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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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상봉의 '정치적 올바름'이 좋다.그의 '정치적 올바름'은 책 서문에 띄우는 인삿말부터 확인할 수 있다.'사랑하는 소녀에게 바치는 감사의 편지'에서 이 책의 심연을 흐르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적 부채감'을 고백한다.

나 어릴 때 남들처럼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꿈이던 소녀가 있었다.내가 학교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때 그 소녀는 전태일과 평화시장 미싱 앞에 앉아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부채감'이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바탕을 둔 것이다.하지만 그 '부채감'은 조금 더 보편성을 띈다.저자는 여러번에 걸쳐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타인의 눈물이다' 라는 말을 한다.저자가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고 사유하는 방식 또한 이런 존재 규정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비극이 수행하는 것은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대립상들을 드러내 보이고 하나의 대립항으로부터 다른 대립항으로 건너가게 함으로써 삶의 전체상을 우리 스스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입니다.그렇게 삶을 전체로서 볼 수 있을 때 각자는 고립된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만남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인류의 문화적 기원이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의 폭력'위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폭력'을 '희생양'의 정수리에 꼽고 있는 '전체'가 스스로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만약 이것에 눈을 뜨게 되면 윤리의식이 발생하게되어 이 시스템은 붕괴된다는 주장이다.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질곡의 우리 역사에 기대어서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아무런 부채감도 없다.그들은 그들만의 싸움을 한 것 뿐이다'라고 말한다면'의식의 척박성'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존재가 타인의 눈물' 위에 서 있다는 말에서 저자가 그리스 비극을 읽으며 주목하는 것은 '타인'과 '눈물'이다.

비극은 슬픔의 자기반성이라고 한다.인간은 슬픔과 고통 통해 깊어지고 정신과 교통할 수 있다.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슬픔이 있다.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여서 슬플 수도 있고 명품 핸드백을 가지고 다니지 못해서 슬플 수 도 있다.시험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슬플 수 있고 하루 종일 돌깨는 9살 짜리 아이를 보고도 슬플 수 있다.어떤 슬픔과 고통이 인간 정신의 깊이를 만들어 줄 것인가? 먼저 좌절된 욕망이 주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다.또한 자기를 투사하는 형식의 자기 연민 역시 온전한 슬픔이 아니다.그리스 비극시인들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을 보여준다.이를 통해 고통의 의미를 묻고 고통에 대해 반성한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는 것이다.저자는 슬픔에의 참여를 통해 참된 만남을 이룬다라고 말한다.즉 타인의 고통을 같이 나눔으로써 나와 네가 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초기 그리스 서사시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을 뛰어넘는 정신의 숭고를 보여준다. 반면 비극은 고통을 둘러싼 대립을 전시함과 대립을 건너가게 함으로써 비극적 상황을 통해 '만남과 나눔'의 시민적 이상을 심는다.

 그리스시대의 문학은 크게 서사시,서정시,비극으로 나뉜다.서사시는 영웅의 시대이며 총체성의 시대였다.반면 서정시의 시대는 순수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반성하는 주체성의 시대이다.비극은 이런 총체성과 주체성을 공공시민이라는 이상하에 수렴하려는 장르였다

그리스 비극은 이미 자기를 주체로 자각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총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그리고 이것은 아직도 서정시의 시대,분열과 소외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타산지석이 되는 것입니다.그리스 비극의 미덕은 총체성을 추구하되 그것을 위하여 주체성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김상봉 교수는 비극이 공연예술이라는 형식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소통을 목표로하는 예술이었다고 파악했다.즉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 속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이었다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근대 서구 주체 철학의 한계를 말하며 '주체'와 '타인'의 만남, 그리고 소통에 대한 -즉 '서로 주체성'에 대한 담론을 넌지시 꺼낸다.그가 처음에 말한 '부채감'과 그리스 비극을 통해 이해된 인간의 자기반성과 타자에 대한 이해는 '서로 주체성'이라는 바다에서 만나게 된다.저자는 그리스 비극이 만남 자체를 목적으로 갖는 것이지 공공시민적 총체성이라는 고정된 사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이것이 책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나오는 '하나이면서 모두' -김상봉 교수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의 성격이다.

비극의 힘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관한 연민과 공포의 정념들을 자기 중심적인 구심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타인의 고통 아니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이 겪을 수 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유려한 흐름과 장면마다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지나치게 한가지 주제로만 환원시켜서 말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책 자체는 상당히 잘 쓰여졌고 또한 친절하다.톱니바퀴가 다음 톱니를 기다리듯이 그리스 비극을 매개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한단계 한단계 진척시켜나간다.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거기에 있다.그러나 몇 가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먼저 저자가 '타인의 눈물' '부채감'을 그리스에 적용하면서 그리스적 생산양식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저자도 아주 짧게 이야기하기는 한다.'그리스의 노예제와 외국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도이다.고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왈가왈부하는 듯 하다.김상봉 교수는 아르놀트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의 그리스적 생산양식문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몇 마디 말로 부정하고 지나간다.물론 하우저가 그리스 비극을 단순히 정치적 예술의 한 형식으로 접근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자칫 모든 예술을 정치/비정치로 나눌 수 있는 위험이 있다.저자 역시 그리스 문화라는 것이 '시민'중심의 문화라는 것을 인정한다.그런데 그 '시민'의 성격과 그 '시민'이 물적 토대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그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한 이름없는 '타인'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본다.또한 귀족과 시민의 구분 자체에 대해 그다지 성실하게 접근하지 않는다.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문화 주체로서의 시민에 대한 분석 결여는 당연히 '시민'을 탈역사화 시켜버린다.전체적으로 보면 그리스의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서구 문화사의 영원한 이상향인 '민주주의' 폴리스를  이룩한 현인들처럼 그려져 버린다.르네 지라르 역시 그리스 역사가 노예와 이방인이라는 희생양 위에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며 숨겨진 희생양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참고 삼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하우저의 주장을 인용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인간 중의 일부가 자율적인,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다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잉여노동력과 여가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오리엔트의 전제정치와 비교해보면 민주제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근대 민주국가에 비하면 오히려 귀족제의 아성이라는 인상을 준다....기껏해야 혈통위주의 귀족에 대신하여 재산에 의한 귀족이 등장한 것,씨족 단위로 구성돼 있던 귀족국가가 금리생활자가 지배하는 화폐경제 중심의 국가로 이행한 것이 지나지 않았다.게다가 아테네는 제죽주의적 기반 위에 서 있었음으로 전쟁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고 자유시민과 자본가들은 여기서 나오는 이익을 노예나 전쟁이익을 분배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들 수중에 넣고 있었다.

비극은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소재가 된 영웅전설이나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기원전 4.5세기의 주요한 철학자나 시인은 소피스트나 에우리피테스를 예외로 하면 모두가 귀족제와 반동측에 서 있었다.판타로스,아이스킬로스.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등등은 스스로가 귀족이었고 시민계층 출신의 소포클레스와 플라톤도 철저히 귀족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상봉 교수는 니체를 완전히 작살낸다.니체를 고통마저도 즐기라고 말한 허무주의자의 원흉정도로 취급한다.니체가 말한 명랑성을 그리스적 명랑성의 건강함을 잃고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감각으로 취급한다. 니체가 고립된 주체의 자기반성을 주로 이야기하기때문에 작살나는 것이다.김상봉교수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자기 자신의 생명력으로 강해진 초인의 의지정도로 설명한다.그러면서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묻고 있다.김상봉 교수가 나보다 니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런데 이 책에서는 과감한 생략과 자기목적형 전술로 인해 니체를 의도적으로 훼손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니체의 강함은 오히려 김상봉 교수가  몇 장 앞에서 '자기연민의 약함으로부터 탈출'을 요구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또한 니체가 고통을 긍정하라고 한 것이 단순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처럼 '고통을 그냥 받아라'라고 이해하고 비판을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는 아닐까 싶다.

니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도 형이상학의 틀거리로 들어가버렸다.김상봉 교수는 니체를 비판하면서 당위를 당위로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확잘라 말한다.그런데 이 문제는 '서로주체성'문제에도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이건 어쩌면 윤리학이 스스로 윤리학을 설명할 수 없는 한계와도 유사한 딜레마일지도 모른다.우선 이런 의문들이 떠오른다.그가 설정하고 있는 '주체'의 문제다.쉽게 말해서 그가 상정하는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지고 어떻게 '소통불능'상태에 들어서는 지 하는 문제다.여기서 '주체'가 훼손되는 방식을 고민하지 않거나 이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면 '소통'을 해야한다는 '당위'만 남게된다.어떤 글에서 '모든 소통은 단절이다'라고 했을때 그것은 소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이루려는 '주체'의 조각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서 그는 현재의 역사적 단계를 욕구와 일상성이 프로그램화되고 집단으로 매개되는 상태라고 말했다.특히 이 문제는 일상성의 매뉴얼이라고 할 만한 중산층에게 눈을 돌리게 만든다.르페브르는 현대 세계의 일상성이 '반복'을 통해서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한다고 말한다.김상봉 교수가 이 책에서 근원적 고통의 기원으로 말하는 것이 '죽음'이다.현대는 이 죽음을 잊게 한다.어떻게? '반복'이 그 답이다.르페브르는 삶의 비극성이 전면적으로 망각될 수 있는 것이 이 반복성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비극성의 망각이 제도로서 일상성이 거둔 큰 성과라고 지적한다.이것은 두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우선 하나는 세계의 비극성을 이해해야만 주체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하나는 자족적 공동체나 도시국가를 벗어난 현대에서 주체들의 현존은 '비극성의 망각'위에 수립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비극성'을 망각한 주체들 사이에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스 인들이 원형극장에 모여있다면 현대인들은 TV 앞에 모여있다.그것도 개별화된 방식으로 말이다.(역설적이게도 결국 예술의 역할이 현대에 있어서 다시금 중요해지는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에겐 슬픔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이미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수잔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포토저널리즘이 타인의 고통을 이중적으로 소비시켜 버린다고 지적했던 바가 그것이다.현대의 주체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아파한다.그렇지만 이것은 작은 연민과 자기가 그 고통에 빠지지 않았다는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이미지가 된 고통은 그렇게 실제계를 떠나 버린다.주체는 여러가지 형태로 파편화되고 부관참시된 시체처럼 훼손되었다.물론 이것을 어떻게 복원시키것인 가가 바로 김상봉 교수의 문제의식이다.그러나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같다.철학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총체성을 찾기 위해 소통하자는 것이 당위론적으로 맞는 말이다.그렇지만 이것이 유토피아 없는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위한 염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 조각난 세계와 분열된 주체들을 어떻게 소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심란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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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11-01 16: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그건 정말 몰랐는걸요.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글을 쓸 수 있을까??? 가 뭐가 의문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