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전집 1 - 인생론
노평구 엮음 / 부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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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1927년부터 일제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15년 동안 발간했던 『성서조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선생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제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한 것은 오직 “성서의 진리” 위에 “조선”을 세우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

선생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로 만들 것을 목표로 삼아,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를 추구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라고 말한 선생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접하게 된다.

선생은 1942년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글 <조와(弔蛙)>가 민족정신의 고취했다는 이유로, 신앙 동지들과 함께 만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다. 당시 취조를 맡은 일본 경찰들이 한 말은,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그가 일생 추구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중략)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 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후일 김교신 선생은 일본 경찰의 힐난에 대해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하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선생은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7월부터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서 5천 명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지와 깨우침을 위해 진력했다. 끝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강제 징용된 동포들에게 기독교의 참된 신앙 정신과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돌연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1945년 4월 25일 작고했다. 만 44년의 길지 않은 생애였다.

선생이 타계한 후 『성서조선』에 수록된 선생의 글은, 선생의 제자인 노평구 선생의 손으로 편집되어, 1975년에 『김교신 전집』으로 완간되었다. 김교신 선생의 신앙과 삶이 고스란히 담긴 『김교신 전집』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이후 한국 기독교의 고전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수많은 진실한 가슴에 깊은 공명과 파장을 일으켰다.

곡학아세(曲學阿世)와 가치전도(價値顚倒)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을 위해 진리와 양심을 내팽개치기가 다반사인 한국 현실에서, 김교신은 과연 민족의 사표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노평구 편집의 『김교신 전집』은 독자들로부터 예약 주문을 받아 제작된 관계로 곧 물량이 소진되었고, 유감스럽게도 일반 독자들로서는 좀처럼 다시 구해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다행히 이번에 도서출판 부키에 의해 말끔히 새 단장을 하여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는 등 외형상의 수정이 가해졌고, 『성서조선』 원문과 일일이 대조함으로써 기존의『김교신 전집』에 있었던 탈자, 오자를 크게 바로잡았다.

편집진은 『김교신 전집』을 명실상부한 현대의 고전으로 만들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 잘 사용되지 않는 어려운 낱말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뜻풀이를 붙였고, 한문 문장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그 의미와 출전을 밝히고자 했다. 짐작컨대 앞으로 한 세대 동안 김교신 선생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이번에 나온 부키 판 『김교신 전집』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서구의 선교사가 전해 준 서구적 신앙을 되뇌고 서구적 찬송을 소리쳐 부르며, 서구적 교회와 교파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늘어지면서 고집스럽게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키워오는 동안, 김교신 선생은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는 노력으로 일관했다.1930년대 한국교회가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흔들리며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합류하던 그 때, 한국 기독교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준 인물은 김교신 선생이었다.

김교신 선생은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김교신 선생을 감리교의 윤치호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단박에 드러난다. 두 사람은 실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길을 걸었다. 윤치호가 기독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로 친일로 귀착된 “좌절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반면,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바람직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제자였던 선생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면서도 친일로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조선 사람으로 남았던 민족주의자였으며,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可見的)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던 종교개혁적 신앙인이었다.

중세 말기의 타락한 가톨릭 교회를 연상케 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세속화가 심각한 시점에서, 『김교신 전집』의 발간은 초대 기독교와 종교개혁 시대의 순수하고 철저한 신앙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소중한 기회를 준다. 한국 교회를 짓누르는 거대한 대리석 성전의 무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김교신 전집』을 읽어야 할 것이다.

김교신 선생은 이제 가고 없다. 그러나 『김교신 전집』과 더불어, 선생의 신앙과 삶은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3백년, 5백년 후에 동지를 구하겠노라”고 한 김교신 선생의 뜻이, 새 모습으로 간행된 『김교신 전집』과 더불어 젊은 세대들 사이에 널리 펼쳐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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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평전 -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김경재 지음 / 삼인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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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좋은 것이다. 김재준 하면 막연히 기독교 장로회의 설립자 정도 밖에는 몰랐던 나에게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덤으로 한국 현대 기독교사의 큰 흐름까지 알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일일이 발품을 팔면서 알아보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서도 다 알 수 없는 것을, 단 하루 만에 책 한 권으로 다 읽어치우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이 책의 저자인 김경재 교수(한신대 교수)는 전교(傳敎) 초기 한국 기독교를 제1세대(1880-1900), 제2세대(1900-1920), 제3세대(1930년대)로 시대 구분한다. 1세대에서 2세대까지만 해도 한국 기독교는 복음적 신앙, 민족적 신앙, 토착적 신앙을 거지고 건강하게 성장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기부터,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부터 한국 개신교 교회는 침체와 신앙의 경직화, 그리고 방향 감각 상실의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생동감을 잃고 교권주의, 율법주의, 사이비 신비주의로 병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교회의 위기 시대는 창조적 소수자의 활동기이기도 했다. 감리교 이용도의 교회 부흥 운동, 김교신, 함석헌 등의 무교회주의 운동, 그리고 최태용을 중심으로 한 주체적 민족 기독교 복음교회 운동 등이 일어난 것이다.

김교신, 함석헌 등과 동갑이었던 김재준(모두 1901년생)은 이 무렵에는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사에서 김재준이 본격적으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1939-1940년의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 설립에 하늘의 부름을 받고부터였다.

1930년대 이후 장로교 내에서는 교권 문제와 신학 문제로 두 개의 흐름이 분열 대립하고 있었는데, 교권으로 말하면 서북 교권과 기호 교권의 대립이요, 신학 노선으로 말하면 근본주의적 보수 신학과 진보주의적 개혁파 신학의 대립이었다. 조선신학교는 후자, 즉 기호 교권 및 진보주의 신학의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장로교의 교파 분열에 대한 구구한 사연을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만 김재준이 설정한 신앙 노선이, 피선교국 한국의 교회나 신학 교육을, 보호받고 지도받아야 하는 평생 미성년자 취급하는 외국 선교사들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점은 일본 무교회주의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입장과도 다르지 않다. 우치무라는 철저한 자립정신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외국 선교사들이 진정으로 일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원한다면 먼저 일본의 기독교가 재정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김경재 교수는 한국 보수주의 교회에서 교리로 세뇌당한 교인들이 불교 법당에 안치된 불상을 우상이라고 이해하면서 훼불 사건을 일으킨다고 지적하면서, 진짜 우상은 바로 그런 극단적 신도가 신봉하는 잘못된 ‘교리주의적 기독교’일 따름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은 구약 시대처럼 이방 신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절하는 유치한 가시적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좌지우지하면서 끌고 다니고 조종하는 돈, 권력, 종교, 국가, 세계관, 경전, 근본주의적 교리, 섹스, 대중문화 등이야말로 현대인의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재준이 일생 추구한 목표는, ‘복음의 자유’를 다시 회복해 교권주의나 율법주의나 국가지상주의 등에 노예가 되어 있거나 어떤 이념이나 조직 체계에 종속되어버린 인간을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인’으로 복권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김재준의 신앙적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기독교가 이웃 종교들에 대해 갖는 태도를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배타주의적 입장은 글자 그대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에 대해 배타적 입장을 취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만이 참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대화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그들을 심판하고 개종시키는 길만이 옳다고 확신하므로 종교간 충돌의 불씨를 항상 안고 있다.

둘째 포용주의적 입장은 기독교를 가장 우월한 영적 종교라고 확신하면서도, 다른 종교들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각자 자기 몫을 견지해 왔다고 판단하여 다른 종교의 전통을 존중한다. 물론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생명의 복음’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지닌 온전한 종교라고 고백한다.

셋째 다원주의적 태도는 세계의 다양한 고등 종교들은 인류가 처한 자연적, 역사적 전통 속에서 ‘진리 그 자체’가 다양하게 나타난 결과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우열을 판단하기보다는 각각의 종교의 위대성을 인정하고 서로 배우며 협동하자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이 세 가지 중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를 판단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김재준이 이 세 가지 입장 중에서 포용주의적 입장에 선 분이었다고 평가한다. 김재준의 포용주의적 입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재준은 “우리 한국인은 유교, 불교 등 기독교 아닌 타종교를 받아들인 이후만 하더라도 약 1,500년의 긴 역사를 이룩해왔다”고 지적하고, 우리나라에 온 초대 선교사들이 너무 고자세였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하나의 공백(空白)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설령 한국 문화에 무엇인가 있었다 해도 그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의 소산이라 하여 일망타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불당의 불상이나 유교의 제사를 단순한 우상숭배로 치부하여 그 박멸을 기도했고, 그것은 결국 커다란 ‘거침돌’이 되어 한국인의 복음 이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하나님만이 절대자이시고 그 외의 어떤 것일지라도 절대화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전(성경), 신조, 교리, 교직 등은 결코 그 자체로서 절대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 그 자체도 절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재준의 입장은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한 다음 말과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진리’보다 ‘기독교’를 더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기독교’보다는 자신의 ‘교파’나 ‘교회’를 더 사랑하는데 이르게 되고, 마침내 모든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끝맺게 된다.”

김재준은 무엇보다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책을 읽었으며, 심지어 식사 중에도 책을 읽었다고 전한다. 졸업식장에서도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할 정도였다.

“여러분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책을 읽으십시오. 교역자가 가난해서 책 살 돈이 없으면 며칠 굶어서라도 책을 사서 읽어야 합니다. 읽을 뿐만 아니라 책을 몸에 지니고 다니십시오.”

김재준은 말년에 그리스도가 그와 평생 동행했노라고 고백했다. 수호천사가 그를 옹위하면서 때론 꿈으로, 때론 지혜로 그를 돕고 인도했다고 김재준 본인은 물론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자 및 신도들도 믿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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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村鑑三 全集 제1권
우찌무라 간조 지음 / 크리스챤서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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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로 불린다. 우치무라는 서양에서 수입된 교파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의 마음속에 뿌리 내린 기독교만이 일본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을 구원한 기독교가 루터에게서 나오고, 영국을 구원한 기독교가 존 녹스와 밀턴에게서 나왔듯이, 일본을 구원할 기독교는 일본인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날의 정신적 길잡이

 내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저작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생이던 1974년의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선배의 권유에 이끌려 한 선교단체에서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이교도’였던 내게, 성경이 보여준 세계는 카프카의 말마따나 ‘머리를 마구 두들겨대는’ 것이었다. 나의 정신은 일종의 문화충격(culture shock)을 겪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민이 생기면 사람보다는 책에서 답을 찾는 버릇이 있는지라, 도움이 될만한 책을 찾아 나섰다. 동아리 활동도 친구들과의 교제도 거의 끊다시피 하면서, 틈만 나면 일삼아서 광화문, 종로, 청계천 일대의 서점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종로서적에서 우연히 문고판으로 출간된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문답>과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발견했다. (두 책은 모두 <우치무라 간조 전집>에 실려 있다.) ‘동양인’의 입장에서 ‘이질적’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공감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강하게 끌리게 되었다. 비기독교 문명에 속한 이교도로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겪었던 우치무라의 정신적 역정(歷程)이 내게도 호소력을 가졌던 것 같다. 

 나는 우치무라와의 만남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무교회주의 모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곧 서울 종로 2가 YMCA에서 노평구(盧平久) 선생이 주관하는 무교회 성서연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평구 선생은 우치무라의 제자였던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의 신앙적 제자로서, 한국 무교회진영의 제2세대 지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노평구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학문적 노력을 적극 권장했다. 심지어 성서연구회에 참석하는 대학생들에게 인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따기 전에는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이다. 역사를 전공하던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과 학문의 일치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해서 전공을 서양사로 정하고, 청교도 시인 밀턴을 박사학위논문 주제로 택한 것도 무교회의 면학 분위기에 영향 받은 것이었다. 노평구 선생이 주관하던 성경 집회와 단테․밀턴 독서회에 참석하던 그 시절이 내게는 진정한 의미의 대학생활이었던 셈이다.

 
학문의 필요성

 우치무라는 <전도의 정신>에서 전도자의 자질로서 다방면의 세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우주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나타내보일 직책에 있으므로 전도자가 몰라도 좋을 지식은 이 넓은 우주에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욱 깊어지고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더욱 밝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자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학문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신학만을 아는 전도자는 신학생의 교사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목수.미장이.농민.서민.학자.정치가 등 평신도의 지도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특히 다음 분야의 지식을 적극 권장한다.

 첫째로, 경제학과 사회학 등 사회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전도자는 사회의 지도자이며 사회를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이끌어가는 것이므로 이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연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므로 이를 배워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을 공부해야 한다. 역사학은 인류 발달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밝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역사학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에 대한 이해를 높여 관용의 정신을 갖게 해준다. 역사학은 국민은 인류보다 작은 것이며 인류 전체의 발전은 한 국민의 발전보다 긴요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전도자는 역사학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인류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끝으로, 이상적인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성서의 원어를 비롯하여, 충분한 성서 연구가 필요하다. 성서 연구 없이 전도에 나서려는 것은 수학 지식 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이다.

 요컨대 우치무라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사람’을 알기 위해 역사와 사회과학을, 그리고 ‘자연’을 알기 위해 과학을 연구할 것을 주장한다. 우치무라는 이 세 가지가 합하여 ‘트리니티’(三位)를 이루며, 하나가 빠지면 다른 나머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셋이 합하여 비로소 완전하고 건전한 지식을 구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의 이런 관점은 오늘의 한국 현실에 많은 빛을 던져준다. ‘지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말을 쓰면 우선 교역자들부터 안색이 굳어지고, 젊은 대학생들이 교회에서 학문을 거론하면 ‘지적 교만’이란 딱지를 붙여 백안시하기도 하는 한국 교회는 무지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인의 기복만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양산되고, 최소한의 기초질서마저 분별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완장처럼 휘둘러댐으로써, 본보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세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중세말기의 타락한 가톨릭교회를 연상케 하는 후안무치한 교회 세습이 자행되는가 하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마저 결여한 광신도들은 이슬람 근본주의 못지않은 파괴와 폭력을 자행한다.

 
독립신앙

 우치무라는 서양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왜곡, 굴절된 교파 기독교는 일본의 토양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일본이 외국에서 진리의 싹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일본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배양되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 기독교는 ‘일본인 특유의 관점에서 해석된 기독교의 진리’여야 하며, ‘어떤 외국인의 중재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본인들이 직접 받은 기독교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독립정신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외국 선교사들이 진정으로 일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원한다면 먼저 일본의 기독교가 재정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치무라는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독립적인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기독교신앙을 가졌지만 외국 선교사들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을 것이며, 외국인에게 돈을 빌려 쓰면서까지 선교 사역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렇듯 독립적인 신앙을 강조한 우치무라가 개인주의를 존중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귀중한 것이고 후자는 비천한 것이다. 나는 개인주의는 존중하지만 이기주의는 전적으로 배척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존중한다. 자기를 존중함과 동시에 또한 남도 존중한다. ……개인주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서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전집> 제10권)

 
천황제를 부정하다

 3년 반의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1888년 5월에 귀국할 때, 우치무라는 일본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생애를 바치겠다는 고상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중심점이 하나뿐인 ‘원’이 아니라, 예수와 일본이라는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라고 주장했다. 우치무라의 ‘두 개의 J’는 예수의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제1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제2계명을 결합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현 도쿄대학 교양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891년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 그 해 1월 9일,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를 천황의 초상화 옆에 걸어놓고 그 앞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우치무라는 60명의 비기독교 교사진과 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양심에 따라 그 자리에 선 채 혼자 절을 하지 않았다. 우치무라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그가 재직하고 있던 제일고등중학교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서 먼저 나왔다. 심지어 우치무라의 집을 습격해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매스컴은 재빨리 이 사건을 ‘우치무라 간조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포장하여 전국에 퍼뜨렸다. 우치무라의 이름은 반역자의 대명사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여관 투숙을 거부당할까봐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가명을 써야만 했다. 이 와중에 우치무라는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가 2개월 만에 가까스로 회복은 되었지만 이미 실직자 신세였다. 그 동안 아내 가즈코(加壽子)는 박해 가운데도 잘 견디면서 우치무라를 간호했는데,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같은 병으로 병석에 누워 그 해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치무라는 직장을 잃은 직후 아내까지 잃게 되어 그 비통함이 극에 달했다.

 1893년 그는 <기독교 신도의 위안>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이 있은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이 책의 제 2장에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일고등중학교에서 있었던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책의 제 1장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물론 아내 가즈코의 죽음을 뜻한다.

 ‘불경사건’은 우치무라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일본근대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이라고 규정한 천황에 대해 한 개인이 현세를 초월하는 보편적 존재(하나님)를 근거로 천황의 신성을 부정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관행에 대해 ‘No!’라고 할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준 사건이자, 현세와 지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 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가 엄존함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은 ‘불경사건’ 후 우치무라가 겪은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일궈낸 종교사상의 결정(結晶)이다. 우치무라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은 이 책에서 거의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을 책장이 찢어질 때까지 애독했다는 일본의 소설가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 1875-1962)는 이 책을 일본 현대문학 최고의 사소설(私小說)로 평가하기도 했다.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신앙과 애국

 우치무라 간조가 주관하던 성서연구회에는 당시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유학생 김교신이 출석하고 있었다. 함흥 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3‧1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는 김교신은 일본 유학길에 오를 당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철심(鐵心)을 품고 동해를 건넜노라”고 심경을 술회하고 있다. 일제에 대한 적개심에 차있던 청년 김교신의 눈에 우치무라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 중에 매장된 지 반생여일(半生餘日)에 오히려 그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熱血), 이것이 무엇보다도 힘 있게 나를 끌었었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더면 쏟아 바쳤을 경모(敬慕)의 염(念)을 전혀 저에게 봉정(奉呈)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를 가리켜 ‘발톱 끝에서 머리털 끝까지 애국의 화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1921년 1월부터 7년 동안 우치무라 문하에서 신앙을 배웠다. 1927년 귀국한 김교신은 월간지 <성서조선>의 주필을 맡아 15년 동안 전도 활동을 했으나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으로 제158호(1942년 3월호)를 마지막으로 잡지가 일제에 의해 폐간 조치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한국 및 일본에서 많은 독자들이 검거되었고, 특히 주필 김교신 및 함석헌․송두용․류달영․장기려 등 13인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 1년 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석방된 후 김교신은 흥남의 일본질소비료공업주식회사에서 5천명 한국인 근로자들을 보살피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광복을 넉 달 앞둔 1945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만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선비’로 불리는 김교신은 죽는 날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인 스승에게 기독교 신앙을 배웠다는 이유로 한국인 교역자들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당하곤 했다. 그러나 일제의 단말마적인 압제 하에 천주교는 물론이고, 개신교 교단 대부분이 천황과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을 때,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한국 기독교의 자존심을 세운 것은 김교신을 비롯한 무교회주의자들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철저한 독립신앙을 강조한 우치무라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수수께끼는 곧 풀린다. 일본 기독교가 ‘일본인 특유의 관점에서 해석된 기독교의 진리’여야 하며, ‘어떤 외국인의 중재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본인들이 직접 받은 기독교라야 한다’고 주장한 스승의 뜻을 통찰한 김교신은, 한국 기독교가 ‘한국인 특유의 관점에서 해석된 기독교의 진리’여야 하며, ‘어떤 외국인의 중재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한국인들이 직접 받은 기독교라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진리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 동포를 구원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김교신의 표현대로 하자면, 한국인의 기독교는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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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1995) - [할인행사]
시드니 폴락 감독, 해리슨 포드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영화 <사브리나>는 원래 빌리 와일더 감독이 1954년에 만든 로맨틱 드라마였는데, 1995년 시드니 폴락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험프리 보가트, 윌리엄 홀든, 오드리 헵번 등이 출연한 빌리 와일더의 원작은 두 명의 근사한 남자 중 한명을 선택해야했던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로, 반세기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다가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다시 새롭게 모습을 나타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을 연출한 시드니 폴락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등으로 잘 알려진 헐리웃 톱스타 해리슨 포드와 <가을의 전설> 등으로 급부상한 줄리아 오몬드를 전격 캐스팅하여 한 편의 아름다운 로맨틱 드라마를 완성했다.

 미국 롱아일랜드 북쪽 해안에 자리 잡은 대저택에는 래러비 일가와 많은 하인들이 살고 있다. 롤스로이스 운전기사인 페어차일드의 딸 사브리나(줄리아 오몬드 분)는 래러비 가의 둘째 아들 데이빗(그렉 키니어 분)을 연모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던 중 파리 유학길에 오르게 된 사브리나는 떠나기 직전 데이빗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 사랑의 감정을 밝히지만, 때마침 데이빗 방에 와있던 형 리누스(해리슨 포드 분)가 동생 대신 고백을 듣게 된다. 이에 깜짝 놀란 사브리나는 서둘러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사브리나는 어느덧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고, 그녀는 데이빗과 리누스 사이에서 갈등을 거듭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리누스와 사랑의 해후를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평론가들은 오드리 헵번이 맡았던 사브리나 역을 줄리아 오몬드에게 맡긴 것은 역사상 최악의 캐스팅이라면서 리메이크 작품을 혹평하는 분위기이지만, 나는 ‘각별한 이유’로 원작보다는 리메이크 작품에 마음이 더 쏠린다. 리메이크 작품에서는 사브리나의 아버지 페어차일드가 딸 앞에서 옛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신이 왜 래러비 가의 운전기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드리 헵번이 타이틀 롤을 맡았던 1954년 작에는 이 장면이 없다.)

 그가 직업 선택에서 고려한 조건은 단 한 가지, ‘독서할 시간적 여유’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그는 대개 독서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래러비 가에서 살림집으로 내준 별채에 그가 마련한 서재는 온통 책으로 가득하다. 거부의 자가용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틈만 나면 책을 손에 드는 그의 모습은 낯설고도 신선한 것이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지극히 운전기사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것이 내가 리메이크 <사브리나>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한편으로는 궁금증도 생긴다. 한국 영화에서도 그런 식의 캐릭터 설정이 가능할 수 있을까? 현실감(리얼리티)을 잃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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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 - 첫째 묶음, 풀무학교 홍순명 선생의 이야기 모음집
홍순명 지음 / 부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홍순명 선생의 우리 고전 재창조 작업  

1.


우리는 <파우스트>라고 하면 으레 19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작품을 연상한다. 이 작품을 괴테의 창작인줄로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중세 말기 이래 수많은 작가들이 파우스트를 주제로 다양한 버전의 작품을 썼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괴테의 <파우스트>뿐이다. 괴테의 인생관과 우주관, 종교관에 의해 재구성된 그 <파우스트>만이 영속적인 생명력을 얻고 불멸의 고전이 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오는 것이다.

<파우스트>에 다양한 버전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전설과 민담에도 다양한 이본(異本)이 있다. 예를 들면 <춘향전>의 경우 현재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 무려 70여 종에 달하는 이본이 전하고 있고, <심청전>은 현재 공개된 이본만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이 된다.

이번에 홍순명 선생이 출간한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전 2권)는 심청전, 흥부전, 선녀와 나무꾼(제1권), 홍길동전, 춘향전(제2권)을 새롭게 고쳐 쓴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수많은 이본들이 사소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결같이 봉건적인 낡은 가치관을 담고 있어 의미 있는 차별성을 보기 어려운 반면, 홍순명 선생의 작품은 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과 시대정신에 맞춰 새롭게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본들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새롭다기보다는 실로 ‘환골탈태’라는 말이 적절할 정도이다. 재창조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더욱이 홍순명 선생이 이 작품들에 불어 넣은 사상은 일개 백면서생이 탁자에 앉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위대한 평민’을 모토로 40년 넘도록 충남 홍성의 풀무학교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실천적 교육철학에서 길어 올려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감히 홍순명 선생의 우리 고전 재창조 작업이 괴테의 <파우스트>에 필적할 정도로 한국문학사에서 현격한 차별성을 갖는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2.


<새춘향전>에서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익히는 학문이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공리공론뿐으로 백성들에게 소용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과거를 포기한다. 그리고 전남 강진으로 가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는다.

특이한 것은 <새춘향전>에서 ‘방자’가 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촐랑대는 어릿광대가 아니라 ‘할아범’으로 불리는 관아의 노복으로 등장한다. 비록 천한 신분이나 가슴에 위대한 신앙과 사상을 품은 기독교 사상가이다. 심지어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다산 정약용도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말할 정도이다. 노예 신분으로 고대 로마의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홍순명 선생의 풀무학교가 추구하는 ‘위대한 평민’이란 이런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할아범’의 실명은 기독교 사상가답게 ‘일원’(一源)이다. 이름을 풀면 ‘하나의 근원’이 된다. 남원 부사 변 사또의 악정을 고발하는 괘서를 담벼락에 붙였다가 밀고자의 고발로 옥에 갇힌 그는, 장독(仗毒)으로 죽기 직전 이몽룡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도련님, ……죽는 날은 내가 주님 품안에, 사랑의 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날이구만이라. 죽음 끝에 새 삶이 시작된다면 마다 할 이가 누가 있겠능기요. 그리고 우리 이런 고생은 주님의 고생과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지라우. 우릴 모두 사랑한 것밖에 아무 죄도 없는 귀한 그런 분의 고생의 한 귀퉁이라도 참여하게 하니 주님 고맙지라우.”

이몽룡이 ‘할아범’ 일원의 무덤 앞에서 춘향의 손을 꼭 잡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차별이나 계급 없는 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 <새춘향전>의 마지막 장면이다.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야말로 모든 바람직한 일이 이루어질 출발점이고 귀착점이기 때문이다. 몽롱은 세상이 바로 되려면 자기 자신부터 앞장서서 그 새로운 길을 찾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새홍길동전>은 임진왜란 무렵을 시대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관군을 추적을 피해 산속으로 은신한 길동 일행은 세상에서 행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실천한다. 귀틀집을 짓고, 제각기 가진 재주대로 숯을 굽고, 호미와 낫을 만들고, 옹기를 짓고, 벼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길동 은 임진왜란에 참가했다가 본대에서 벗어난 일본 군인 고쇼(高紹) 형제를 만난다. (나중에 고쇼의 동생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뜻밖에도 두 사람은 일본에 사는 백제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침략자 도요토미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조선 땅에 흘러들어와 숨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한다. 일본이 군인 세상이 되면서 중국, 조선, 일본의 동아시아 3국 역시  문화와 교역이 아닌 전쟁과 침략의 관계로 변했다는 것이다. 비록 강제 동원된 것이기는 하나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임진왜란에 참가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털어놓는다.

일본인 고쇼가 평화주의적인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일본 불교의 한 갈래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이 컸다. 그것은 전란과 기근, 가난과 무지 속에 힘겹게 사는 민중에게 교의나 계율 같은, 스스로를 닦는 수양이나 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처를 믿고 그 이름을 외면 구원된다는 타력(他力)의 신앙을 가르치는 불교 교파였다.

길동 일행과 고쇼 남매는 전란이 한창인 시기에 산속에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그들은 관군의 계속된 추적에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일본으로 함께 떠나면서 고쇼 남매와 길동 일행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참, 이렇게 만나 함께 지내고 고생한 인연이 기가 막힌 것 같소. 앞으로도 우리 인연이 대를 두고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오.”


“정말, 우리가 이 싸움판에서 형제처럼 지냈다는 게 꿈만 같아.”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감정적 앙금이 적지 않은 두 나라 국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대화가 아닌가?


4.


<새 심청전>에서 심청이 태어난 곳은 마한의 남대성주(南大城州), 그러니까 지금의 전남 곡성이다. 청이의 아버지 심학규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해서, 동네 아이들에게 중국의 초기 경전과 의학, 농사 같은 기초학문을 가르쳤다. 심학규는 죽은 친구의 아들 가성을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면서, 가성이 장성하면 데릴사위로 삼을 생각을 한다.

쇠가 산출되는 덕분에 중국과 교역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했던 그 평화스런 골짜기에 어느 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고구려와 싸우면서 쇠가 필요해진 백제의 군대가 심청의 마을로 몰려온 것이다.

주둔군의 횡포가 심해지자, 학규는 군관에게 항의한다. 술 취한 한 군인이 학규를 대장간의 숯불 속으로 떠밀어버리고, 눈이 까맣게 짓물러진 그는 더 이상 앞을 못 보게 된다. 분이 삭지 않은 백제군은 청이까지 중국 상인들에게 팔아넘겨 버린다. 하지만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면서도 군인들과 상인들을 위해 기도한다.

물에 빠진 심청은 한 중국 어부의 손에 목숨을 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상꿔공(相國公)이란 인품 좋고 학식 있는 중국의 향촌 지도자를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고향에 두고 온 가성을 생각했지만 먼 타향에서 가성의 생사 확인조차 할 수 없었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상꿔공과 혼인을 하여 행복하게 살면서도 심청은 고국의 아버지와 고향산천을 잊을 수 없었다. 심청은 진흙으로 관음상을 빚어 동네 옹기 가마에서 구웠다. 세손가락 크기의 좌상이었다. 관음상 뒤에 심청은 고향과 지금 살고 있는 곳,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글씨를 새겼다. 심청은 해마다 자기가 파도에 실려 온 날이 되면 관음상을 백 개씩 만들어 바다로 띄워 보냈다.

이렇게 몇 해가 흘렀을까. 심청의 고향 부근 바닷가에 사는 성덕(聖德)이란 처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으러 중국에 간 오빠 현도(顯道)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심청이 흘려보낸 관음상을 발견한다. 성덕은 관음상을 움푹 팬 굴속에 안치하고 오빠가 도를 깨치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빈다.

한편 가성은 백제군에 끌려가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 해변 초소에서 근무하다가 심청이 바다에 흘려보낸 관음상을 발견한다. 관음상 뒤에 쓰인 심청의 소식을 읽은 그는 그길로 근무지를 이탈해 심청을 찾아 떠난다. 몇 해가 지난 후 심청의 남편 상꿔공은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동쪽 나라에서 온 젊은이가 준 인삼을 먹고 병석에서 일어난다.

그 젊은이는 바로 가성이었다. 가성은 주둔지에서 도망친 후 천이백리 길을 걸어 천신만고 끝에 심청의 마을에 도달했으나 심청은 이미 결혼하여 두 남매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가성은 여러 해 모진 고생을 하며 심청의 마을까지 오는 동안, 품에 간직한 관음상과 심청을 겹쳐서 대했다. 그러나 이제 심청에 대한 마음을 접고 오직 자비로운 관음보살 앞에 기도할 뿐이었다. 상꿔공 역시 이 모든 사정을 다 헤아려 알게 되었다.

상꿔공은 생명을 구해준 가성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리고 친정아버지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청을 생각하여 아들과 함께 고향 길에 오르도록 주선해 주었다. 때마침 고향 가는 배편에는 동국 마한 땅 출신의 한 스님이 타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현도였다. 한 배를 탄 심청․가성․현도 세 사람은 고향 땅에 상륙한 후 먼저 현도 집에 들렀다.

현도와 성덕 두 남매의 감격적인 해후가 있은 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네 사람의 인연이 참으로 기이했다. 성덕 처녀는 심청이 보낸 관음상을 고향 바다에서 건져 가까이 모시며 오빠의 무사 귀환을 축수했고, 가성은 중국 땅에서 그 관음상을 발견하고 심청이 살던 곳으로 달려갔다. 현도는 동생이 축수하던 그 관음상을 만든 사람(심청), 성덕과 같이 우연히 바닷가에서 관음상을 발견한 사람(가성)과 한 배를 타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같은 신앙의 인연으로 네 사람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한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5.


<새춘향전>, <새홍길동전>, <새심청전>에서 우리는 몇 가지 공통된 주제들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참신한 생각을 품고 행동에 뛰어들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이 종교 신앙이었다는 점이다. <새춘향전>에서는 ‘일원’의 기독교가, <새홍길동전>에서는 ‘고쇼’의 정토종이, 그리고 <새심청전>에서는 ‘심청’, ‘현도’ 등의 관음 신앙이 그 역할을 했는데, 이 모든 종교들은 교리나 형식에 얽매어 구름 속 진리만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게 해주는 산 신앙이었다.

다음으로 <새홍길동전>과 <새심청전>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삼국의 선린과 우애를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외교용어에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도 있지만 국가간에는 가까운 곳일수록 적대적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대부분 정치 지배자의 야욕에 의해 빚어진 왜곡된 감정이기 십상이다. 홍순명 선생이 재창조한 고전들은 우리가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평화주의를 배울 필요가 있으며, 이웃 나라들과의 평화로운 사귐은 정치 지배자들이 아닌 평민들의 자연에 뿌리내린 건실한 삶을 밑거름으로 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전편에 걸쳐 누누이 강조한다.

보수적인 독자들 중에는 홍순명 선생의 이러한 고전 재창조 작업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의 시제(時制)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전통이란 결코 박제된 것이 아니다.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며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품고 있는 이상과 그 실천은 작은 실개천이 모여 커다란 강을 이루듯이 새로운 전통을 형성한다.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전통을 앞장서 만들어나가고 있는 홍순명 선생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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