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관 가는 일은 노숙자가 청와대가는 일 만큼이나 힘들다.기술의 발전이 영화를 거실로 가져다 주지 않았다면 아기 클 때까지 영화감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비디오가 영상을 개인적인 공간으로 끌어왔다면 DVD는 더 나은 화질과 소리를 안방으로 들여왔다.고급 홈시어터가 있다면 유사영화관의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집에 소형 5.1채널 시스템이 있지만 요즘은 사용불가다.작지만 TV소리 보단 크기 때문에 아기 재우며 영화를 볼 때 그걸 쓸 수는 없다.결국 TV 모니터의 소리만 아주 작게 켜고 TV앞에 붙어서 영화 <묵공>을 봤다.그나마 외국 영화는 자막이 있어서 다행이다.지난 번에 영화 <타짜>를 볼 때는 볼륨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무지 애썻는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영화 <묵공>의 주인공은 '유덕화'와 '묵가'의 사상이다.

먼저 유덕화....지난번 국제 영화제때 한번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나이가 들어도 멋있으려면 살이 쪄서는 안되는구나를 생각하게 했다.유덕화는 나이가 들 수록 멋있어진다.영화 <천장지구>와 <열혈남아>에 나왔던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멋있다.눈은 깊어졌으며 얼굴에 생긴 주름사이로 연륜이 보태지기 시작했다.이런 배우들은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영화에서 혈혈단신으로 양성을 지키기 위해 온 묵자의 역할을 했다.청빈함과 활동성을 확보한 혁리의 의상은 그의 카리스마와 더불어 인상적이었다.그냥 너덜 너덜하게 입은것 같지만 아주 치밀하게 계산된 내츄럴 트랜드 의상이었다.(이건 함께 영화를 본 와이프의 견해다.)

영화는 춘추전국 시대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왕은 '묵가'의 아나키즘적 사상이 국가 내에 퍼지는 것을 경계한다.'묵가'의 사상은 '이상적'이어서 현실을 꾸려가는데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한다.그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수성'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묵가는 일종 춘추전국 시대의 '코뮌'이었다.제자백가의 사상이 다 그렇겠지만 묵가 역시 춘추전국시대의 현실에 대한 고민에 토대를 두고 나온 사상이다..하루가 멀다고 이어지는 전쟁,패권이 바뀌고 그 때마다 늘어나는 주검,피폐한 민중들의 삶......

제자백가라는 것 역시 따지고 보면 패권을 잡기위한 정치체제의 필요에 의해 양성된 것이다.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무수한 '00군' 들은 다들 식솔로 이러한 정치참모들을 끌어모았다.공자도 맹자도 자신의 철학을 팔러 다녔다.묵가는 역시 지독한 현실에 대한 타개책으로 모색된 것이다.

대학 때 묵가에 대해 배우며 '혁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다.혁리는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혁리는 묵가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말한다.혁리의 입을 통해 '비공'과 '겸애'라는 말이 나온다..더 깊은 함의가 있겠지만 요즘말로 하면 '반전평화주의'와 '평등사상'이다. 또한 묵가는 '검소'함을 무척 강조했다고 한다.요즘 말로 하면 '반소비주의' 정도를 갖다 붙일 수도 있을 법하다.

묵가는 기계 제작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영화 <묵공>에도 많이 나오는 '수성'을 위해서 '방성'도구들을 만들었다는 것은 묵가의 철학과 현실의 매개를 찾는 실천적 요소로 읽힐 수 있다..

묵가는 또한 강력한 조직력으로 유명하다.전쟁에서 패해서 집단자살했다는 것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지도자에 대한 믿음이 거의 종교적이었다.물론 이것은 묵가를 탄압하고 지적 헤게모니를 잡은 유가들의 정치적 이유때문에 확대해석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또한 당시 시대적 한계였겠지만 도술이나 미신같은 것들에 의존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묵공>에서 혁리는 묵가의 의견에 반하여 양성으로 왔다.혁리를 '좌파 자유주의자'로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묵가의 교리를 따르지만 조직 전체의 의견보다 개인의 선택을 우선시한 그의 입장은 재미있는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영화<묵공>에서 감독이 연애라는 통속적인 스토리 라인을 만든 것은 정말이지 안타깝다.철학적인 주제를 상업영화의 틀안에서 만들어내었지만 그것을 가지고는 안전핀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나보다.하지만 그건 기우이며 사족이다.세계관의 힘이 영화를 잘 이끌어오다가 급격히 무너지는 것이 그즈음이다.

영화는 결국 아무런 승자도 없음을 이야기한다.전쟁은 아무에게도 승리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항장군의 죽음은 힘의 논리가 갖는 순간적 승리의 덧없음에 대한 감독의 주장이다.혁리의 상대역인 항장군의 캐릭터가 좀 더 치밀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말이다.차라리 연애스토리를 버리고 항장군의 캐릭터를 조금 더 입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어설픈 연애담에 공감하기보다는 상대적인 가치관의 대립이 더 큰 흡입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혁리가 전쟁 고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장면은 진부한 설정이다.그렇지만 묵가의 현재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묵가의 '비공'과 '겸애'는 제국의 깃발아래 신음하는 세계에 여전히 현실적인 유효성을 갖는다.혁리가 양성을 지키기 위해 동원한 것은 '지도층의 희생과 민중들의 협력'이었다.

결국 관점은 '세계관'이다.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어떤 대안을 찾느냐의 문제...그리고 현실의 권력관계 속에서 어떤 전술들이 택하느냐의 문제이다.

혁리의 수성은 실패했다.혁리의 실패일까? 아니면 시대의 실패일까? 여우같은 군주는 과연 성공한 사람일까?아니면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이 성공한 것일까?

혁리의 실패는 묵가에서 이미 예견한 것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영복의 <강의> 중 묵가를 설명하는 짧은 글이 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또한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묵자가 송나라를 지날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다.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조용히 일을 처리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고 싸운 사람은 알아준다"

....그게 그런 것이다....가장 혐오해야될 사람들이 그게 그런 것인지 알고 그 사악한 머리를 굴려 이득을 얻는자들이다.억울함....없다고야 하겠냐만은 신념을 다 한 자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신념을 다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굴려 살아남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인데 이 상황에 딱어울리는 듯 하다.

"風來疎竹 風過而竹不留聲

"雁度寒潭 雁去而潭不留影 故君子事來而心始現事去而心隨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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