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전집 1 - 인생론
노평구 엮음 / 부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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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1927년부터 일제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15년 동안 발간했던 『성서조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선생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제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한 것은 오직 “성서의 진리” 위에 “조선”을 세우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

선생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로 만들 것을 목표로 삼아,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를 추구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라고 말한 선생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접하게 된다.

선생은 1942년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글 <조와(弔蛙)>가 민족정신의 고취했다는 이유로, 신앙 동지들과 함께 만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다. 당시 취조를 맡은 일본 경찰들이 한 말은,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그가 일생 추구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중략)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 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후일 김교신 선생은 일본 경찰의 힐난에 대해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하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선생은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7월부터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서 5천 명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지와 깨우침을 위해 진력했다. 끝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강제 징용된 동포들에게 기독교의 참된 신앙 정신과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돌연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1945년 4월 25일 작고했다. 만 44년의 길지 않은 생애였다.

선생이 타계한 후 『성서조선』에 수록된 선생의 글은, 선생의 제자인 노평구 선생의 손으로 편집되어, 1975년에 『김교신 전집』으로 완간되었다. 김교신 선생의 신앙과 삶이 고스란히 담긴 『김교신 전집』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이후 한국 기독교의 고전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수많은 진실한 가슴에 깊은 공명과 파장을 일으켰다.

곡학아세(曲學阿世)와 가치전도(價値顚倒)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을 위해 진리와 양심을 내팽개치기가 다반사인 한국 현실에서, 김교신은 과연 민족의 사표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노평구 편집의 『김교신 전집』은 독자들로부터 예약 주문을 받아 제작된 관계로 곧 물량이 소진되었고, 유감스럽게도 일반 독자들로서는 좀처럼 다시 구해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다행히 이번에 도서출판 부키에 의해 말끔히 새 단장을 하여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는 등 외형상의 수정이 가해졌고, 『성서조선』 원문과 일일이 대조함으로써 기존의『김교신 전집』에 있었던 탈자, 오자를 크게 바로잡았다.

편집진은 『김교신 전집』을 명실상부한 현대의 고전으로 만들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 잘 사용되지 않는 어려운 낱말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뜻풀이를 붙였고, 한문 문장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그 의미와 출전을 밝히고자 했다. 짐작컨대 앞으로 한 세대 동안 김교신 선생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이번에 나온 부키 판 『김교신 전집』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서구의 선교사가 전해 준 서구적 신앙을 되뇌고 서구적 찬송을 소리쳐 부르며, 서구적 교회와 교파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늘어지면서 고집스럽게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키워오는 동안, 김교신 선생은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는 노력으로 일관했다.1930년대 한국교회가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흔들리며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합류하던 그 때, 한국 기독교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준 인물은 김교신 선생이었다.

김교신 선생은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김교신 선생을 감리교의 윤치호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단박에 드러난다. 두 사람은 실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길을 걸었다. 윤치호가 기독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로 친일로 귀착된 “좌절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반면,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바람직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제자였던 선생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면서도 친일로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조선 사람으로 남았던 민족주의자였으며,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可見的)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던 종교개혁적 신앙인이었다.

중세 말기의 타락한 가톨릭 교회를 연상케 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세속화가 심각한 시점에서, 『김교신 전집』의 발간은 초대 기독교와 종교개혁 시대의 순수하고 철저한 신앙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소중한 기회를 준다. 한국 교회를 짓누르는 거대한 대리석 성전의 무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김교신 전집』을 읽어야 할 것이다.

김교신 선생은 이제 가고 없다. 그러나 『김교신 전집』과 더불어, 선생의 신앙과 삶은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3백년, 5백년 후에 동지를 구하겠노라”고 한 김교신 선생의 뜻이, 새 모습으로 간행된 『김교신 전집』과 더불어 젊은 세대들 사이에 널리 펼쳐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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