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당(黨)에는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었다. 그 때에는 소인과 군자를 구분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지금의 당에는 군자도, 소인도 없다. 오직 자기 편이면 등용하고 남의 편이면 등용하길 꺼릴 뿐이다. 이들의 마음씀이 군자답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성품은 모두 다르지 않으니, 마치 미인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다. 시비를 가리는데 있어서도 옳은 것은 누구나 다 옳다고 여기고, 그른 것은 누구나 그른다고 여긴다. 그런데 지금은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서로 원수처럼 여기고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사(私)가 공(公)을 이기고, 공이 멸하고 사가 굳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단이 심해지면 처음에는 그러려니 생각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세상 사는 도리라고 여겨 누구나 굳게 믿게 된다. 이런 곳에서 명예와 이익을 좇는 행위가 본래의 선량한 마음을 좀먹는 것은 물론이다.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1673∼1744)의 ‘붕당론’(문집 ‘서당사재’에서)
경향신문 <옛 글의 숨결>에서 옮겨봤다...사가 공을 누르게 된 결과가 낳는 사회적 의미가 의미심장하여 다시 한번 읽어본다.
"사가 공을 이기고 공이 멸하고 사가 굳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이러한 폐단이 심해지면 처음에는 그러려니 생각하다가,마침내 그것을 세상사는 도리라고 여겨 누구나 굳게 믿게 된다"
해방 이후 한국 역사가 현재 우리 사회 개개인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예견한 글이 아닌가 싶다.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큰 벽은 반성하지 않는 이성에서 나오는 '(이 글에 나오는)세상사는 도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군사문화가 만들어 놓은 위계적 조직문화가 그것이며 개인을 인정하지 못하고 집단으로 호명하는 것이 그것이다.연대보다는 작은 틈새라도 먼저 치고 나가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러면 너만 바보 된다'가 그것이고 '그런다고 누가 널 알아 줄지 아냐'가 그것이다.또한 '그래봐야 소용없다.'와 '네 살 길 찾는데 신경쓰는게 낫다'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