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성스러운 테러>에는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서구 문명사에 스며 있는 테러의 계보학에 대한 고찰".영어판 제목은 "성스러운 테러, 테러리즘의 의미"이다.'테러리즘의 계보학'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테리 이글턴의 서문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서 쓴 제목으로 보인다.그러나 서문에서 자신의 에세이에 떨어질 비판을 의식해서 이런 말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얼토당토하지 않는 제목은 아니다.

 이 책은 테러리즘에 대한 숱한 정치적 연구들의 목록에 한 항목을 추가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그보다는 테러라는 개념을 좀더 고유한 맥락,즉 넓은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글턴은 자신과 함께 서 있는 좌파진영에게 사탄, 디오니소스,희생양 등이 담고 있는 정치학이  오늘날의 정통 마르크스 담론보다 더 급진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한다.

책을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이다.이 뱀은 각 장의 부제를 감싸고 있다.'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거대한 뱀'은 그리스 신화에서 '우로보로스'라고 한다.영원한 시간의 상징이며 생과 사의 끊없는 순환을 뜻 한다.마치 테리 이글턴의 작업이 신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징표처럼 읽힌다.또한 이 책의 주제인 '테러'라는 것이 문명과 끊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영원한 수레바퀴의 한 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폭력'과 '희생'의 순환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테리 이글턴이 '테러'와 관련해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양가성'이다.테러나 국가폭력 그리고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은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서로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문제점은 동전의 한 쪽 면이 나머지 한 쪽을 배척하고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이런 우화를 떠올리면 되겠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만화였던 것 같다.머리 둘 달린 괴물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유용한 점이 많아서 좋았다.먹을 것도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또 적들로 부터 방어도 용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한 쪽이 나머지 한 쪽을 너무 귀찮아했다. 걸리적 거리는 것이다. 결국 잠든 사이에 한쪽 대가리가 나머지 한쪽 대가리를 물어 뜯어 죽였다. 그랬더니 자기도 곧 죽게 되었다.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가장 우화적으로 설명하면 이것이다.(이글턴 선생님께 죄송하긴 하지만)

인류문명의 핵심에는 근본적으로 그것에 적대적인 힘들이 내재한다. 힘겹게 쟁취해낸 문명의 내부에 '테러리즘'이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에 기초하지 않은 문명은 없다.

테러를 제대로 이용하려면 우선 그것의 양가성을 인정해야한다....문명은 자신이 테러에 기생하고 있다는 그 이유에서라도 더욱 더 자신의 타자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테러>에서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는 디오니소스이다. 이 매력적인 신은 포도주와 꿀의 신이지만 -디오니스소는 그래서 계절로는 가을을 상징한다-또한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획일성의 지지하는 신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의 제전을 펼치고 있는 광경을 본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신전을 파괴하고 학살한다. 이글턴은 펜테우스를 한계를 벗어난 이성으로 보며 국가폭력의 한 전형으로 생각한다. 이 둘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서로를 존립케 하는 서로에 대한 '경건함'이다.이글턴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그다지 낯선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디오니소스에게 공간을 열어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완충역할을 한다. 이글턴을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도덕적 현실주의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이를 현재에 비유하면 '테러'라는 행위가 수용될 만한 사회적 공간이 없다는 비판으로 읽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중세에 나타나는 성스러운 테러로 들어간다. 그 핵심에는 기독교가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신의 사랑이다. 하지만 신의 사랑은 신의 법을 통해 구현된다. 과거 유대인들은 신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파악한 것에 비해 크나큰 전환이다. 저자는 이 '법과 사랑'이라는 것도 대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파르마코스'예수이다. 그는 비인간성에 도전하는 또다른 비인간성, 즉 인간성을 초월한 인간성으로 더욱 더 인간적이 된 상징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이글턴은 약간 방향을 바꾸어 '탈근대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더한다. 즉 기존의 법과 제도에 대한 무화를 주장하는 세느강변 좌파들을 싸잡아 허무주의자로 지적한다. 그리고 그의 지도 위에서는 이런 허무주의는 절대주의와도 쉽게 연결된다.(이글턴의 뒤에서 근대문명의 중요한 개념이라고 하는 헤겔식의 '절대자유'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비판을 가한다.) 이글턴은 법과 제도가 문명에서 가진 역사적 긍정성을 지지하는 토대 위에 서 있다. 특히 신체를 포함하는 물질성에 대한 그의 긍정은 그가 마르크스 문학이론가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인식시킨다.  이글턴에 의하면 법의 의미를 만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예수의 행위는 고대 영웅 신화의 패러다임과 함께 숭고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는 테러리스트들이 스스로 세속적으로 갖는 -결코 축복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방식의-숭고의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신이 사라진 시대 '예술'이 갖는 '숭고'의 의미로 미학적 견지로 문제를 옮아간다.

 근본적으로 '숭고'의 개념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와 '무'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한다. 아퀴나스같은 경우는 '신'을 '무'에 개념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무'는 '영원성'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또는 추론할 수 있는 영원성은 '죽음'외에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이글턴의 책 내내 타나토노스의 욕망과 관련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인간이 영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신화가 한 예를 보여준다.

운명적 패배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그는 맞서 싸우는 그 두려운 힘과 다르지 않은 무한함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시한다.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개인을 초극한 힘만이 유한한 존재의 포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희생의 정치화'하는 과정을 설명한다.(지라르의 '희생양제의'도 결국은 정치적 죽음이다.그러므로 정치적이지 않은 희생은 없다)그는  리처드슨의 <클라리사>를 인용한다.(클라리사는 강간의 피해자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대중들 앞에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위반당한 자신의 육체를 정치화 하고 사회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테러'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와 한 쌍이 '국가폭력' 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이 책에서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데니즈 존스턴이 인용된다

"죄 없는 국가란 불가능한 개념이다"

 대부분 사회는 결국 자신의 기원에 대해 숨기려는 속성이 있다.특히 정치 권력은 세월의 망각에 힘입어 그 토대를 만든 폭력을 위장하고 짐짓 점잖은 척한다.정치권력은 또한 추상적인 개념들을 강제하며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를 결함시켜 자신의 폭력적 결과를 정당화한다.이런 추상적 개념에는 자유,평등,국가,민족,민주주의 이런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X 를 규명하기 우해 우리 인육의 수학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피흘르는 사람들의 팔다리로 방정식을 써 나가야 할 것인가?

게오르크 뷔휘너 <당통의 죽음>중에서

이런 국가 폭력에는 중간계급의 역할도 한 몫을 한다.이런 폭력은 숨기고 싶은 기원에만 해당하지 않는다..중간계급은 도덕적 이상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경쟁,착취,침략,파괴적 개인주의라는 형식으로 폭력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대신 중간계급은 자신의 파괴적 성질을 괴물적 타자에게 뒤집어 씌운다.이글턴은 이것이 결국 '악'을 '악'으로 배제해 버림으로써 '악'을 타자화시키는 딜레마라고 말한다.

결론에서 다시 이글턴은 최초의 논의를 제확인한다.그는 테러를 결코 옹호하지 않으며 또한 테러리스트들을 그들이 칭송하듯 순교자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대개의 테러리스트들이 수시로 달라지는 정치적 사안을 위해 싸우며 자신을 빌려주는 청부 테러업자라고 말한다.그러나 문제의 직접적 원인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는 서구문명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이글턴은 자신의 에세이 중간 중간에 존재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현재의 문명-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미국-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한다.그는 공정함과 정의,그리고 현 체제에 잘 저항할 수 있는 잘 조직된 정치적 기구를 언급한다.또한 윤리적으로는 비인간성을 끌어안고 넘어서는 인간성의 구현을 말한다.물론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의 문제는 테리 이글턴의 몫이 아니다.이 책 <성스러운 테러>는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고 또한 테러에 대한 엄정한 역사서 역시 아니다.테러와 폭력에 대한 신화적이고 문학적인 분석이고 그런 의미에서 음미해 볼 만한 에세이다.

....책의 번역은 상당히 매끄러운 편이다.번역이라는 분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고 또한 이글턴의 책이 번역대상으로 어떤 수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읽는데 문법적인 막힘을 별로 없다.물론 간간히 오탈자가 있기는 하다.역자는 이 책이 많이 팔려서 2쇄, 3쇄 찍으면서 다시 손볼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번역에 불만이 없었기때문에 역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마음에서 나 역시 이 책이 많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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