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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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인부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다.수명이 다한 나뭇가지를 드럼통에 담아 놓고 차가운 입김을 데운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붉은 가을이었다.그러나 오늘 아침은 동장군의 척후병에게 일격을 당했다.TV 속에서 사람들이 종종 걸음을 치며 출근길을 서두른다.까치들 같다.삶을 위한 종종걸음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숭고하기도 하다.누군가 그랬다.비오는 날 우산 속으로 숨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 뭐 별거 있다 싶어 가여워진다고..차가운 날씨에 코트 속으로 자라처럼 목을 움추린 어느 집 가장의 출근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젊은 날에는 더 그랬다.내가 무언가 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지금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단다.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인지 내 삶을 돌아볼 나이가 되서 그런 것인지 요즘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아무리 피해가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물론 자잘한 것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다지만 큰 그림까지는 손 대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삶과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그리고 나 역시 '운명' 이란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운명'에 대해서 아마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택할 것이다.단지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젊은 지금의 내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한 숟가락 더 힘을 싣고 있다는 정도 일 것이다.그렇다고 내가 무슨 '숙명론자'이거나 하지는 않는다.'숙명론'이란 것이 결국은 세계에 대한 패배의식으로 작용하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아적인 환상일 뿐이다.중요한 것은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이 했던 것럼 '운명에 대한 태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우리들의 운명은 행복한 길도 놓아 줄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언제나 '슬픔에 대한 운명'이다.정호승 시인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라고 노래한 것은 시인과 우리의 삶이 '슬픔의 도상'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한다는 자기성찰이다.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부족'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철학자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이 이야기하는 '존재론적 슬픔'과 대비하여 그런 슬픔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그림자'라고 말한다.만약 그것이 슬픔의 정체라면 그런 슬픔을 문학의 이름으로 퍼뜨리는 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인지 개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를 제대로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물론 줄거리 자체를 이야기하라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이 책을 보지 않고도 이미 줄거리들은 전부 알려져 있다.또 운문형태가 아닌 소설 형식으로 이 이야기들은 많이 보급되어 있다.아동판,청소년판 등등 해서 어린 아이들도 이 책을 읽는다.요즘은 그리스 신화의 인기때문에 아마 만화판도 나와 있지 않을까 싶다.결국 이 진부하지만 위대한 텍스트에서 무엇을 공감하고 끌어 낼 수 있는가 이 책 읽기의 요체이다.그 작업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피아노 음악 이야기를 잠깐 하면 좋을 듯 하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무척 아름답다.체르니 상급반 정도되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칠 수 있다.음표도 많지 않고 엄청난 기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동네 피아노 학원 담너머로도 들을 수 있는 곡이다.그런데 실제 연주가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모차르트야말로 연주하기 힘들다고 말한다.쉽지만 그것은 천상의 소리를 닮아 있기때문이다.어느 유명한 음악가가 말했다는 '질주하는 슬픔'을 잡아낸다는 것이 보통의 내공가지고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말년이 되어 모차르트에 돌아가는 것은- 물론 그들의 늙은 몸이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낭만파 음악에 적당하지 않기도 하겠으나-그런 이유가 있기때문이다.그리스 비극을 읽는다는것은 모차르트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모차르트의 느린 악장같다.땅이 꺼지는 슬픔이지만 무너질 수 도 없는 그런 운명이 있다.

나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을 읽고 계속 마음이 먹먹하다.비극의 주인공들이 겪은 슬픔은 다른형태로 변주되어 우리들의 삶에도 눈물을 뿌리고 있다.자신의 완고함으로 자식을 읽은 크레온의 아픔은 유괴되어 살해당한 아들의 영결식장에서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너희들이..."라고 마지막 헤어짐을 허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절규와 닮아 있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는 오이디푸스의 슬픔은 어떠한가.'눈물없이 볼 수 없는'이라는 통속적인 표현이 왜 통속적일 수 밖에 없는지 확인시켜주는 운명의 짖궂음 아닌가.

물론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단지 운명과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에 대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이들의 비극에는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사이의 갈등,또 논쟁을 뜻하는 비극의 안틸로기아적인 주제들이 등장한다.그리스 비극의 사회적 의미와 질문들은 사실 지금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다.안티고네의 결정에 대해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베트남에서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약탈,방화,강간 등등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섬멸작전을 수행했다.대개는 명령에 의한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변명을 댓다.그러나 같은 공간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명령이라도 인간의 존중을 파괴하는 명령은 거부할 수 있다는 저항권의 개념을 알고 잇었던 사람들이다.아니 그건 이후에 알았다 하더라도 인간성이 우선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이다.물론 그들의 목소리는 작고 또 잊혀졌다.

크레온의 결정은 국가의 명령이고 안티고네의 저항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양심의 소리이다.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양심의 소리륻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조직과 다수의 명령보다 당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그리스 비극은 묻고 있다.아주 많은 것들을...가슴은 여전히 먹먹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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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1-19 16:57   좋아요 0 | URL
비극은 너무 슬퍼요. 바보같은 소리 같지만, 비극 앞에 '운명'이란 말이 붙으면 정말 너무 슬프고 화나지 않나요.
그래도 안티고네의 목소리 같은 것이 있으니 희망이 있다...라고 할수 있을까요?

드팀전 2007-11-19 18:21   좋아요 0 | URL
슬퍼도 어쩔 것입니까..오는 것은 오게 마련이던데.인간이 할 수 있는것이 슬픔에 대한 자세밖에 없을때도 있지 않습니까..그게 비극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