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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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를 처음 만난 것은 십 여년전이다. 학과 사무실에 서가가 하나 있었다.초등학교에 있는 학급 도서관 같은 성격의 것이다.전공서적들과 맑스,현대사에 관련된 책들이 주를 이루었다.<소비의 사회>는 마르크르,엥겔스,레닌 속에서 하얗게 할딱이고 있었다.

책의 표지가 그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표지가 그대로인 것 처럼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 대한 나의 이해가 과거에 비해 얼마나 발전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소비의 사회>는 보드리야르의 저서중에서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한다고 한다.(그러나 이 '쉽다와 어렵다'는 상대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그건 보드리야르 전문가들의 입장에서이다.그래서 지금도 결코 쉽게 읽었다고 할 수는 없다.단지 십 여년전보다 두께가 두꺼워진 '지식의 먼지'로 인해 좀 더 뻔뻔하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는 점,또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소비'문제에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정도 일 것이다.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느끼는 감정이 있다.문장을 건너면서 보드리야르의 '전복적 사고'와 '혜안'에 감탄한다는 것이 그것이다.수 십년전에 만든 비틀즈의 앨범<페퍼상사의 고독씨 클럽밴드>을 지금 들으면서도 감탄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1부 <사물의 형식적 의례>에서는 '사물의 풍부함'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관심이 간다.소비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토대는 당연히 '풍부함'이다.'사물이 풍부하다.'는 것은 언제나 자본주의의 미덕으로 칭송되어왔다.탈북자들이 바라보는 대형 할인 마트의 풍성함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승리였다.또한 그들의 벌어진 입을 바라보는 자본주의 시청자들에게 역시 승리의 도취감이 발라진 마취제를 쳐넣었다.자본주의가 승리 했는지 공산주의가 승리했는지 알 길 없지만 '풍부함'이 승리를 거둔 것 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자본주의의 풍부함은 생산의 신화를 통해서 완성된다.갈브레이스의 주장을 빌어 보드리야르는 '생산된 것은 생산되는 순간 신화가 된다'는 '생산의 신화'를 맹렬히 비판한다.생산이라는 것은 통계적 장치를 통해 사회가 발전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히기 쉽다.그러나 실제 생산을 위해서는 그만큼의 '파괴'가 선행되어야한다.즉 풍부함을 넘어서는 풍부함은 '낭비'라는 형태로 생산의 바퀴를 돌리고 있다.보드리야르는 교통사고를 소비사회의 가장 큰 해프닝으로 꼽고 있다.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일게다.교통사고 나면 새롭게 창출되는 부가가치가 참 많다.즉 교통사고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란 것이다.교통경찰 먹고산다.렉카차 회사도 먹고산다.병원 응급실도 교통사고 없으면 쫄쫄 굶는다.또 재수없어 사망자 나오면 장례식 장도 좋은 일이다.자동차 회사는 좀 더 안전한 차를 만든다고 하고 가격을 높일 것이다.부품회사들도 더불어 좀 먹고 살만해진다.좀 극단적으로 말했지만 교통사고라는 단순한 파괴 행위는 사회의 부가가치를 여러측면에서 많이 높여준다.생산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통계상의 체계는 '사회적 비용'이란 것을 고민하지 않고 그저 GNP의 수치만으로 성장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과 파괴'의 직접적인 거래관계 한 가운데 '소비'가 위치한다.이러한 소비는 자율적인 선택에 의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소비는 '유도된 소비'이며 '생산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소비라고 말한다.

2부 <소비의 이론>은 보드리야르의 소비론의 핵심이다.여러가지 흥미로운 주제들이 가득하다.먼저 '풍부함'에 대한 의견을 계속 이어간다.소비사회에서 '풍부함=행복'으로 이해된다.보드리야르는 이것이 평등의 신화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며 행복을 입증하기 위해 '계량화'를 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어째되었든 '행복'은 사물과 기호로 측정될 수 있는 복리,물질적 안락함으로 표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그래서 75평 사는 사람이 24평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 보이거나 행복에 가까운 것처럼 묘사되는 것이다.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은 어떻게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소비의 이상에서는 제외된다.청담동 뷰티크 샵에 가서 가난한 날의 행복에 대해 읆어?..매장 직원들이 안습할 것이며...그 분이 나가신 후에는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소비의 사회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배제된다.보드리야르는 '수치'에서 눈길을 거두고 '해석'하라고 주문한다.소비 사회가 풍부함으로 인해 평등을 주느냐 불평등을 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즉 성장을 통해 더많은 사람이 풍부함에 접근할 기회를 갖는 다는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보드리야르는 경제성장의 중심에 자립잡는 것은 '왜곡의 과정이며 성장의 구조와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은 왜곡비율'이라고 말한다.부의 절대량에 상관없이 '성장은 불평등에 의존한다'.

흔히들 '소비'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한다.그러나 나의 욕구가 어떤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지 생각해보지 않는다.그냥 그게 좋아서...그냥 그게 예뻐서...그냥 믿음이 가서.... 이러한 욕구의 무의식화는 사실 '생산성의 욕구'이다.길게 말해 불필요할 만큼 단 한마디로 정리가 된다. '욕구의 조건지어짐' 이 그말이다.이것은 '차이화'라고 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개성화'라고 하는 것들이 체제의 완벽한 그림 안에서는 조건지어진 욕망의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리바이스 501을 입을지 '캘빈 클라인'을 입을지 고를 자유뿐이다.그래봐야 청바지인데 그걸 입고 스스로 개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개성을 사랑하는 젊은 층들이 거리에서 보면 전부 유사한 개성으로 몰개성화된다는 것은 '기성품 사회'의 증거이자 '욕구의 조건지어짐'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의 핵심 개념은 '사물의 기호와 차이'이다.포스트모던의 대표학자 보드리야르가  후기구조조의자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이다.현대 사회에서의 모든 것들은 '기호'로 교환된다.그냥 쉽게 이해하면 '타워펠리스'라는 말은 '기표'이고 '타워펠리스'라고 할 때 그걸로 상징되는 부가 '기의'가 된다.각그랜저는 과거 '부'의 상징이었고 요즘은 '깍두기'의 상징이다.이게 다 '기호'다.그 내용에 해당하는 기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언어가 그렇지 않은가...소비 사회의 사물들 역시 사물의 사용가치는 점점 탈취되고 '기호'로서 작용한다.그런데 '기호' 놀이는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청춘의 기억을 함께 나눈 고물 티코 자동차가 있다고 치자.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자동차지만 '기호' 놀이에서 '티코'는 '싸구려 경차'이거나 '아줌마들 수퍼 갈 때 타는 차'이다.'기호'에는 '타인과의 공유'가 필요하다.그게 요즘 대통령도 좋아하는 '코드' 라는 것이다. 기호가 이해되려면 '코드'가  맞아야 되는 것이다.국내 명품들로 설명하면 아주 쉽다.국내에 명품 매니아들이 좋아하는 품목들은 대개 누구나 알만한 '대중명품'이다.왜 있지 않은가? 불가리,팬디,까르띠에 등등.... 진짜 소수만 아는 명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가격도 가격이지만 그걸 해도 아무도 모른다.코드의 확산이 안되있으니까 그게 짝퉁인지 명품인지 뭔지 알게 무엇인가.대한민국의 명품은 '대중명품'으로 '코드화'되어 있다.

재화와 차이화된 기호로서의 사물의 유통,구입,판매,취득은 오늘날 우리들의 언어활동이며 코드인데,그것에 의해서 사회 전체가 의사소통하고 서로에 대해 말한다.이것이 소비의 구조이며 그 언어이다.

차이라는 것은 소비에 있어서 가장 큰 동력이다.부르디외는 차이를 '구별짓기'로 설명했다.하지만 차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편화되는 경향이 있다.한때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개나 소나 다 하게된다.그렇게 되면 애초 그룹은 또다른 차이를 위해 다른 블루 오션으로 건너간다.즉 차이는 차이 상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부르디외는 차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차이화의 구조적 논리가 있으며 이 논리가 개인들을 개성화된 것으로 즉 서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낸다.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개성적인 존재로 만드는 행위에서조차도 개개인이 순응하는 일반적인 모델과 하나의 코드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그는 차이화를 위한 경쟁을 '유희적인 추상경쟁'이라고 말한다.

3부 <대중매체,섹스 그리고 여가> 에서는 소비사회와 대중문화 사회의 상호관련성에 대해 설명한다.중요한 개념은 '르시클라주'이다. 재교육,재학습 등으로 번역된다.보드리야르가 제시하는 예를 들면 조금 더 쉽다.전원 형태의 자연이라는 것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흔히들 전원주택으로 재개발된 자연을 실제의 자연과 구분하지 않는다.전원 생활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실제 자연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그럼에도 그 둘은 혼재되어 미디어 속에 비춰지고 또 인간의 무의식속에 교육된다.자연은 원래 본원적이고 특수하면 총체적이다.하지만 현대인의 의식 속에 자연은 부정적인 모습이 거세된 상태의 것이다.보드리야르는 '유통과정에 재투입된 자연의 기호의 소비된 모습'이 르시클라주된 자연이라고 명한다.유행은 문화의 르시클라주이며 건강검진은 의료의 그것이다.

이외에도 광고,키치,팝아트,매스 미디어 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시선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유효한 구석이 많다.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는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육체는 몇 년전부터 불기 시작한 몸짱신드롬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많은 문제를 던진다.관리된 나르시시즘과 기호와 유행의 피부를 입고 있는 현대인은 자신의 육체를 사물하하고 있다.실제 자본에 포섭되는 형태를 갖고 있으면서도 육체의 해방은 인간의 해방이라는 이름을 쓰고 이용된다.육체와 관련된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본원적인 총체성을 읽은 성의 문제까지 확대된다.잘 먹고 잘 사는 법에 강박증 걸린 최근 TV 프로그램에 눈살이 찌푸려진다면 <육체>와 관련된 장만 읽어봐도 좋을 듯 하다.

<소비의 사회>는 결론에서 문학적이게도 부와 명예를 위해 악마에게 자신의 거울이미지를 판 <프라하의 학생>의 예를 든다.상품과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둔 자아는 결국 자아에게서 소외되고 사물은 복수한다.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소외의 극복은 불가능하다.왜냐하면 소외는 악마와의 거래의 구조 그 자체,상품사회의 구조 그 자체이기때문이다.<프라하의 학생>은 소비의 유희성이 점점 소비의 비극성으로 변해가는 소외를 보여준다.중세 사회가 신과 악마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면 소비의 사회는 소비와 그 저항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반소비주의 역시 소비사회에 포섭되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보드리야르는 예리한 분석에 비해 적절한 대안을 이야기 해주지 못한다.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답답해질 수도 있다.'소비의 하얀 미사를 걷어치워라' 라고 외친다고 소비사회로 부터 달아날 수 없다.하지만 보드리야르에게 모든 공을 넘길 수는 없다.학자의 몫은 거기까지 일 때가 많다.

진정한 고민은 지금부터이고 나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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