고 '연대하자'를 새로운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생뚱맞다. 문제는 연대를 도모할 주체가 없다는 것이고-이것은 촛불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초기부터 '리좀적' 주체들을 극찬했던 담론이 이런 연대에 방해가 된다. 설령 담론의 공간에서 '다중'주체들의 창의성이 진보진영에 새로운 성찰과 아이디어를 준다고 할 지라도 이미 '다중론'의 실천적 한계가 여러차례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 지적된 상황에서 그것을 성찰하지 않고 '다중' 에만 환호하는 것은 지극히 상아탑적이다.

  나는 처음부터 진보언론이 극찬했던 '무중심성'과 '다중운동'의 환호에 대해 약간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촛불의 주체 구성과 운동 양식의 창의성으로 인해 2008년이 '21세기 한국 사회변혁 운동'의 역사에서 'BC 촛불'과 'AD 촛불'로 나뉠 원년이 되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카니발적 흥분으로 인해 이것을 무슨 '사건'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역시나 조심스럽다. 

역사를 이야기했더니 어떤분은 다분히 빈정거리는 투로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씀 좀 해보시죠'라고 대답했다.

나같은 필남필부가 어찌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저 한 번 더 생각하고 움직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끼리 하는 말로 '국화뜨지마 그러다죽는다'라는 말이 있다.영화<황후화>를 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 것이다. 영화에서 황후 공리는 절대 권력자 주윤발에 대항하는 역모를 꾸민다. 반란군의 상징으로 '국화'수를 놓는다. 물론 노란 옷을 입은 어마어마한 반란군은 은색옷을 입은 더 어머어마한 황제군에 의해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몰살 당한다. 그리고 다음날 언제 피바람이 불었냐는 듯 깨끗이 치워진다. '황하에 돌 하나 던져도 물길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중화주의 반동적인 장면이다. 어쨋거나 나와 몇 명은 여전히 '국화'를 뜨며 서로 낄낄거리고 있다. 그 의미를 알듯 말듯 미묘하게 포장하면서 말이다.

영화 <페스트푸드네이션>이 시의적절할 때 등장했다. 2년 전에 나온 영화인데 배급사의 상업적 의도가 현재 정세를 읽었나보다. 이번 주 개봉한다.

 

 

 

..역사에 대해 나는 대답을 못하지만 그래도 나보도 천 만 배쯤은 똑똑할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아...나는 그걸 옮길 정도로...1분에 200타 정도는 칠 수 있다.

68혁명에 대한 그의 69년도 글이다.(홉스봄은 문화혁명으로서의 68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후에 후술했다.)

 68혁명의 세력은 두 단계에 걸쳐 집결되었다. 대략 5월 3일에서 11일 사이의 최초의 단계에서는 학생들이 결집했다....5.14일에서 17일까지의 두번째 단계에서는 자발적인 총파업이 확산되었다. 공식노조 지도부와 정부 사이에 체결된 협상안을 파업 세력이 거부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기를 지나 5월 29일에 이르기 까지 대중운동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번째 단계만이 혁명의 가능성을 창출해 냈다는 점이다.( 홉스봄의 혁명은 요즘 처럼 광의로 해석되는 혁명이 아닌 듯 하다.) 학생운동 자체는 성가시긴 해도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드골주의의 붕괴로 생기게 될 공백을 대신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보수 정권은 마침내 혁명의 공포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의 힘과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기반은 결코 분열되거나 붕괴 되지 않았으며 단지 일시적으로 마비되고 혼란에 빠졌을 뿐이다.

드골주의를 타도할 최선의 방법은 드골주의 스스로 붕괴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드골주의로 하여금 지지세력을 다시 규합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최악의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드골은 힘을 회복했는데.이는 분명 그가 '붉은 혁명'에 맞선 '질서'의 수호자로 국면을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혁명운동의 관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리케이드를 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일상적인 정치 상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때를 인지하여 적절한 행동에 나서는 데 있다.

5월 27일에서 29일 사이의 중대한 고비에서 당은 그저 기다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기다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나 다름없었다. 주도권을 상실하면 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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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7-0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볼만해요..마지막 노골적인 소의 도축장면이 비위를 거슬리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