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의 아이들 - 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
제레미 시브룩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저 아이의 이름은 '루빠' 이다.내가 이 아이를 본 것은 지하철에서다.옆에 앉은 사람의 신문을 훔쳐보다  아이와 시선이 마주 쳤다.내 돈 주고 사보지 않는 '조선일보' 였다.신문에서는 이 아이를 '돌깨는 아이 루빠'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에서는 몇 달 전에 our asia 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아시아 아동 노동의 현장을 촬영하고 이를 지역 민방과 기타 다른 매체를 통해 방송한 것이다.방송학계에서는 신문기업의 방송 진출의도가 드러난 시도로 보았다.나는 이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보지는 못했다.신문과 방송을 통해 이 시리즈가 나가고 국내에 후원금이 꽤 모였다고 한다.내가 지하철에서 본 신문의 기사는 캠페인 이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난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후일담 기사였다.

나는 부랴 부랴 동영상을 검색해서 보았다.('돌깨는 아이 루빠'로 검색하면 만날 수 있다.이외에도 성매매하는 아이,길에서 꽃을 파는 아이등 많다.) '루빠'는 8살이고 네팔에 산다.네살 때부터 돌을 깻다고 한다.마을사람들은 강가에 천막을 치고 모여 살면서 모두 돌을 깨어 먹고 산다.돌을 깨는 작업은 매우 위험하다.아이들 중에는 망치에 손을 찧어 손가락이 마비된 아이도 있다.또 깨진 돌이 튀어 실명하기도 한다.하루 10시간씩 돌을 깨면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번다.이 마을에 아이들은 4살쯤 되면 강가에 앉아서 돌을 깬다.루빠 역시 그랬다.이 다큐멘터리에 보면 2살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가 돌망치를 들고 돌을 깨면서 논다.태어나면서 본 그 일을 앞으로 그 아이도 평생할 것이다.마을은 온통 돌가루 먼지로 회색이다.아이들은 거기서 일한다.루빠에게는 양팔이 없는 동생이 있다.이 아이는 돌을 깨지 못하니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새처럼 앉아서 미안함을 달랜다.다큐멘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무의미한 이 작업에 운명을 걸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옥에 빗댄다.8살 짜리 루빠가 그런 말을 한다.

"글도 모르고 가난하니까 돌을 깨야해요 이게 내 운명이에요"

8살 짜리 아이 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니...

다큐멘터리는 유엔아동권리 조약을 수시로 비춘다.즉 아이들의 노동을 금지한다는 규약이다.프로그램은 네팔 정부가 이 조약을 지키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끝을 맺는다.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까?

제레미 시브룩의 <다른 세상의 아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만약 당신이 따뜻한 마음과 동정심으로 충만하여 '아동 노동'을 없애는 것이 '선'의 실천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그리고 또 그런 '정언명령'을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면. 이 책 <다른 세상의 아이들>을 읽어보아야 한다.제레미 시브룩은 19세기 산업태동기의 영국과 20세기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교차편집하여 비교한다.19세기 당시 생활상을 묘사한 글들과 오늘날 남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놀라울 만큼 유사성이 있다.

저자는 산업 혁명기 전부터 빈민 아동들의 노동이 이용되었다고 말한다.그리고 산업혁명기에 와서 아동 노동은 노예 노동을 대체하여 높은 수익성을 올리는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말썽많고 통제하기 힘든 노예 대신 순응적인 아동들이 그자리를 대신한 것이다.그리고 그 때 부터 이미 아동 노동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다고 말한다.즉 '아동 노동폐지론'과 '아동 노동보호론'이다.제레미 시브룩은 '아동 노동폐지론'이 지극히 서구적 아동관에 바탕을 둔 가치라고 말한다.우리가 상식적으로 믿는 '아동'은 서구 근대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아날학파의 대가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이 입증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결국 서구 모델은 '노동 없는 유년기'라는 근대적 관념을 창조한다.그련데 대부분 방글라데시 같은 빈국에서 아동 노동이 금지되면 어떻게 될까? 불행히도 이는 한 가족의 '생존권'을 뺏는 결과를 낳는다.온 가족이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마당에 아이들의 일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킬 수 없다는 점을 상식적인 휴머니즘이 잊고 있다는 것이다.미국 의회에서 아동 노동에 의존한 의류사업을 금지하기 위해 실시한 '하킨 법안'은 아동 노동 금지가 아무리 욕구는 강할지라도 그렇게 무턱대고 실시할 수 없는-훨씬 섬세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하킨법안'이 강제되면서 빈국에서는 일종의 '풍선효과'가 발생했다.아이들은 의료공장에서 쫓겨나서 더 열악한 공장으로 향하거나 거리로 흘러들어갔다.아이들이 더 비밀스럽고 열악한 곳에 더 대항력없이 스며들게됨에 따라 아동 노동을 금지하겠다는 법안의 취지는 무색해지고 말았다.

제레미 시브룩은 아동 노동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역사적인 가난,빈곤한 교육체계,세계화,그리고 소비주의를 꼽고 있다.서구는 이런 문제를 제공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외면하고 서구적 가족 규범을 유엔의 이름으로 강제하고 있다.저자는 많은 서구국가들 역시 전통 사회에서는 가족 경제 내에서 아동 노동을 일정 정도 인정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집단망각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아동들의 도덕적 십자군인양 행사하고 있는 것 뿐이다.우리 나라의 50-60년대만 생각해봐도 이는 분명하다.우리 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꼴베고 소 풀먹이는 등 가족 경제에 노동력을 제공했었다.저자는 서구의 양심이 실제로 핵심에서 종종 멀어지며 수혜자들에게 미칠 결과에 대해서도 잘 고려하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이런 논의가 이어지다보면 결국 '답은 성장이다'로 귀결되곤 한다.일정 정도의 성장 없이는 분명히 아동 노동 문제 해결에 답이 없어 보이긴 한다.그렇지만 이런 성장론자들은 주로 서구 성장 모델을 금과옥조로 삼고 그걸 따라하면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그렇다면 서구의 빈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절대 빈곤은 많이 벗어났지만 불행히도 서구와 그를 열심히 따라하는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많은 빈곤층이 존재한다.요즘 밥못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었어라고 한다면 인터넷에 우리나라 결식아동 숫자를 검색해보면 된다.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성장에 따른 분배이다.저자는 서구 성장의 역사가 정복과 통제의 역사였음을 잊지말라고 말한다.이런 류의 주장은 가난한 나라에게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는 식민경제 모델을 따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오히려 현재 불고 있는 세계화는 국가의 위치를 축소하고 빈부격차를 벌여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수 밖에 없는 가난한 빈민들에게 더 큰 짐만 안기는 서구와 빈국내 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발전방향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사람들은 '교육'의 부재에 대해서도 말한다.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고 좀 더 나은 작업장에서 일할 것이라고 말이다.맞는 말이다.그런데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받은 일부는 여전히 실업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실제 써먹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저자는 가난한 나라에서 아동 노동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하지는 않는다.그 안에는 사회적응을 위한 교육기능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기도 한다.아동 노동의 문제는 단순히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현재적 문제이다.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에서 많은 부분을 돌아볼 수 있어야한다.

제레미 시브룩은 아동노동 폐지론과 문화적 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옹호론 사이에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이 균형점에 대해 딱부러진 도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동노동 옹호론이나 점진주의적 폐지론 (유해 환경하의 고된 노동에서의 해방)등이 아동노동 악용론자들에게 이용될 가능성도 다분하다.그렇지만 서구화된 우리의 시각에 아동 노동에 대한 조금더 균형잡힌 시각을 주는데 이 책은 도움이될 듯 하다.

또한 우리의 따뜻하지만 낭만적인 양심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조선일보가 기획한 our asia는 좋은 프로젝트였지만 결국 그런 상식의 지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리고 이런 점도 생각해 볼 만하다.조선일보가 줄기차게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거의 승리주의 전도사이다.그런 철학은 전 세계 아동노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과는 상반된다.대신 조선일보는 our asia를 통해서 개인의 낭만적 인도주의로 문제를 치환시켜 버렸다.우리는 더 많은 돈을 내거나 더 슬픈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우리는 이를 통해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갖기도 한다.사실 이런 작업들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하지만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섬세함을 읽지 못한다면 결국 그 일은 자기만족을 위한 '비아그라'일 뿐이지 않을까?

제레미 시브룩은 그들을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라고 칭했다.하지만 제목이 잘못되었다.그들은 우리 세상의 아이들이다.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작은 기부가 그 첫 걸음일 수 있다.하지만 거기서 생각을 멈추지는 말자.그 순간부터 그 작은 기부는 우리의 위선이 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 2007-12-07 21:5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는 조선일보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이비 꼴통짓도 물론 계속 하고는 있지만, 요즘의 조선일보 국제뉴스는 과거보다는 확연하게 업그레이드 되었답니다. 차원이 좀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꼴통이라기보다는 '온정적 보수주의'에 많이 다가섰다고나 할까요. 저는, '구조적 모순'을 짚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푼두푼 돕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튼 드팀전님의 리뷰는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에도 동의하고요. 실은 이 책 지금 제 책상 위에 있거든요. 세미나 하려고 사놓았는데.. 지적하신 부분들 잘 생각해가며 읽고, 친구들과 토론해보겠습니다. :)

드팀전 2007-12-08 11:24   좋아요 0 | URL
글쎄요...이것 저것 많이 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그런 부분들이 하나 하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예전에 나왔던 조선의 북섹션은 무척 좋아라하기도 했습니다.그 작은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그 물들이 흘러서 무엇과 누구를 위한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 바다로 흘러가는지 흐름을 보면된다고 생각합니다...저자가 한푼 두푼 돕는것을 의미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가끔 이런 글들은 그런 식으로 제단되는 것이 석연치 않습니다.또한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말하지도 못합니다.저자가 진짜 이야기하고픈 바는 한푼 두푼의 '인간적감정'으로 보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자는거겠지요....개개인의 인간으로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게 구조라는 것 아니겠습니까..저는 거기에 자칫 그런 활동들이 '양심적 인간임을 보여주는 따뜻한 위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더하고 싶구요.기부를 하더라도 겸손하게 해야지요.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섬세'하게 말이지요.제레미 시브룩이 '기부'에 대해 말했다면 '섬세한 기부'를 하라고 했들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