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는 LED 옥외광고 간판처럼 이름을 수시로 갈아입는다.이 책의 원제목은 'Ironweed' 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는 '억새인간' 이었다고 한다. 20여년전 일이다.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잭니콜슨 주연의 영화<ironweed>의 한글제목은 '엉겅퀴 꽃'이다.장영희 교수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라고 예감있는 제목을 달았다. '억새인간' 이나 '억새풀' 보다는 나은 제목같다. 원제목인 <ironweed> 자체가 외설적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좀 숨기는게 있어야지 에로틱이 될 터인데 '노숙자=억새풀' 이란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상징작용이 왠지 탐탁치 않다.

원문과 비교해서 읽는 수준은 못되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뭐라고 할 만한 위치는 아니다.그러나 장영희 교수의 번역이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것은 사실이다. 윌리엄 케네디의 문장이 갖고 있는 위트와 유머러스함을 표현해 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진다. 인문사회 서적이 아닌 문학 책의 번역에 있어서도 가끔은 한국어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을 경험한다. 그런 마당에 작가가 가진 문장의 깊은 속내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때가 많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을 준다.  

이제 조금 삐닥하게 나가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왜 '퓰리처상'을 받았고 또 '20세기 영문학 100선'에 들었는지 의문이다. 식견 높은 분들의 견해이기 때문에 수상을 취소하라고 일인 시위를 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 일이니까 공소시효도 지났다. 이 소설은 내게 그저 그랬다. 잭 니콜슨의 얼굴만 잔뜩 떠오른다.나는 영화를 보진 못했다.그렇지만 스틸 사진 몇 컷으로도 잭 니콜슨이 주인공 프랜시스를 덮어 버린다. 꽤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음에 틀림없다.  영상 이미지의 전제성이 문자를 장악해버리는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책의 문장들이 갖고 있는 뛰어난 유머와 삶을 통과하는 서걱거리는 재미들이 헐리우드식 결말로 가기 위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질 때이다. 이 책의 인물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그리고 장치들은 전형적인 헐리웃표다.'돌아온 탕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기다." 

이 책이 퓰리처상을 받은 해인 84년은 레이건의 시대이다. 카우보이 정부 밑에서 '레이거노믹스'와 '강한 미국' 이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70년대 미국을 교란시킨 유약한 진보의 시대가 문을 내리고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건강한 미국의 상징인 '가족주의'로의 복귀였다. 모든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근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그런 흐름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죄책감으로 떠돌던 주인공이 결국 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불안한 행복을 얻는 결론은 그런 상관관계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이런 스토리야 말로 소시민의 감수성을 젖게하는 전형적인 '잔잔한'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메뉴 아니던가? 싸가지 없는 부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던가, 재능은 있지만 사고뭉치 운동선수가 동료애를 통해 하나로 된다거나.....이 모든 것들이 '통과의례'의 형태만 달리했지 상징적인 '가족'의 이름으로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그게 뭐 딱히 나쁘냐고?  길게 토론하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그렇지만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말하자.나는 이런 스타일에 지루함을 느끼는 취향을 가졌다.

도대체 처음과 마지막에 바람처럼 왔다가 들꽃처럼 사라진 루디는 왜 그렇게 억지로 나와야 되는지? 그의 우발적인 죽음에 '그는 은하수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었다'라는 키치적인 답변은 무슨 코미디인가? 프랜시스의 귀가를 위해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소품처럼 루디와 헬렌은 죽는다. 모텔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헬렌이 가진 영혼의 고귀성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장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녀가 떠돌이가 되기 훨씬 전,사랑에 배신 받기 훨씬 전,그녀의 마음을 영혼을 휘감았던 곡. 작가는 이 곡을 통해 너덜너덜한 부랑아 헬렌의 삶에 빛이 있었고 그 빛을 안고 가게끔 만든다.(왜? 그래야 우리가 덜 불편하니까..) 죽음의 순간에 헬렌은 부랑아에서 성녀로 뒤바뀐다. 베토벤LP와 가지런히 펼쳐진 머리칼 등은 헬렌을 고귀한 영혼으로 만든다.가련을 넘어 숭고로 넘어가려는 의도가 너무 직접적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사회적 관점에서 노숙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는 않는다. 실제 그들은 5미터 밖에서도 냄새가 난다. 물론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탈취 되었다. 탈취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탈취됨'으로 우리가 그들이 가진 영혼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탈취됨'으로 인해 노숙자로서 그들의 존재는 무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재 이 인물들에게 냄새가 난다면 이것은 르포타쥬가 될 터이지 소설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불만을 갖지는 않으련다. 탈취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영혼과 접촉했다면 이 아니 좋을쏘냐....다른게  '키치'가 아니다.

내게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인상적인 것은 '야구'와 '죄책감'이다. 프랜시스의 과거를 구성하는 두가지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새로 사서 얼마 쓰지 않았던 야구 글러브가 다시 만저 보고 싶어졌다. 아직 집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그 글러브로 공을 받고 던지고 해보고 싶어졌다. 다른 하나는 '죄책감'이다. 나는 원래 이 리뷰를 쓸 때 '리뷰' 대신 그 '죄책감'에 대해 쓰려고 했다.

 만약 비오는 어제 이 리뷰를 썻다면 나는 식모 '정금'이와 관련된 나의 '죄책감'에 대해 썻을 것이다. 책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는 몇 줄로 압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의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리뷰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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