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양장)
정성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트로츠키는 지금은 '비운의 트로츠키'로 불리우는 된 깡마른 안경잡이의 이름이다. 인생의 질곡이 남극의 크라바스보다 깊다보니 자기를 자기라 부르지 못하고 저작권도 안주고 깜방간수 이름을 도용했다. 이름도용 당한 오뎃사의 교도관은 어쨋거나 이름 하나는 길게 남기게 되었다. 최소한 자본주의가  여름날 아침 풀입에 대롱대롱 달린 이슬처럼 햇살 아래 한순간 소멸하지 않는한 트로츠키는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윤건차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의 지식인 지도를 보면 이 책의 저자 정성진의 이름이 발견된다. 구좌파의 트로츠키주의자에 그를 포함시켜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내용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주로 알튀세르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가끔 인용될 뿐이고 좌파 사상의 메인스트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윤건차가 정성진과 술 한잔 안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윤건차가 트로츠키주의를 강건너 불보듯 다루고 넘어가는 것은 80년대 이후 한국 좌파 사상 흐름을 나름대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나 한국에서나 또 그 어디서나 소수였을 뿐이다.

정성진식으로 말하자면 80년대까지 스탈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던 PD와 NL의 한국좌파는 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좌충우돌 상황에 들어가 버렸다. 대략 이제 마르크스의 재전유라는 이름으로 신사회 운동이라는 좌파흐름으로 옮겨탄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고전 마르크스의 전통은 지식인 지도에서 흐지부지되고 신좌파와 개량주의가 좌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대략적으로 정성진의 울부짖음을 정리하자면 그런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책의 3부에 해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자원들>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하면 트로츠키주의 입장에서 세계체제론이나 위기종식론,자율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들은 이미 <이론>,<마르크스연구> 등에 게재되었던 글이고 나 역시 이너넷을 통해서 접했다.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화접변 세대인지라 밑줄 못 긋는 한때문에 책을 사들었다. 물론 모니터로 읽다가 눈알이 빨게 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건위생적 차원도 한 몫을 했다.그러므로 안구가 튼튼하거나 밑줄의 강박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이 책을 살 필요가 없다. 약간의 인터넷 파도타기를 한다면 이 책에 씌여진 정성진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니면 한국의 IS그룹인 '다함께' 홈페이지를 이용하던지 말이다.

책은 치즈냄새 폴폴 풍기는 쥐가 쫓는 미로 같다. 미로 곳곳에 마르크스 사상 논쟁사가 있다. 길을 따라가다보면 신좌파들의 마르크스 해석에 대한 비판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트로츠키와 고전적 트로츠키를 발전시킨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까지 이르게 된다. 정성진의 정치적 입장도 이와 같다. 스탈린 치하에서 부관참시 당한 트로츠키를 살려냄과 동시에 제4인터내셔널의 '구 트로츠키'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트로츠키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적통이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에 있기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역사적으로 과거 좌파나 우파가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렀던 스탈린주의는 변종이 주인 행세를 한 것 뿐이다.트로츠키는 "볼세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단지 한 줄기의 피가 아니라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라고 본인 입으로 하늘 아래 양립할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한다.트로츠키주의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의 계보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붕괴' 가 아니라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 ... ' 이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가 '역사의 종말'일 리 없듯이 해방의 가치로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살아난다. 그래서 이 책의 1차 주적은 스탈린 주의이다. 제 5장 <소련 사회의 성격>을 비롯해서 책 곳곳에서 수 십 차례에 걸쳐 '스탈린은 마르크스와 관계가 없다.' '스탈린의 1928년은 반동적 혁명이다' 가 강조된다. 즉 소련이 무너진 것은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인 '스탈린주의'가 붕괴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정치적 악연으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지젝 역시 <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소련 사회가 트라우마적인 트로츠키를 삭제했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소련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동안 내내 그랬다. 고르바초프 역시 트로츠키를 복권시키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스탈린 비판에 올인했지만 정성진은 여기서 소련 사회의 성격 분석에서 트로츠키의 분석을 따르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스탈린 하의 소련사회를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보았다. 1917년 혁명으로 노동자 국가가 되기는 했으나 고립된 상황에서 당의 관료들이 망쳐놓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내에서 트로츠키의 전투 방향은 사회 혁명이라기 보다는 정치혁명이 될 수 밖에 없었다.이 점은 트로츠키의 한계로 지적 되기도 한다. 정성진은 영국 사노당의 중심이라고 할만한 토니클리프의 '세계체제론적인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으로 소련사회 성격을 설명한다. 쉽게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중심으로 봤을 때 세계체제론적인 입장에서 소련은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양식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계승 발전하고 있는 마르크스 일가의 무공은 스탈린주의를 비롯해서  여러 신좌파 이론들과의 논쟁에 무기로 등장한다. 다른 비책없이 '교과서에 충실하고, 기본기가 힘이지요'를 연상시키는 초식이다. 마르크스의 공황론,시장론,가치론,계급론,혁명 주체론,국제주의 등이 중심이된다.특히 트로츠키하면 연상되는 '영구혁명론'은 '일국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의 전통과 관련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레닌에게 '사건'이라고 할 말한 1차세계대전과 '혁명적 패배주의'의 전통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 '영구 혁명론'이다. 이것을 단순히 '국가의 소멸'로 이해하는 것도 트로츠키에 대한 오해이다. 마르크스가 기존의 사회학과 달리 자신의 이론을 '과학'이라고 했듯이 그 가문의 아들 트로츠키도 과학을 이어간다. 영구혁명이 일어나는 장소는 일국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트로츠키는 직시하고 있다.

신좌파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서도 이 책은 트로츠키주의적인 입장에서 '비마르크스 이론이며 개량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스탈린주의에 이어 이 책에서 공격하고 있는 제 2 주적이 자본주의 하에서 진보의 이름으로 거론되는 개량주의 흐름이다. 제 6장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에서는 앰허스트학파의 '반본질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계급의 현실체에 대해서 부정하고 분석의 입구로서만 이용한다는 점도 도마에 오른다.이들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들이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과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까지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또한 마르크스 전통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만한 변혁 주체로서 '노동자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체제론 역시 분석단위의 범위를 넓히고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한 것 까지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행론에서 계급의 역사적 인과관계 설정에 오류를 범함으로서 신고전파 경제학에 가깝와져 버린다고 비판한다.또한 자본주의 순환적인 자본주의 위기론에 있어서도 콘트라티예프 곡선에 의지한 나머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법칙을 외면하고 있다고 본다. <제국>논쟁과 관련되서는 항간의 세계화론을 포스트구조주의 방식으로 재서술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제 2인터내셔널의 황제였던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재판이라고 폄하한다.당연히 모호한 개념인 '다중'은 '노동자 중심성'의 부재로 비판당하고 '제국'의 강조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면죄부로 비판당한다. 트로츠키주의의 경우 자본주의를 끝내는 혁명의 핵심은 로쟈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의 전통에 있다고 본다. 슬라보예 지젝의 <제국>비판을 인용하여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전(pre) 마르크스주의적이며 혁명없는 혁명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하트와 네그리에 대해 정성진은 '급진적인 아나키즘 수사학으로 무장한 개량주의' 라고 칭하고 있다. 물론 각각의 이론들은 비판만큼이나 많은 반비판을 담고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것들을 모였다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 중에 걸러지는 것들이 -내게는-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녹색평론식 생태공동체주의가 그런 과정을 거쳐 내게서 비판적 거리로 재구성된 생각들 중에 하나다. 현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정성진은 책 마지막에 <참여계획경제론>을 들면서 몇 가지 이론들간의 차이를 비교한다.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의 인생 동안 몇 개의 다른 노동 형태를 계획한다거나, 대의제에 대한 비판으로 그리스 민주주식 공무원 제비뽑기 선발 제도 등은...글쎄 더 따라가기 힘들었다. 정성진이 극렬히 싫어할 말이지만 좋은 의미든 나쁜의미든 유토피아적이다. 결국 나의 시선은 마지막 장 보다 그 지난과 현재의 담론 분석에 더 큰 비중을 둘 수 밖에 없었다.. 

 김동춘은 80년대 이후 좌파의 흐름을 '완고파'와 '개량파'로 나누었는데 트로츠키주의는 완고파의 흐름에 속해있다. 한켠에서 보자면 마르크스를 교조화해서 '이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다르다'라는 식으로 비판과 주장의 근거를 '마르크스'에게만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완고한 주장이 시대조류에 어긋하는 훈고학적인 것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나 역시 고전적인 마르크스보다는 포스트쪽에 더 관심이 많은 측면에서 이런 책들은 여러모로 질문과 고민점들을 되짚어보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와 관련되어 '케인즈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는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의 답변이다.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담론은 기본적으로 '나쁜자본주의'와 '좋은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시작된다. 진보적인 사람들 입에서 '그래도 신자유주의보다 낫지 않냐'고 이야기하면 ..더 이상 할 말 없어지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알라딘 진보의 문제가 그것이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보다 못하냐? 그럼 현실적으로 그거면 됐지.' 이런 식 말이다. 근본적인 질문에 왜 우파 초딩같은 댓글 밖에 못할까가 문제 제기인거다. 우파보고 초딩같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다. (2MB가 바보짓 하니까 갑자기 노무현이 성군이 된다. 물론 한끗 차이로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낫다. 그런데 문제를 이런식으로 설정하는 것은 초딩 짓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역시 노무현이 낫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뇌세포에 박수를....물론 2MB보다는 낫다. 이 말이 그렇게 듣도 싶다면 천 번 쯤은 더 해줄 수 있다.) 이 책은 다분히 경제 이론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들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권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11장 케인즈주의인가,21세기 사회주의인가? >는 인터넷으로라도 읽어 보길 바라는 부분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방파제가 된 듯 한 장하준 교수의 제도주의 학파도 크게 보면 케인즈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정성진은 케인즈주의가 '나쁜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로 대체하자는 제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착취 자체를 거부한다고 비판한다.그런데 왜 케인즈주의가 다시 진보의 이름으로 등장할까? 정성진은 기본적으로 케인즈주의의 자본주의 친화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짜 사회주의의 종말과 함께 '대안'이 없다는 광범위한 믿음이 '자본주의 수정,개량론'을 진보 진영의 과제로 상승 시킨 역사적 실망의 결과라고 본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성진은 제2 인터내션널의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등의 수정주의 노선을 비마르크스적이라고 공박한다. 이미 정성진과 장하준은 몇 차례 논쟁도 했다.(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작금의 야만적 자본주의보다 케인즈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낫다...하지만 그러니까 그게 뭐가 왜 나빠요?... 라고만 이야기하지는 말자.) 정성진은 케인즈주의의 이론적 한계가 신자유주의를 몰고 왔으며 케인즈주의의 역사적 조건들이 재현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르체디의 말을 인용하여 진보 진영의 선택을 묻고 있다. "마르크스인가,아니면 케인스인가?"  로쟈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인가,야만인가?' 를 물었던 것의 업그레이드된 반복같으나 사실 전자가 더 많은 선택의 고민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비판적 지지'나 '개량주의'만큼 잠시나마 사람 심사 복잡하게 하는 것이 또 없기 때문이다. 

정작 마르크스의 적자 트로츠키에 관한 책인데 트로츠키 이야기는 별로 하지 못했다.국제사회주의경향의 주된 흐름을 읽어내면 그 안에 트로츠키 사상이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된다.국내에서는 <다함께>가 바로 IS그룹니다. 가끔 그 완고성때문에 좌파 내에서 비판이 되기도 하고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영국 사회주의 노동당의 2006년 where we are stand 내용이다. 자본주의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사회주의,국제주의,인종주의,제국주의 및 억압에 대한 반대,혁명정당......과거 강령에 비해 의회주의와 개량주의 비판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한다. (1992년에는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행동,개량이 아닌 혁명,의회적 길은 없다...등이 있었다) '완고파'도 시대의 정세를 정확히 읽어 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뛰어났던 점 아니었던가? 

 .....미친 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가 아니다.그 안에는 여고생도 있고,민주당 당원도 있고, 진보 신당 당원도 있다. 생태주의자도 있고 트로츠키주의자도 있고 자율주의자도 있다.행동은 같이 할 수 있지만 함께 줄 설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명확하다...나는 내가 무슨 주의자인지 몰라서 '범좌파'라고 두리뭉실 이야기한다. 그런데 '무슨 주의자가 뭐가 중요하냐? '고 묻는 '결과주의',','반지성주의' 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다. 이론은 세계관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역사가 그렇게 알려 준다. 하루 하루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무얼 위해 가는지 알고 하루 하루 가는 것이 더 낫다. (하도 쓸모 없는 오해가 많아서 이런 사족까지  단다. 앉아서 책상 물림하는 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과 행동의 상호침투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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