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니체 How To Read 시리즈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내 가슴 속의 죽은 우표들, 날카로운 유리로 된 우표들은 내 가슴에 상처를 내고 곪게 한다.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HOW TO READ>시리즈 중 두 권을 샀다.이런 류의 책은 '지도'다.흔히들 '입문서'라고 많이 한다.그런데 나는 '입문서'라는 말에 약간의 떫은 맛을 느낀다.소림사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일까 ? '입문'이라는 말은 일주문 앞에 서 있는 중 공부하려는 행자를 떠올리게 한다.왠지 그 문에 발을 담그면 죽비를 들고선 장년의 스님들이 늘어서 있을 것 같다.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일단 들어 왔지.푸후후...중 되는게 쉬운지 아나 본데..그럼 한 번 죽어봐.당장 짐 내려놓고 빗자루 안 들어.이게 벌써 빠져가지고.."

'입문서'라는 말은 은근히 '지식 권력의 위계'가 작동하는 말이다.즉 '이 바닥에 신고하려면 겁없이 깝치지 말고 네 정도면 이 수준에서 해'라는 식이다.'어디 함부로 덥썩 달려들려고..겁대가리 없이.' '입문서'의 효용에 대해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세상사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걷지도 못하면서 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면에서 이런 류의 '입문서'는 필요하고 또 효과적이다.그저 '입문서'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다가 그 의미속에 '위계'적 요소가 강하지는 않을까 현실에 빗대어 생각해 봤다.'입문'이라는 말이 '초보','미숙함','무지'와 연관되는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대개 사람들은 '입문서'를 들고 다니는 것 보다는 두꺼운 저작을 들고 다니는 것을 선호한다.니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고등학교 필수도서 목록에도 들어있다.나는 솔직히 아주 명민한-이건 공부를 잘하는이란 뜻과는 관계가 없다-몇 명의 고등학생외에는 전혀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리라이팅 시리즈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 고병권도 서문에서 그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대개 중고등학교 때 니체의 책 한 권 쯤은 읽는다...그러나 정작 나는 대학원들어와서야 니체를 처음 접했다'

중고등학교 필수도서 목록을 선정하는 무대포 정신때문인지 아니면 '입문서'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아직도 사람들은 니체를 읽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로 곧바로 다이빙한다.그리고는 1분간 숨을 참다가 익사한다.

<HOW TO READ 니체>의 경우 밤눈으로 찾아가본 적이 있는 길을 다시 찾아가는데 필요한 정도의 지도책이다.과거에 니체의 집을 기웃 기웃 거렸던 사람이라면 평이한 지도를 따라 '그래 여기에 이런 건물 있었지'라고 하면서 따라갈 만하다.저자인 키스 안셀 피어슨은 니체의 철학적 연대기를 세 단계로 나눈다.(일반화된 방식이다) <비극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예술가의 형이상학'문제,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으로 부터 발전하는 중기 니체 철학,저자는 '긍정의 시대''자유정신의 시대'라고 말한다.그리고 이후 '거부의 시대'로 전화해가는 후기 니체다.우리들이 가장 많이 읽는 <차라투스트라>는 사실 니체 저작 중 대표작도 아니고 니체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부분일 수 밖에 없다.저자는 <비극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시기별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철학적 투쟁 대상.그리고 그가 만들고 싶었던 세계에 대해 중요 저작의 특정 대목을 중심으로 설명한다.예를 들어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설명으로 그는 <즐거운 학문>의 한 아포리즘을 이용해서 개념풀이에 들어간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즐거운 학문>

이 개념에서 니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바는 "삶의 긍정'이다. 내세나 천국과 대비되는 '영원회귀'(어떤 학자는 영원반복이란 말을 쓴다.)는 형이상학이 만들어놓은 도망갈 구멍을 원천차단시킨다.구원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전부 개풀뜯어 먹는 소리다.그걸 찾아보려고 어디부터 시작되었느니 그것의 끝은 어디니 하는 형이상학과 종교적 짓거리는 이제 종말처리장으로 들어가야된다는 것이다.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는 이제 신 없는 시대에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해 나가야하는지 말한다. "너 스스로를 사랑하고 너 스스로를 창조하라"는 것이 핵심이다.(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군 ^^) 쉽게 말하자.

스팅의 노래 <English man in Newyork>이란 노래가 있다.거기 가사 중에 보면

'I'm a alain I'm a legal alain ..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하는 부분이 있다.니체의 개념을 적용하면-성공할경우-그 에일리언은 위버멘쉬가 된다. 열나게 짖는 그들은 모두 중력의 영의 은유이다.그리고 니체는 이런 작업이 춤추듯 명랑한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절대로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게 '소아론적 자아찾기'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저자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니체가 성급한 사상가와 상투적 작가를 비판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이 말은 니체가 '너 자신이 되라'라고 한 것을 '소아적 자아찾가'수준으로 해석하는 것이 완전 본말전도하고 있는 것이라는 예로도 적절할 듯 하다.

세계를 실재보다 더 쉽고 편한 것으로 믿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우리는 이들의 명랑함이 지닌 천박함을 폭로해야만 한다.우리에게 필요한 명랑성은 가장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자들과 가장 생생한 현실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로부터 온 것이어야만 한다.(거의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주변에 하도 자아찾기에 목매인 20대 여성들이 많아서,주로 자아를 일본소설이나 명품짝퉁이나 영화나공연 보기에서 찾는다-노파심 삼아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영어로 하면 'over man' 즉 '넘어선 자'이다.습관,제도,상투적 관념,금욕주의적 도덕,허무주의적 형이상학 등등 넘어야 할 것은 지천으로 깔렸다.세계에는 중력의 작용점 만큼이나 많은 넘어야할 무언가가 있다.이걸 춤추면서 넘는다는 것...

"내 형제들이여,그대들의 가슴을 펴라.활짝,더 활짝! 그리고 다리도 잊지마라. 너희들의 다리도 올려라.그대들 훌륭한 무용가여....무용가 차라투스트라,날개짓으로 아는 체 하는 경쾌한 차라투스트라,온갖 새들에게 눈짓을 하며 날 준비를 마치고 각오하는 자,행복하고 마음이 가벼운자,웃고 있는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  <비극의 탄생>서문

니체에 대한 책과 연구서는 니체가 올라섰다던 6천피트 산맥보다 더 많다.그런데 '니체'를 '학문'하는 것과 '니체'의 말귀를 알아 듯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오히려 니체를 학문하는 사람들은 니체를 체험하는 것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부류중에 하나 일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너무 많은 책을 읽지 말고,책만 들척이다 사유능력을 잃지 말고,도서관에 짱박히지 말고,가급적 엉덩이를 의자바닥에 붙이고 있지말고,나가서 놀라고 한다.나가서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떠오르는 생각외에는 믿지 말라고 한다.그러므로 니체를 학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니체를 체험할 수는 없다.(물론 니체 역시 그의 언어가 표현해낸것에 스스로를 일치시킬 수도 없었다.)그들은 그저 니체를 학문해서 밥벌이하거나 여흥삼거나 전문가가 될 뿐이다.

그렇다.카잔찬키스의 조르바다.조르바가 니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이다.춤추는 조르바...상대국의 도망병과 모래사장 위에서 춤으로 서로의 역사와 아픔을 소통하는 조르바...따딴 따딴 ..부주키에 실린 테오도라키스의 테마가 귓가를 멤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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