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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하면서 들었던 노래는 조니 미첼의 시디였는데 올린 것은 그의 친구들 노래.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68760

 

 

 

1.       텍스트에 오타가 하나 있었다. “My approach is…than Slote.” 인데 “that” 으로 옮겨서 올렸다. 번역문의 경우와 달리 본문 텍스트의 오타는 어느 부분에서 오타가 났다고만 기록을 남기고 교정부호 달지 않고 바로 고쳐 갈 생각이다.

 

2.       No one actually in moral philosophy, as I am and the complainants are, minds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의 문장의 경우, as 이하를 확신있게 옮기지 못할 것 같아서 시간을 들여 생각했지만 아직도 좀 명확치가 않다. 직관적으로 들던 생각대로 옮기기는 했고, 문맥이 이상하지는 않은데 혹시 오역은 아닌가 아직도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

 

3.       그 아래의 문장들은 옮기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고, 다만 몇 가지-긴 문장을 쪼개서 번역했다던가- 내가 정한 범위 내에서의 변형을 줘봤다. 지난 작업부터 부득불한 경우가 아니라면, 직역투를 지켜보기로 했는데 얼핏 의역보다 어색하게 읽힐지도 모르지만, 일관성을 지키겠다는 내 생각과 실제 작업이 같을 수 있어서 좋고, 옮길 때 어수선하거나 헛갈리는 느낌이 덜하니 편하고, 사전들과 웹검색을 성심껏 하다보면 정확성을 기하면서도 뜻이 부드럽게 통하는 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고 해서 이 점에 더 의의를 두고 진행하려고 한다.

 

4.       Armed with 무엇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전에 썼던 말인데, 이번에는 “people armed with patience. =인내력이 강한 사람들의 의미로 옮겼다. 뻔한 말들로만 연상하면서 읽고 생각했던 표현들 하나하나가 적합한 우리말 찾기를 하면서 확장되는 걸 느껴 보는 것이 번역의 묘미고 동시에 괴로움이겠구나 하는 것을 체험해 본 것 같다. ‘government house’ 란 말은 사전적 의미로 썼을 것 같지 않다는 예감에 웹 문서 검색을 했고, Bernard Williams 가 이름붙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5.       Slote 의 책 From Morality to Virtue 는 내가 갖고 있는 책이기도 한데,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덕의 부활이다. 역자는 역자 서문 첫 머리에, “[덕의 부활] 은 마이클 슬롯의 From Morality to Virtue 를 완역한 것이다. 영어 제목에 해당하는 우리말 제목은 [도덕성에서 덕으로] 가 될 듯하다. 그러나 역자는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 제목이 이 책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책제목을 덕의 부활로 정했다. 정독한다면 이 제목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책을 정독하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 설명으로도 왜 역자가 책의 제목을 바꾸려고 했는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다만 그럴 경우, 책의 원저자와 의사소통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은데

 

6.       “Although there are lots of articles, there is, as I write, only one book which explores…” 의 문장, 거기서 그만 아차, 하고 말라붙었다. 저 위의 그림은 이 때 심정을 재현한 듯하길래 옮겨 본 것. 처음엔 as I write 를 양보절로 놓고 옮겼다. 그런데 그리되면 슬롯의 책 한 권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말이 안되기 때문에 당연히 주의를 모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 뒤 찬찬히 보니 여기서의 as I write as I say, as it were 와 같은 표현에 속하는 말, 해석을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말하자면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러자 높은 전류에 선 끊어진 전구처럼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  왜냐면, 두 번째 번역문에서 And now in the latest collections (as I write, in 1998) as I write 내가 썼듯이 로 옮겼기 때문에. 평소, as it were, so to speak, as I say, 혹은 say,  등에는 익숙했으나 as I write 는 몰랐으니 눈에 잘 안 띄였겠고, 그러니 더욱 알 기회가 적었던 것인지 잘 눈에 뜨이지 않았던 표현이었다.

 

7.       이렇게 첫 번째 오역이 잡혔다. 아마 앞으로 또 생기게 되겠지. 올린 후의 수정이 불필요하도록 (질과 솜씨의 수정에 관해서가 아니라) 가급적 미리, 그리고 충분히 검토하고 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수와 오역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적어도 이 책에 오역은 없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번역이란 거의 불가능하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8.       끝문장. 우선 doubtless probably certainly 의 중간쯤에서 번역했고, espousing 에 대해 이전까지는 늘 지지/찬성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무엇을 받아들이다, 채택하다의 의미까지 기억하게 돼서 유익했다. 유익함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 국어사전이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사전을 도로 찾거나 새로 구할 동안 번역의 점검을 위해 이용하려고 했던 국립국어원의 한국어사전 검색 및 확인 페이지에 익숙학 되어서 기쁘다. 주위에 나처럼 이 사이트를 잘 이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권해주고 싶다.

 

9.       마지막. Ought to 의 의미는 순간 should 의 뜻으로만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뜻이 통하지 않았다면 금새 알아채고 말았을 일인데, 그렇지 않고 현재 덕 윤리학의 여러 버전의 책들이 준비중이다. 어서 책이 나와서 의무론과 공리주의만큼 덕 윤리학이 철학자들에게 익숙해질 수 있게끔 되어야 하겠다해야만 한다should 의 의미로도 어느 정도 뜻이 통하는 것 같아서 하마트면 그렇게 옮길 뻔했다.

 

10.    작업 시간은 이번에도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          해당 번역문에서는 수정기호로 가운데 금을 긋고, 그 아래 맞는 번역문을 옮기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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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7, 8 번째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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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ason I think people want us to do it is simply unfamiliarity. No one actually in moral philosophy, as I am and the complainants are, minds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being introduced by loose slogans because we all learnt the terms when we were students and have been familiar with them ever since, like ‘rationalism’ and ‘empiricism’. We use the slogans in our lectures but we know how to go beyond them, introducing the next philosophical generation of students to, for example, rule and ‘government house’ variants once we have told them about act utilitarianism. Armed with a sense of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familiar approaches, we confidently identify utilitarian strands in a particular deontologist’s thought and vice versa. But, apart from the people who actually espouse virtue ethics, as I do, only a few can do the same with a virtue approach.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하나는, 단순히  윤리학이 주는 생소함에 있다. 나도,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상 도덕 철학 분야의 어느 누구도 의무론과 공리주의가 막연한 표어들로 소개되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학생이었을 용어들을 배웠고 그때부터, 마치 합리주의 경험론처럼 그것들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의에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만일 우리가 전에 다음 세대의 철학자들인 학생들에게 행위 공리주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면, 예컨대 규칙 공리주의와 정부 공리주의라는 다른 이론들을 소개함으로써 말들을 어떻게 표어 수준 이상으로 다룰 있는 지를 알고 있다. 익숙한 접근법의 차이에 관한 이해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있게 어느 특정한 의무론자의 의견에서 공리주의적 요소를 알아내고, 그것은 역도 같다. 그러나, 나처럼 윤리학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면, 덕의 접근에 대해서는 겨우 몇몇만이 그와 같은 일을 있다.    . 

 

 

I doubt that any short answer to ‘What is virtue ethics?’ would provide a satisfactory solution. What is needed is a familiarity with virtue ethics comparable to that which everyone in the profession has with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But this is not easy to acquire from the existing literature. Although there are lots of articles, there is, as I write, only one book which explores virtue ethics systematically and at length, namely Michael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1992). What I offer is another one, which addresses different issues, in different ways. My approach is more concerned with details, examples, and qualifications than Slote’s and, in being thereby less abstract, is more committed to exploring a particular version of virtue ethics. Books espousing other versions are doubtless in the pipeline and pretty soon it ought to be the case that everyone in moral philosophy is as familiar with ‘the’ virtue ethics approach as they are with the other two and stops worrying about definitions. 

 

나는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대한 어떤 짧은 답변이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요구되는 것은 철학의 전문직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의무론과 공리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의 익숙함을 윤리학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문헌에서 그런 목표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많은 목록에도 불구하고, 윤리학을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탐구하는 책은, 말하자면, 마이클 슬롯의 도덕성에서 덕으로 From Morality to Virtue(1992)’  뿐이다. 내가 시도하려는 것은 그와 다르다. 나는 다른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나는 슬롯의 접근보다 상세한 기술과 예와 조건들에 많은 관심을 두는 방식을 취하려고 하며, 때문에 슬롯의 책보다 추상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윤리학 이론을 탐구하는데 힘을 쏟으려 한다. 다른 해석을 채택한 책들이 준비 단계에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고, 그래서 도덕철학 내의 모두가 다른 이론만큼 윤리학을 알게 되고 정의에 관한 고민을 그치게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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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Indeed, just as I was writing this introduction, I found Linda Zagzebski’s Virtues of the Mind [1996], whose second part is substantial enough to count as a book on virtue ethics in its own right.

 

내가 책의 서론을 쓰고 있는 동안, Zagzebski Virtues of the Mind [1996]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책의 2부는 책을 윤리학 책에 포함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을만큼 탄탄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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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ason I think people want us to do it is simply unfamiliarity. No one actually in moral philosophy, as I am and the complainants are, minds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being introduced by loose slogans because we all learnt the terms when we were students and have been familiar with them ever since, like ‘rationalism’ and ‘empiricism’. We use the slogans in our lectures but we know how to go beyond them, introducing the next philosophical generation of students to, for example, rule and ‘government house’ variants once we have told them about act utilitarianism. Armed with a sense of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familiar approaches, we confidently identify utilitarian strands in a particular deontologist’s thought and vice versa. But, apart from the people who actually espouse virtue ethics, as I do, only a few can do the same with a virtue approach. 

 

 

I doubt that any short answer to ‘What is virtue ethics?’ would provide a satisfactory solution. What is needed is a familiarity with virtue ethics comparable to that which everyone in the profession has with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But this is not easy to acquire from the existing literature. Although there are lots of articles, there is, as I write, only one book which explores virtue ethics systematically and at length, namely Michael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1992). What I offer is another one, which addresses different issues, in different ways. My approach is more concerned with details, examples, and qualifications that Slote’s and, in being thereby less abstract, is more committed to exploring a particular version of virtue ethics. Books espousing other versions are doubtless in the pipeline[7] and pretty soon it ought to be the case that everyone in moral philosophy is as familiar with ‘the’ virtue ethics approach as they are with the other two and stops worrying about defin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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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Indeed, just as I was writing this introduction, I found Linda Zagzebski’s Virtues of the Mind [1996], whose second part is substantial enough to count as a book on virtue ethics in its own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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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에서 Korsgaard 찾다가 본 Moral philosophy books. 장난으로는 The Four 라고 이름붙여 봄. 

1. nicomachean ethics - Aristotle
2. the sources of normativity - Korsgaard
3. groundwork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 Kant
4. on virtue ethics - Hurst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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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에 들었던 곡은http://www.aladin.co.kr/blog/mypaper/767969 

§          어제 영화 오세암을 보고서 적었던 아주 짧은 영화후기. 하얀책 옮겨가는 시간 덕분에 같은 영화라도 조금은 다르게, 아래의 글에 적은 그 의미로 보였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여기서 썼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67441.

 

 

    

 

1.       먼저 이번 작업을 하다 발견한 정정사항 하나. 갖고 있는 철학사 책을 보다가 Immanuel Kant 이마누엘 칸트로 되어 있는 것을 봤다. 나는 아마도 첫 두 번의 번역문에서 임마누엘 칸트로 옮긴 것 같다. 확인을 위해 웹문서 검색을 했더니, 위키 백과사전에 임마누엘 칸트에서 이마누엘 칸트 2005년 몇 월에 옮겨왔음 이란 알림이 있었다. 외국인 인명을 우리말로 옮기는 원칙이 달라졌거나, 내부에서 그 이름으로 통일하자고 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확인을 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앞으로 앞서 했던 번역문에서 정정사항이 있을 때 어떡할 것인지를 생각해 봤다. 1) 번역한 벌은 그대로 두고 교정부호를 써서 그 위치만 표시한 뒤, 교정할 내용은 지금과 같이 후기로 기록해 가는 , 2) 색을 달리 한다던가, 본문 아래 따로 주를 단다던가 해서 번역문에 함께 적어가는 식. 나는 1) 이 더 은 것 같다. 왜냐하면, 난 지금은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아주 잘된 번역을 해 보고 싶어서 작업 중인 것이 니니까. 그리고, 한 번 손을 대면 자꾸 고치게 될 것 같고, 그럼 더더군다나 내 처음 마음과 어긋날 것 으니까.               

 

 

2.       이번 번역은 첫 문단이 어려웠다. 각 문장마다 한 가지씩 석연찮은 부분들이 있었을만큼. 먼저, 첫 문장에서는 it  이 받는 말 때문에 실수를 할 뻔했다. 처음엔 virtue ethics로 받았는데, 원문을 다시 보니, the emergence of virtue ethics 로 해야 문법적으로 맞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그래야 reach to it의 의미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 같았고. 그런 결정 뒤에도 문제는 남았는데 it, its it 반복해서 나오는 말을 중복감 없이 옮긴다는 것이 시간도 들었지만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좀 확실치 않았다. 욕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기본이다 싶기도 하고  

 

3.       맨 끝에 적어 보려고 하는데, ‘직역과 의역의 균형과 옮기는 이인 나의 주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내내 생각하면서,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느껴가야 할 의문이겠다.   

 

4.       계속. ‘등장과 출현’ emergence 란 말을 처음에는 등장으로 옮겼고, 혹시 해서 온라인 국어사전들을 보다가 출현으로 바꿨다. (반복을 피하려고 한 번 쓰기는 했지만) 등장은 사람이 어딘가로, 출현은 사물/현상/사람을 포함한 그밖의 것들이 나타낸다는 설명을 따랐는데, 그러면서 내게 영한, 한영, 영영은 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해서 손에 쥐고 펴 볼 국어사전 이 없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다음 달이면 마칠 일인데, 어디서 빌려야겠다  

 

5.       the revived interest in Kant’s Doctrine of Virtue, the elaboration of character-based versions of Kantianism and utilitarianism, 이 구절이 말로 풀리지가 않아서 참 어려웠다. 특히 elaboration of 이하의 구는 몇 번이나 사전을 열고닫았는지 모른다. 직역은 너무 어색하고, 의역을 하기엔 너무 장황하고, 게다가 개념도 좀 막연하고. 아마도 elaboration 에 대한 어감이 분명히 와닿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대체로 영한사전에서는 elaboration =정교화, 상세화, 노작 등의 의미로 옮겨놨고 웹문서들도 그 뜻으로 적어놨던데, 그것으로는 아무래도 뜻이 통하지 않았다. 노작이란 말 뜻이 제일 나았지만 여전히 어색해서 큰 영 사전을 보다 develop and expand 의 의미를 보고 그거다 싶어서 옮겼다. 그동안 내 전공공부의 아주 은 문헌에서 elaboration 이란 말을 봤고, 자동적으로 세련화, 정교화, 상세화 등을 떠올렸는데 음부터는 우선은 발전과 확대라는 포괄적인 의미에서부터 맥락에 맞게 좁혀 들어야겠다는 나름의 요령을 얻었다. 동시에, 머리속에서 알맞는 우리말 대안이 안   떠오른다고 해서 영한사전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고, 히려 여러 영영사전을 보면서 답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도.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내 머리가 연해지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걸리겠다는, 좋은 자극이자 담담한 인정 그 둘도 함께   

      

6.       피터 싱어의 how are we to live?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의 우리말 제목으로 나온 줄 알고 있는데, 이미 책이 나와 있다고 꼭 그 제목을 따라야만 하는 것 같지 않았고, 내가 만일 그 책의 존재를 모르고 안다한들 내용을 모른다면 내가 옮긴 이상의 제목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 내가 받은 어감대로 옮겼다   

 

7.       A recent collection has- 이하의 문장에서 꼬였다. 여러 번 생각해서 오히려 헛갈리고, 결국 거의 완전직역처럼 된 것 같다. A recent collection 은 처음에는 문헌록, 문헌집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옮겼고 다시 보고나서, 그 앞선 문장과의 연결이 중요하다 싶어 풀어 썼다 

 

8.       첫 문단의 어려움에 비하면 두 번째 문단은 상대적으로 옮기기가 나았다. Is bothered by 의 의미를 강하게 할 것인가 약하게 할 것인가가 애매했는데, 직관적으로 들었던 의미대로 (대신 영영사전과 동의어 사전에서 trouble/worry/심히 걱정스러운의 뜻을 확인은 하고서) 옮겼다. 

 

9.       두 번째 문단의 disjunctive 에서 다시 한 번 멈춤을 했다. ‘분리적인, 분열적인, 이접성의의 세 대안을 놓고 따지다가 혹시나 해서 [철학, disjunctive] 의 열쇳말로 검색을 했을 때, ‘화이트헤드--이산적의 예가 여러 개 나온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또 논리학 수업 들었을 때 바로 이 이접의 의미로 설명들었던 것을 따라, 대신 한자를 달아서 옮겼다. 

 

      이때 내가 당연히 여기고 쉽게 옮긴 말에 철학이란 분야에서 통용되는 고유의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각이 새삼스럽지 않게 들었고, 내가 하는 작업의 ‘오역’ 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래서 가분했다. 내가 문법적으로, 사전적으로 아무리 말을 고스란히 잘 옮겨도 개념의 이동을 실수하거나 패한다면, 그것은 나의 의도도 바람도 아니겠지만 어쩔 수 없는 내 한계가 낳는 오역이겠다 싶어서. 이려고 노력할테고 그러기를 바라고도 있지만…아무튼, 번역과 오역과 텍스트의 이해와 오해에 대해서 체적으로 느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보다 큰 공부가 없을 것 같다. 

      

10.    3에서 적었지만, 앞으로 계속 진행될 의문 하나는 직역과 의역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일 때 좋은가인 것 같다. 둘 중 하나는 썩 좋은 가정이 아닌 것 같고, 예를 들면 통일성이나 일관성에 대한 곰곰한 생각들이 좀 들었다. 쓰면서 보니, 아직은 나만의 사례나 정당화의 근거가 빈약해서 구호로만 품는 것이 좋겠다. 의역이건 직역이건 일간되고 균형감 있게 옮겼으면 좋겠다. 그걸 염두에 두어야겠다...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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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어지는 5, 6 번째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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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ed, one interesting upshot of the emergence of virtue ethics is that some deontologists and utilitarians have reached to it by recognizing its importance and seeking to address it within the terms of their own theories. Hence, for example, the revived interest in Kant’s Doctrine of Virtue, the elaboration of character-based versions of Kantianism and utilitarianism, and the utilitarian Peter Singer’s latest book on ‘How are we to live?'[3]. This is currently resulting in some very exciting work, particularly in the area of Aristotelian and Kantian scholarship. A recent collection has McDowell bringing Aristotle closer to Kant, and Herman and Korsgaard bringing Kant closer to Aristotole[4]. I have not yet come across to interpret Mill in Aristotelian ways but I suspect it will happen any day[5].

 

실제로, 윤리학의 출현이 낳은 하나의 흥미로운 결과는, 일부 의무론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이 그것의 등장이 갖는 의의를 인정하고, 그들의 고유한 이론 용어로 검토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윤리학의 출현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갔다는 것이다. 다시 활기를 칸트의 덕의 원리 Doctrine of Virtue 관한 관심, 성품을 기반으로 해석된 칸트주의와 공리주의 이론의 발전, 그리고 공리주의자 피터 싱어 Peter Singer 최근의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 등이 예다. 이러한 결과, 현재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연구 분야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 집적된 문헌들은 맥도웰 McDowell 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칸트에게 보다 가까워지게 하도록, 그리고 헤르만 Herman 코르스고어Korsgaard 칸트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다 가까워지게 하도록 이끌고 있다. 나는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석된 Mill 발견하지 못했으나, 언제든 그리 되리라 생각한다.

 

 

This has meant that the lines of demarcation between the three approaches have become blurred. Describing virtue ethics loosely as an approach which ‘emphasizing the virtues’ will no longer serve to distinguish it. By the same token, of course,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are no longer perspicuously identified by describing them as emphasizing rules or consequences in contrast to character[6]. No one, as far as I know, is bothered by the fact that there are no longer satisfactory short answers to the questions ‘What is deontology?’ and ‘What is utilitarianism?’, but currently, at least some philosophers seem bothered by the fact that we virtue ethicists cannot come up with one to answer ‘What is virtue ethics?’. The demand that virtue ethics, unlike the other two approaches, should ba able to state its position succinctly, in terms both sufficiently broad (or disjunctive?) to get all virtue ethicists in and sufficiently tight to keep all deontologists and utilitarians out, seems a bit excessive. Why should anyone expect us, uniquely, to be able to do it?

 

이것은 접근법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졌음을 의미한다. 윤리학을 덕을 강조하는하나의 방법으로서 느슨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상 그것을 특징짓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이유로, 의무론과 공리주의가 무엇인가는 성품과 대비되는 규칙이나 결과를 강조하는 이론이라는 설명으로는 이상 명쾌한 확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 어느 누구도 의무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만족스러운 짧은 답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곤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적어도 일부 철학자들은 우리들 윤리학자들이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하나를 제시할 없다는 사실 때문에 심히 걱정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다른 방식과 달리, 윤리학이 모든 윤리학자들을 수용할만큼 충분히 포괄적이면서 (혹은 이접 적이면서도?) 모든 의무론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을 배제시킬만큼 협소한 차원에서 자기 견해를 간략히 서술할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다소 지나쳐 보인다. 유독 우리에게만 그렇게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어야 하는가? 

 


 

[3] O.O’Neil, ‘Kant After Virtue’(1984); R.B. Louden, ‘Kant’s Virtue Ethics’ (1986); R. Crisp, ‘Utilitarianism and the Life of Virtue’(1992); J. Driver, ‘The Virtues and Human nature’ (1996); B.Herman, The Practice of Moral Judgement (1993); M. Baron, Kantian Ethics Almost Without Apology (1995); Peter Singer, How Are we to Live? (1996) 

[4] J.McDowell, ‘Deliberation and Moral Development in Aristotle’s Ethics’; B. Herman, ‘Making Room for Character’; Christine Korsgaard, ‘From Duty and for the Skae of the Noble: Kant and Aristotle on Morally Good Action’, all in S. Engstrom and J. Whiting (eds.), Aristotle, Kant and the Stoics (1996). See also Stephen Hudson, ‘What is Morality all About?’ (1990) 

[5] See the notes to ch. 2 of R. Crisp (ed.), Utilitarianism (1998) 

     크리스프의 공리주의(1998) 2 장의 주를

[6]Three excellent recent survey articles on modern virtue ethics all constantly qualify the usual slogans, pointing out ways in which new developments in utilitarianism and deontology have subverted them. See G.V. Trianosky, ‘What is Virtue Ethics all About?’ (1990), Justin Oakley, ‘Varieties of Virtue Ethics’ (1996); and Daniel Statman, ‘Introduction to Virtue Ethics’ (1997).

근대 윤리학에 관한 최근의 개의 뛰어난 논문들 모두는 공리주의와 의무론 내부의 새로운 이론적 발전이 이론들을 전복시켜온 방식을 지적하면서,  통례적 표어의 사용을 계속 제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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