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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의 탄생 - 청중의 자리에서 본 클래식 신화의 탄생과 해체
와타나베 히로시 지음, 윤대석 옮김 / 강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음악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예술의 장르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과 가까운 것이 음악이다. 미학자들 중에는 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예술 장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다.음악은 기호들의 내적 관계이며 그 음표들의 연관이 음악의 형식이 된다.이러한 일렬의 기호들의 관계가 인간에서 정서적 경험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그 음들이 축적된 인간정신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다.음악 자체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음악을 둘러싼 사회상을 살펴보는 것은 그것보다 수월할 지 모른다.
일본에 포스트 모던 열풍이 불었던 1980년대 중반 <청중의 탄생>이 소개되었다.책은 음악 수용자들의 변용을 중심으로 살펴본 음악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거칠게 말하자면 저자는 음악 수용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전 근대,근대,그리고 탈근대이다.와타나베 히로시는 각 시대 구분에 조응하는 예를 찾는다.먼저 전근대와 근대로의 전환기로 19세기의 예를 든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수용형태가 결정된 시기이다.다음으로 기술 혁신의 시대인 1920년대 미국.이 시기는 19세기 안착된 음악계가 기술 문명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하던 시기이다.마지막으로 1980년대 일본의 음악계가 탈근대화한 수용자들의 예로 제시된다.저자는 책의 서문과 증보판 후기를 통해 이러한 시대 구분과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한 배열이 인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구 대륙과 신 대륙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구성원들의 계급적 성취단계,각 국가별 독자적 문화 수용의 부분이 무시된 부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한 저자의 사전 양해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비교는 클래식 음악 수용자가 클래식 음악계의 판도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이 책이 음악팬들이나 예술 애호가들에게 유의미하게 읽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 공연장을 생각해보자.대개 몇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높은 지붕,스팟 조명,조심스러운 기침소리,눈을 감고 곡에 심취한 음악팬.....와타나베 히로시는 이러한 클래식 청취의 스테레오타입화가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바흐나 하이든,모차르트 시대는 음악회가 지금처럼 '진지한 감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교의 장'이었다.당시 음악 소비자는 명확하다.곡을 의뢰하고 음악가의 패트런이 되어준 귀족층과 그의 친구들이다.음악가들은 도자기나 장식품을 만드는 도공처럼 음악을 작곡하고 그들을 위해 공연했다.거기에는 현재 너무나도 당연히 되는 '작품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저자는 그 예로 모차르트의 공연 팜플랫을 든다.공연 목록을 보면 교향곡이 한번에 연주되지 않는다.1악장이 연주되고 다른 타펠뮤직(식탁음악)들이 들어간다.그리고 공연 마지막쯤되서 다른 악장이 연주된다.음악 수용 태도는 '사교의 장'에 걸맞게 시끌벅적하다.물론 그 중에는 진지한 관객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위한 차분한 음악회도 있었을 것이다.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이러한 두 종류의 공연장 모습이 연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러한 음악계의 풍토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고착되게 된다.우선 음악 소비층의 변화가 그 원인이다.특수제작을 요구하던 귀족층에서 일반상품을 구매하는 부르조아지가 음악계의 중심 세력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흔히들 베토벤을 작가 내부적 자율성에 의해 창작하는 예술가의 첫번째 세대로 기억한다.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관련있다.또 다른 하나는 음악계내의 '예술로서 음악'에 대한 정착 노력이다.18세기 미의 원리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감성'과 '정신'의 종합이었다.예술가들은 예술이 감성과 정신이라는 모순된 영역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음악은 다른 장르에 비해 '정신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음악은 '감각'의 영역이지 고도의 정신성을 담보한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18세기의 음악 소비형태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판단은 자연스럽다.그저 귀족들의 식사 시간 배경음악이 어떻게 정신성을 갖춘 '예술'로 대접받을 수 있겠는가.저자는 슈폰호이어의 주장을 인용하여 '음악'의 예술로의 편입을 위한 인정투쟁을 설명한다.슈폰호이어는 미학이 음악에 부여한 좋지 못한 평가를 불식하고 자기정당화를 도모하기 위한 전술로서 음악미학이 이러한 요구에 맞지 않는 음악을 '저급'이라고 떨쳐버리는 방식을 취했다고 본다.즉 산만한 청취,식탁음악,감각성에만의 의존등을 배제하므로써 음악이 예술로 편입되는 방식이다.이제 음악은 '진지한 음악' '정신성 있는 예술'로 바뀌었다.연주회에서 떠들거나 개를 데리고 오는 짓은 무식한 비교육층이 하는 짓이 되었다.세이퍼는 이를 '진지한 청취'라고 말한다.19세기에 정착된 이러한 '진지한 청취'는 현재까지 클래식 공연의 가장 규범적인 청취방식으로,전통으로 자리잡았다.19세기의 진지한 음악가와 음악팬들은 굳히기 작업이 필요했다.그들은 리스트류의 비르투오조에 대해 비판하며 고전 작곡가들을 신화화 해나가기 시작한다.즉 연주자의 비르투오시티는 감각적인 열광일 뿐이며 진짜 음악은 바흐,베토벤등 정신적 영역을 담보하고 있는 거장들에게 있다는 것이다.'신에 헌신하는 바흐' '불굴의 인간의지 베토벤' '가난하지만 청순한 모차르트' 등의 이미지들이 19세기에 만들어진다.이 이미지 역시 이후 역사적 검증과 논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유효하다.결론적으로 '저급음악의 배제,진지한 청취,고전 거장들에 대한 신화화,연주회 윤리의 확립' 등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청중'이 만들어진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19세기에 안착된 근대적 청중의 모습에 동요가 일어난다.근본적인 원인은 '기술문명'의 발전과 자본주의 광고의 '이미지화'작업 때문이다.저자는 음악관련 기술 발전의 예로 '자동피아노'를 든다.자동 피아노는 피아노롤에 펀칭을 해서 연주자 없이 피아노를 재생하는 장치이다.요즘도 아이들 장난감으로 이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손잡이를 돌리면 펀칭된 골을 따라서 예쁜 멜로디가 나오고 그 위에 인형이 빙글빙글 도는 형태인....이 책에 등장하는 자동피아노는 실제 연주자들의 연주를 피아노 롤로 저장하는 것들도 있다.고도프스키,모이세비치 같은 연주자들도 이 자동 피아노에 녹음하기도 했다.저자는 자동피아노의 발달로 청취 형태의 변화가 공연장에서 일반 가정으로 바뀌어 가는 점에 주목한다.물론 1920년대의 상업주의 광고가 만들어준 '풍요로운 가정'이미지도 주요했다.이 시점에서 기업의 상업주의와 클래식 음악계가 손을 잡게된다.음악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적 변화는 당연히 수용방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우선 예술 체험의 일회성이 사라지면서 -즉 아우라의 상실-공연 공간과 일상이 뒤섞이게 된다.이 현상을 현재로 끌어올리면 거장의 연주를 CD라는 복제기술을 이용해서 아침에 이닦으면서도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말한다.여기에 '음악의 정신성'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다.음악의 정신성은 다른말로 하면 음악이 가진 정신적 영역에 대한 표현성이다.이 '표현성'에 대한 공격은 현대의 '미니멀음악''환경음악'과 같은 종류의 음악을 만들어낸다.이 책에서는 1920년대 전위음악가들이 시도하던 '표현성'에 대한 소거를 에릭 사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이는 19세기에 음악전문가들에게 강제로 배제된 '음악의 감각성''음악의 사회성'에 대한 복원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 와타나베 히로시의 이야기는 일본의 현재(1980년대)까지 오게 된다.저자는 이 시기를 포스트모던한 음악 수용자들의 도래기로 파악한다.일단 청중의 형태를 '분중'이라는 말로 정리한다.즉 '나누어진 청중'이라는 것이다.수용자의 분중화 현상으로 우선 '음악의 카탈로그화' 가 지적된다.과거 바흐,베토벤 등에 한정된 음악목록이 대폭 넓어진다.이 책에서는 베토벤의 연주 횟수와 말러 연주 횟수를 비교한다.이는 거장을 한축으로 햇던 클래식음악계의 변화로 받아들여진다.구심적인 음악 소비구조가 증식하여 원심적인 상황으로 바뀌는 것이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음반가게 카탈로그를 한번만 둘러 봐도 금새 알 수 있다. 바흐-베토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작곡가들이 있는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사이에 또 얼마나 이름도 낯선 작곡가들이 있는지.현대의 음악가와 팬들은 이렇게 사이 사이에 있는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비한다.이 책에서 거론했던 말러는 음악팬들 사이에서는 자주 찾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다.저자는 '카탈로그화'현상이 학자적 발상이 대중화된 것이라고 말한다.즉 '전국민의 음악학자화'라는 것이다.학문적 지식의 대중화는 사실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교육 수준의 확산과 정보매체의 다양화는 일반인들에게 전문가적 안목 내지는 그와 유사해지고픈 심리는 붇돋았다.그러나 저자는 음악계에서 이러한 현상이 상업주의와 결합되며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렀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현대의 음악팬들은 상업주의와 결함된 '차이'를 소비하는 것이다.리프킨의 바흐 합창인원 논쟁이나 모차르트 교향곡 발견 같은 예들은 음반 판매 마케팅과 오버랩되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피할 수 없어보인다.저자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청취층의 변화 양상으로 '부닌현상'과 '9번교향곡열풍'을 들고 있다.부닌은 쇼팽콩쿠르 우승자로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인기가 높았다.일본에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나보다.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19세기 배제된 '비르투오조'에 대한 -다른 의미에서는 '진지성'에 대응하는 '오락성'의-복원으로 바라본다.베토벤 9번 교향곡을 일반인들이 일본어로 음차하여 합창단에 참가하는 현상 역시 '대중의 저변확대'라 바라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결론에서 '대중의 경박화 '를 포스트 모던 사회의 긍정적인 특징으로 설명한다.'진지함'에 갇혀 버린 음악의 한 쪽 날개를 펼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말러 음악에 현대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말러 음악의 난해함과 들쭉날쭉한 비통일성은 다양한 음의 이미지를 쫓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다.사티의 음악도 마찬가지로 '전체에서 세부로의 관심'이라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상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근대 사회는 음악 예술을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그러나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관객들은 예술과 오락에 대해 그동안 확립되어온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그들은 이것들을 다시 '일상생활'로 끌어들이고 있다.저자의 결론은 근대의 '의지''이성'에 포박된 음악을 풀어해치는 탈근대적 정신을 옹호하고 있다.
저자도 증보판 후기등에서 밝혔던이 이 책 <청중의 탄생> 첫 판이 나온 것은 20년 전이다.일본의 포스트모던 열풍도 가라앉았다.물론 한국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인고 있다.저자는 증보판에서 책을 집필할 당시와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이 책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시대적 삼분법과 그에 대한 반성이 주를 이룬다.저자의 변화된 관점은 각 시대가 이후 시대의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수렴된다.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근대라는 프로젝트 역시 허구가 아닐까 의심한다.근대라는 것은 공론의 장에서만 있어왔던 것이고 모든 문화 현상이라는 것이 굳이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던 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이어진다.저자는 이런 말로 결론 짓는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된 '사실'이 있을뿐이며 그러한 '사실'이 시대 속에서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문화를 형성해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치에 맞다.
근대의 '신화화'와 포스트 모던의 '탈신화화' 작업에 대한 저자의 절충적이며 설득력있는 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