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가 저장되어 있는 감만부두는 어제 하루 긴장상태였다. 민주노총과 화물연대가 경유값인상 문제와 연계하여 미국소 운송거부 투쟁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시위는 시민 중심의 촛불집회와 다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경찰이나 언론이 주목했다.

중공업 노조나 전농 외에 가장 과격한 양상을 띠는 것이 화물연대 운전사 아저씨들이다. 감만부두는 부산사람들도 특별히 갈 일이 없는 그런 후미진 곳에 있다. 컨테이너 박스와 대형 화물차만 있는 곳에 뭐 볼께 있다고 가겠는가? .

이번주에 아무리 봐도 월요일이 그나마 시간이 날 듯 해서..퇴근 후 그 먼 감만부두로 향했다. 일단 시위의 성격이 조금 다를 것 같아서 긴장과 호기심이 널뛰기를 했다. 창 밖을 보니 비가 한 두 방울 내리고 있었다.

감만부두에서는 친절한 교통경찰이 시위대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옛날 부터 바뀌지 않는 원칙인데... 경찰만큼 분업화된 관료주의가 정착된 곳이 없다. 아무리 과격 시위를 해보 절대 교통경찰은 시위대를 건드리지 않는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위대 숫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이런 숫자를 파악하는데 무척 둔하다. 대개 신문쪽  추정과 시위대 쪽 추정은 편차가 크다. 나는 대략 그 중간 선이라고 믿는 습관이 생겼다. 대략 보기에 1천명 안팎인듯 햇다..잘 모르겠다. 대개는 민주노총과 화물연대 조합원들이었다.그러나 시위대 뒤쪽에는 아이들과 나온 아주머니, 스스로 만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푯말을 들고 있는 고등학생, 쇼핑가방을 들고온 젊은 여인 등등이 있었다.

화물연대 아저씨들 옆에 앉아서 구호도 외치고 촛불도 치켜들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고등학생에게 일회용 비옷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이 녀석이 주머니에서 주물럭 주물럭 동전 몇 개를 꺼내고 있는데 그 때 얼른 내 지갑을 열었어야 했다. 쑥스러움에 약간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쳤다. 주머니에 몇 백원 밖에 없어보이던데...

나는 화물연대 아저씨가 던져주는 비옷을 입었다.공짜다..^^

노래패의 공연이 있었는데...^^...노래패 소속의 한 처자가 이런 말을 했다.

'아..저희가 요즘 집회에 많이 가는데...이 곡을 꼭 부르고 싶었지만 단 한번도 부르지 못했습니다.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불러도 괜찮을 듯 하네요. '단결투쟁가' 큰 목소리로 함께 하겠습니다'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나도 힘차게 따라 불렀다.노래를 하다가 비오는 감만부두 하늘에 떠 있는 대형 크레인을 봤다. 조명을 받아서 꽤나 괜찮아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스팥트 위에서 '단결투쟁가'를 불러 본게 얼마만인가 새삼 생각이 들었다. 회사 노조발대식 같은데서야 부르지만 그거야 실내 아니던가?

"아..아 우리의 힘은 힘찬 단결투쟁뿐이다."

집회는 예상과 달리 9시쯤 끝이났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좀 싱거웠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날 집회 시작 전에 정부가 '관보 제본 중지'를 지시했기때문에 민주노총도 철야집회를 촛불문화제로 바꾸었다고 한다.

시위대 중 200-300여명은 가두 행진에 나섰다.감만항에서 출발해서 우암동을 거쳐 유엔공원쪽으로 나아갔다. 중간에 경찰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중간에 집에 전화를 걸어서 조금 있다 들어간다고 이야기하고...또 걷다가 옛날 생각도 좀 하고...이렇게 계속 걸으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대략 1시간쯤 걸었다. 별다른 방해도 없이 또 별다른 공포감도 없이 이 얼마나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에 좋은 웰빙 시위인가?

시위대가 유엔 공원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쯤 드디어 전경들이 길을 막았다. 나는 시위대 중반부 쯤에 있었는데...순간 덜컥...걸음을 멈추었다. 일종의 조건반사다. 그사이 선두 대열이 토끼들이 사냥꾼 다리 사이를 빠져 나가듯 전경 대열 좌우로 마구 빠져나갔다. 전경도 쫓는 쪽에 비중을 두었던 듯 하다.약간의 몸싸움이 있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시위대 선두가 대연역 방향으로 쪼르르 뛰어가자 전경본대도 그들을 따라 또르륵 뛰어갔다. 그러니까 중반부 이후는 그냥 또 설레 설레 걸어서 대연역까지 알아서 걸어갔다. 일단 그렇게 끝이었다. 산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산은 서울보다 시위대의 규모도 집회 양상도 훨씬 얌전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후배'수포'를 떠올렸다.

90년도인가 91년도인가 물대포가 처음 나왔던 걸로 안다. 가투상황이었는데 나는 전경애들에게 뭔가 하나 던지고 돌아섰다.항상 80% 정도의 힘으로 던졌다. 어차피 누구 맞추자고 던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기는 싫었다. 던지고 몸을 돌리는 순간 오른쪽 발목 5CM앞에서 사과탄이 하나 펑 터졌다.사과탄이야 그럴리 없겠지만 당시 경찰이 최루탄 직격사격이 종종있었다. 심각한 부상자들이 나왔다.그런 연상 작용때문이었는데 발목에 허연가루를 보니까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뛰어서 본대로 돌아가는 와중에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렸다.^^  한참 뛰다가 추격 사정권에서 멀어졌다 싶을 때쯤 머리 위로 새찬 물줄기 하나가 지나갔다.

"어..물대포네' 나는 내 머리 위를 지나 본대쪽으로 날아가는 물대포의 궤적을 쫓다가 골목으로 방향을 급회전했다. 물대포의 궤적은 후미쪽 사람들을 향해있었다.그 사이는 물 한 방울 맞지 않았다. 나는 골목에서 물대포가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신기하기도 했고 좀 살았다 싶었는지...

"어...무지개뜨네"  했다.

시위가 끝나고 후배 하나가 물대포에 직격으로 맞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친구 등은 '수포'덩어리였다. 손톱만한 수포가 목 뒤부터 허리 부근 까지 촘촘히 돋아올랐다. 아프다는 후배가 안스럽기도 했지만 다들 처음보는 '수포' 에 시골사람 칼러TV 처음 보는 모양으로 신기해했다. 후배는 일주일 동안 배를 깔고 자야했다. 물대포 맞은 사람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가 좀 더 예민했던 듯 하다.

집에 가다가 '수포' 후배는 요즘 뭐하나 생각을 했고..또 내가 시위에 나오기 위해 집에서 아이와 씨름했을 와이프를 생각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시위참가는 아내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번 주 수요일 서면 집회에는 아내를 대신 내보낼까 싶기도 하다. 아이와 함께 가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오래있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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