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집회가 정점은 지난 듯 하다. 이명박이 정신못차리고 악수를 계속 두지 않으면 어제 만큼의 숫자를 조만간에 다시 끌어모으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이명박이 가장 두려워 했던 날도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이명박에 대한 욕은 계속 높아지고 높아져서 이제 태산에 이른다. 일상적인 자리에서나 알라딘에서나 이명박에 분노하고 거품 물지 않으면 비투사적 행위가 된다. 어제 회사에서 어떤 이는 몇 가지 생각나는 점들을 이야기했더니 내가 한 마디하면 열마디의 거품을 물으며 이명박이나 대운하나 다 물리쳐야 한다...국민이 나서야 한다...이 개같은 이명박...그런다.
내가 나중에 그냥 듣고만 있었던 것은 "그 개같은 이야기를 다 아는데..." 왜 게거품을 물면서 광분하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개같은 이야기를 비슷하게 공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가진 개인정치적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동료의식을 만드는 단계는 지나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일단 개같은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린다. 두번째는 나는 그런 개같은 상황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시민이다. 세번째 나의 이명박에 대한 분노는 너무 높아 게거품을 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같은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 앞에서 게거품 물수 있다. 그런데 비슷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그 사실을 아는양 게거품을 무는게 도대체 상대방의 고막에 무리를 주는 것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런 질문을 했다. "대운하때에 과연 이만한 사람들이 모일 것인가? 위대한 시민들이 거기에 공감하고 지금처럼 나와주겠는가? 아니라면...어떡게 해야하는가? 이정도가 모이지 않으면 밀릴게 뻔한데..그럼 지금 어떡게 해야하는가 "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국민들이 이번에 깨우친게 있으니까 아무래도 다르지 않겠어요? "
게거품이 꺼진 자리에 남는 것이 이렇게 허망하다면 도대체 무엇을 더 도모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은 다시 이명박이 개xx라는 것에 분통터뜨린다.
나는 시민들의 이런 분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뒤적인 그람시 책의 한 귀퉁이에는 이런 시민들의 소아적인 형태의 투쟁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다. 그람시 시대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나는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는 날이나 집에서 책을 보는 날에는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컴퓨터가 중환자실에 있어서 아프리카같은 것은 엄두도 못낸다.
시민, 노동자, 다중, 운동, 계급, 역사, 연대, 대중, 당, 조합, 정치...
그런데 온고지신이라고 이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한번쯤은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샬 버먼이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마치 어제 태어난 사람들 처럼 역사와 서 있는 곳을 외면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실없다고 비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