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은 '아프간 선교단체 피랍' 사건이었다.9.11 테러 주범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한 미국의 부시정권은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겨냥하여 폭격을 감행했다.탈레반은 쫓겨 났고 미국의 폭격을 감싼 '인권외교'는 빛을 발휘했다.그 틈새 시장을 그냥 봐 넘길 '한국 기독교'가 아니다.어쨋거나 아프간 피랍 사건은 세상의 한 구석으로 잊혀질뻔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다.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종류의 삶을 그리고 있다.그 중심에는 '여성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두 아프간 여성이 있다.소설은 비참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마리암의 역사로 부터 시작해서 자존감 있는 라일라의 역사로 넘어온다.그리고 이 둘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역사와 남성의 폭력 하에 놓이게 된다.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이 두 여인은 결국 새로운 생명과 인간의 자긍심이라는 가치 아래 만날 수 있게 된다.

소설<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놓치 않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소설의 결말에 이르기 까지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은 참담하다.역사의 폭력에 시달려야하고 가정 내의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한다.저항은 언제나 더 큰 무력으로 잠재워질 뿐이다.이 책은 나보다 아내가 먼저 읽었다.그녀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기 때문이다.지난 해 말 이 책을 읽던 아내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눈물지으며 책을 봤다.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서 여성이 당해야 했던 슬픔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공감'이었을 것이다.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역사의 가해자들(침략자거나 남성이거나 종교이거나 거대담론..)로 부터 수탈당하고 학대받는 여성들에 대한 '페미니즘'소설로 읽힐 만도 하다.특히 이 책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두 주인공의 역사가 우리 역사에 있어서 피해자로서  '여성잔혹사'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기억때문 일 것이다.거기에 '어머니'라는 보편적 가치가 소설의 장치로 등장한다. 적대적 관계 상황에 놓인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를 하나로 만들고 연대감을 심어주는 것은 '모성'이다.라일라가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도 또한 마리암이 숙연하게 만드는 희생을 한 것도 모두 '모성'의 위대함이다.인류의 유전자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모성'이라는 '위대함'은 공간적 차이와 역사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또한 이 책은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이 씌여졌다.영화적이란 것은 좋게 말하자면 장면 장면의 스피드가 빠르다는 것이다.한 장 한 장 마다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가능성의 단초가 보인다.그리고 극적인 전환도 빠르게 이루어진다.헐리우드식 영화 기법에 익숙한 독자들의 구미를 맞출만한 구성의 스피디함이다.그렇기때문에 꽤 두꺼운 분량임에도 빨리 읽힌다.평이한 문체와 알기 쉬운 스토리도 물론 한 몫한다.구성은 빠르기도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다.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몇 장씩 씌지도 않는다.또한 과거 현재를 넘나들면서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다.주인공의 시점을 수시로 바꾸어서 앞장을 넘겨보게 하지도 않는다.그저 두 개의 선분이 한 점에서 만나고 하나로 수렴된다.마치 다큐멘터리의 구성을 보듯이 그렇게 직선적이고 연대기 순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문득 이 작품의 영화 대본작업을 할 때-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그다지 어려운 각본 수정 작업 가능하리라 생각이 들었다.얼핏 생각하면 마치 영화 제작을 상정해 두고 소설을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적'이다.결말 역시 '해피엔딩'으로 마감하여 대다수의 독자에게 만족감을 준다.(비극적이거나 무한히 열려있는 결말은 얼마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가!!)

'영화적'이란 것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이 작품은 헐리우드에서 무척 좋아할만한 소재이다.헐리우드는 스펙터클한 오락물.폭력물만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다.헐리우드는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그릇에 담아낼 줄 안다.그런 면에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헐리우드산 휴머니즘 영화의 소재로 그럴싸하다.물론 이 책도 그렇지만 '인권'이란 부분에 강한 스폿라이트를 줄 것이고 '휴머니즘'과 '위대한 희생'에 촛점을 맟줄 것이다.이 '헐리우드식 프로세스'에 빠져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은 결국 독자가 읽어내야 하는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은 미국 하원의원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막기 위해 아프간 정부와 무장단체들에 무기를 지원하는 내용이다.인권탄압과 문명파괴의 대명사,종교근본주의자 탈레반 역시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지속되었던 시절이 있었다.소설은 다분히 '인권'이란 보편적 주제로 세계에 호소한다.그리고 소설에서 '미국'의 역할은 거의 끝부분에만 등장한다.약간의 우려 셖인 목소리로 말이다.궁극적으로는 탈레반이라는 '큰 악'을 쫓아내고 평화를 이끌어낸 '차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있다.미국에서 이 소설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나타난 '정치적 죄의식'에 대한 눈가림이거나 (또는 무지이거나 ) 미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인권에 대한 의식이 타국민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좋은 소설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삐딱하게 읽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아프간 여성 억압사'에 같이 아파하고 가해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면 족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그런 면에서 나도 아프고 공감하고 분노하고 울먹였다.)그저 그 가해자들의 목록에서 '미국'도 빠질 수 없다는 정도 까지만 이야기하자.

마지막으로 나는 일본에서 만든 한 다큐멘터리를 말하고 싶다.그전에 영화 <천상의 소녀>(영어제목 오사마)를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겠지만.이 영화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던 영화다.칸느와 골든글러브에서도 상을 받았다.탈레반 이후 아프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영화였다. 나는 영화<천상의 소녀>를 보지 못했다.대신 몇 년전 일본 출장길에서 나는 그 영화 제작 과정을 가지고 만든 NHK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영화 제작에 일본NHK가 펀딩했기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세디그 바디막 감독의 시선에서 시작한다.촬영 종료 후 다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어떻게 주인공을 선정하게 되었는지" "아프간의 어떤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등등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마리나를 선정하게 된 장면은 인상적이었다.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얼굴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전쟁 고아들과 빈민굴을 뒤지면서 수 천명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만났다.그러던 중 주인공이 될 마리나를 본 것이다.감독은 바로 '이 아이다'라고 계시를 받듯이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이 주인공은 전문배우가 아니었다. 아픈 아빠와 엄마를 대신해서 일주일째 밥을 굶으며 거리를 뒤지고 다니던 아이였다.감독은 그 아이에게서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 뒤편에 이런 비참함 상황에 어쩔줄 몰라하는 '자긍심'을 담고 있는 눈을 보았다고 했다.다큐멘터리에서 본 그녀는 정말 그랬다.

다큐멘터리는 영화 촬영 장면 중간 중간 길거리 캐스팅된 거지 아이들이 엑스트라비를 받기위해 몰려드는 것부터 영화와 현실의 아프간의 모습을 동시에 비춰주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었다.영화 촬영은 끝났다.아이는 몇 주간의 배우로서의 역할을 접어야했다.그녀는 약속했던 돈 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두 손에 쥐어들었다.성인 남자가 6개월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그녀는 인터뷰에서 '영화 찍는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으로서 대접받았다.'라고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어른스럽고 속깊어 보이던 아이가 울기시작했다.감독과 다른 스탭들도 모두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 영화가 그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다.(이 다큐멘터리도 세계적인  TV프로그램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이 끝나고 6개월이 흐른 시점에  제작팀은 다시 마리나를  찾는다.마리나는 어떻게 되었던 학교를 다니려고 한다고 말한다.짧은 만남이후 다시 마리나는 무너진 담과 벽돌들 사이로 사라진다.카메라는 그 장면을 무려 3분 가까이 롱테이크로 보여준다.아이는 가면서 두 서너번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다.카메라는 그녀가 회색빛 잔해들 사이에서 작은점이 될 때까지 계속 OFF버튼을 누르지 않는다.제작진은 그 때 마리나가 울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찍고.. 다큐멘터리를 찍고..그리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직장에 나오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 농담을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그리고 언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했었는지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삶은 계속됩니다.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그렇게 날것 그대로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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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08-02-11 07:59   좋아요 0 | URL
예전에 '현대 세계와 글로벌 시각'이라는 교양 과목을 들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의 우리도 세계의 분쟁과 빈곤 문제를 다루면서 다른 학생들과 교수님이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와 사례들을 다루었었죠. 더 많은 공감이 더 높은 학점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꽤나 많은 시간과 토의를 거쳐 발표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수업의 듣는 학생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면서 까지 저희의 발표 내용을 역설하였지만 그 발표 후 세계의 빈곤과 분쟁 문제는 오히려 수능 치고 난 후의 참고서 마냥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습니다.

불현듯 이것을 학점에 종속되게 만든 학교 시스템과 사회적 문제로 쉽사리 치환하며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던 날들이 자기기만으로 느껴지네요. 물론 팀전님의 글이 그러한 치졸함을 반성하게 된 계기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좋은 자극제가 된 것 같네요. 사회 문제에 관심을 많이 두면서도 그 문제가 불러일으킨 감정적 미안함이나 심리적인 고통은 다 타인의 탓인냥 치부했던 일련의 행각들이 농도 옅은 햇살 아래에서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라는 약간은 진부한 드라마 대사에 사랑 대신 다른 어떤 말을 집어 넣으면 너무나도 가슴 절절한 행동 서약서가 될 법도 합니다. 장하준 교수가 지승호씨와 인터뷰한 책에서 언급한 '선한일과 악한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편한일과 그렇지 않을 일이 있을 뿐이다' 라는 말도 생각나네요.^^

드팀전 2008-02-12 10:40   좋아요 0 | URL
^^ 무자년이지요.새해 복많이 받으시고...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