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달리 작업 도중에 노래를 떠올릴 것 같지 않아서, 나에게는 묘하게도 수요일과 화요일이 교차되는 이미지를 주던 노래를 올렸는데, 옮기면서 뭔가 찾으려고 Aristotelian 로 검색했을 때 본 Aristotelian cosmology 라는 그림에서 클라투를 연상했다. 노래목록을 보다가 처음 들어보고 본문에 나온 크리스틴과 겹치는 곡이라서 그것으로 올렸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3760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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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어려워서였다기보다 앞으로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지금까지에 비하면 잡념도 사이사이 있었고 마음도 조금 처지고 무거웠던, 그래서 약간 (사서) 외로움도 느꼈던 작업이었다.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이번 본문에 거의 매 줄마다 나오던 ‘Aristotelian’ 이라는 말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대상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거리감과 그것을 닮은 생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러가지를 생각했다. 가장 먼저는, 몇 번의 수업에서 들었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비롯한 몇 권의 책에서, 웹에서, 또는 그밖의 경로로 접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지금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에 대한 점검이었다. 그 생각은 단박에 나를 한숨짓게 했지만 동시에, 이번 작업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적어도 어느 한 부분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그 너머, 그 안쪽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집중하며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오히려 행운이 아닌가 하는 긍정의 마음을 주었다. 그리고 이번 본문은 나에 대한 자리매김을 잘 상상하게 해 주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저자의 말을 비유해 본다면, ‘정통한 이가 베푸는 배려의 햇살 아래에 있는 독자의 자리가 맞고 그래서 저자의 생각을 다른 언어로 옮겨 푸는 그림자의 자리는 아닌 것이었다.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런 생각 자체가 새로이 준 것은 없었다. 다만, 비록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번 일이 나의 앞으로의 시간에 많은 의미로 남을 것 같다는 느낌만은 더 확실해 진 것 같다. 잘 모르는 일을 하는 사람답게 조심하고 걱정하고, 힘들어 할 땐 힘들어 하되, 끝도 한계도 분명한 이 일이 오히려 조금씩 어떤 의미를 띄어가는 것 같은 은근함을 충분히 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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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작업과 관련해서 정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While virtue ethics was not generally recognized and was being dismissed, I think that was the right tactic, and one powerfully pursued in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점차 밀려나고 있는 중이었지만, 나는 그랬던 것이 올바른 전술이었다고 생각하고, 슬롯 Slote 도덕성에서 덕으로From Morality to Virtue 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전에 옮긴 내용이고 그때 본문의 그랬던 것이에 대한 근거를 달았었는데, 하루 지나서 허공에 대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아무래도 문법상 virtue ethics 가 나와 있는데 그 말 대신 그 앞의 문장전체를 that으로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같았다. 기술적으로는 그랬던 것이라는 표현을 그것이라고만 바꾸면 앞의 해석이건 지금의 판단이건 아무 것도 반영하지 않아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히 하고 싶어서 앞으로 다시 바꿀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고치고 싶다. , 나는 예전에 매우 전투적이었고 덕 윤리학의 최고성을 알리고자 열심이었다. 그러나 덕윤리학은 실제로 잘 인정받지 못했고 퇴거당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덕 윤리학은 (윤리의 제 문제를 다루는) 옳은 전술이라 생각하며, 슬롯이 자신의 책에서 왜 그러한가를(덕 윤리학의 강점과 의미를)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로 바꾸려고 한다. 헛갈렸던 이유를 다시 잘 보니까 I think it was the right tactic에서 나는 덕 윤리학을 굳이 was 라는 과거 시제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점을 마지막 근거삼아 예전의 내(저자)가 취한 전술적 태도가 옳았다고 본다는 것으로 결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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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적 의미에서 Aristotelian Of or relating to Aristotle or to his philosophy. n. A follower of Aristotle or his teachings. /A person whose thinking and methods tend to be empirical, scientific, or commonsensical. 라고 되어 있다. 본문을 읽을 때 내가 받은 감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놓고, 그 대상적인, 그 대상을 따르는, 그 대상의, 라는 말을 자신있게 쓰기가 좀 어려웠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기 보다는 니체적인  등의 표현은 더욱 그랬다. (어떤 점에서는 너무 작은 예가 될 뿐이겠지만, 이번 본문에서 제시한 저자의 가정 혹은 의도와 실제의 책의 서술에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으로 고루 옮겼다.

2.       For one thing, virtue ethics does not have to be Aristotelian in the sense just given. Michael Slote's recent 'agent-based' version of virtue ethics is not at all, he thinks, Aristotelian, but is to be found in the nineteenth-century ethicist Martineau, and some of Christine Swanton's work pays more attention to Neitzsche than to Aristotle. 여기서는 지난 번에 이어 미묘한 어순의 문제를 다시 느꼈다. 나는 최근에 행위자 중심으로 해석된/씌여진/설명된 등등 슬롯의 덕 윤리학은행위자 중심에서 해석된/씌여진/설명된 슬롯의 최근이 둘이 같은 문장이 될 수 없지 않는가 생각하는데 그것이 맞는지가 의문스럽다. 만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이 맞다고 한다면, 문제는 영문을 의식하지 않고 읽기에는 첫 번째 문장이 더 나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내가 옮긴 것은 영문의 순서에 따른다는 생각하에 두 번째로 했다. 이 점은 꼭 이 문장 뿐 아니라 아래에서도 반복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우리말의 어순에 대한 어떤 원칙 같은 것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아는 것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중에 참고할만한 것들을 좀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3.       Pay attention to 의 경우 주의하다라는 말이야 알고 있지만, 니체에게 더 주의를 한다니, 옮겨 놓고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니체를 더 많이 따르고 있다고 했었다. 그랬던 근거는, attend 의 수행하다의 의미에 있었는데, 용례나 다른 사전을 찾아 봐도, pay attention to에는 그 의미가 없길래 마지막에 바꿨다. 내용만 보면, 니체의 철학에서 더 많은 것을 import 했다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을 어느 정도로 과감하게 옮길 수 있는 것인지 반복되는 의문이다.

4.      For another, any virtue ethics which is 'Aristotelian' as described inevitably aims to stick close to the author's interpretation of Aristotle, and interpretation of Aristotle, on many of the relevant issues, vary. 여기서는 의인화된 주어로 보고 문장을 풀었고, vary 를 다양하다 대신 하나가 아니다로, 나름대로는 강조가 들어간 말로 골라 봤다. 아마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혹시나 해서 기록을 남긴다면, 나는 이 문장을 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덕 윤리학자<덕 윤리학 책(또는 이론) 식으로 보고 그래서 덕 윤리학(/이론)은 저자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따른다로  풀었다.

5.       To some readers, this aspect of his thought seems ineliminable. To others, myself included, this is not so. We agree that the elitism, like the sexism, is present, but we do not think it is built into the very structure of his thought.  이 부분은 본문에 없는 단어를 집어 넣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어느 정도라야 불필요하게 느슨해지지 않고 적절함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게 했다. 예를 들어 ineliminable 을 풀 때, 나는 그것 뒤에 from Aristotle philosophy 가 있는 것처럼 가정을 했고 그래야 뒤의 문장과의 대구도 더 좋다고 봤다. 대신 present 뒤에는 in Aristotle 을 쓰지 않았는데 아무런 이유는 없었다. 또 한가지, 문장을 쓸 때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사이에 미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에  꽤 여러 번 그  을 넣었다 뺐다 반복했다. 어떤 점에서는 그런 것 모두가 시키지 않고 원하지 않고 따라서 오해를 살 짓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점에선 그것이야말로 번역자가 자신의 언어에 대해 갖는 언어능력이자 재량의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1. Built in 의 경우는 탑재된, 내재된, 고유한 등등의 말뜻이 있었지만 그 앞의 구조에 착안해서 근간으로 옮겼다. 국어원의 아래의 뜻을 참고했다. 근간(根幹)「명」「1」뿌리와 줄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 2」사물의 바탕이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것, <1>간근. <2>근기03(根基). <2>근본『I』〔2. <2>근저03(根底). <2>기초06(基礎)1. 근간-()「관」「명」중요한 기본 바탕이 되는. 또는 그런 것. 근간적 의미//근간적인 사업.§ 이 내용을 참고로 해서

7.      And finally, as I first discovered when I tried to apply neo-Aristotelianism to abortion, and later to the question of moral dilemma, there are all sorts of specific areas that come up in contemporary moral philosophy about which Aristotle said little or nothing. 이 문장이 바로 그 예가 아닐까 싶다. 나는 여기서 when I tired to apply neo-Aristotelianism to abortion 을 하나로 하고, 그럴 때 처음 발견했고, 나중에 또 발견했다로 문장을 파악했다. 그런데 그렇게 썼더니 문장이 좀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 낙태의 문제에서 나중에는 딜레마의 문제에서로 했더니 그 처음의 의미가 발견했다깨닫다가 아닌, 낙태냐 딜레마냐의 수순의 표현으로 잘못 자리매김 되는 것 같아서 바꾸고, 낙태에서, 나중엔 딜레마에서 처음이라고 했더니 이미 한 번 첫발견을 했는데 뒤에서까지 처음의 의미를 넣어선 말이 논리적이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 늘어지지만 다 풀었다. 가면 갈수록 아주 쉽다고 생각하는 접속사 and but ‘ 의 의미라던가 이런 수식어의 위치의 문제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 헛갈린다.

8.       When this happens, the neo-Aristotelian virtue ethicist has to launch out on her own, perhaps, as often in my case, feeling that she is pursuing a line of thought which is a natural development of his (albeit conscious of the fact that it would make him rotate in his grave); or perhaps self-consciously moving away from him. But either way, there are lots of different directions to go, so in launching out on our own we may come up with different versions. 여기서는 natural development 에 어떤 고유한 말뜻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 여러 번 검색도 하고 사전도 찾았지만 없어서 그냥 옮겼다. 괄호 안의 문장은 자던 사람 벌떡 깨게 한다 쪽의 의미 같았는데 용례를 찾지 못해서, make someone turn on one’s grave 의 의미가 편히 못 잠들게 한다의 뜻인 것을 보고서 그대로 옮겼다 .맛깔스러운 번역이 가능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9.      Indeed, for all my claims to being, 'Aristotelian', most of this book must be described, in a way, as 'launching out on my own', because I have tried to write it without presupposing that my readers have read Aristotle's Nicomachean Ethics. 실수를 했다가 마지막 점검에서 고쳤는데 위에서 for one thing for another 가 나온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이 문장을 그와 마찬가지로 옮겼다. 내 모든 주장에 대해서/에 관련해서 로. 그러다 뒷 문장이 잘 풀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얼핏, 앞의 구와 뒤의 주절이 서로 양보관계가 아닌가 하고 보니 For all 이 그제서야 묶여서 보였다. 여기서부터 아래의 문장은 대체로 저자가 수동형을 써서 위와 다른, 그것이 문체의 변화를 주기 위해서건 아니면 어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럴수밖에 없는 경우라서 등의, 의미를 넣기 위해서건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10.    But, for whatever reason, there are certainly some familiar stumbling blokcs for many people who are unacquainted with Aritsotle's ethics, and they should be addressed straight away. 이 바로 위의 문장은 따로 설명하지 않고 넘겼고, 이번에는 이 문장이 풀기가 좀 곤란했다. 먼저, 위와 마찬가지로 certainly 의 위치를 우리말로 옮긴 문장 내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 매끄러움을 생각하면 확실히, - 하고 시작하는 문장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 --는 확실히 있다 는 밋밋한 문장으로 옮겼다. 다음으로, 나는 저 문장에서 왜 저자가 familiar stumbling block 이란 말을 썼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한참을 보다가, (1)생소한의 unacquainted with와 대조 라는 느낌을 받고 거기서 (1-1) 아리스토텔레스에 생소한 독자에게는 어쩔지 모르나 정통한 나에게는 익숙한, 이거나  (1-2) 아리스토텔레스에 생소한 독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하면 거치기 마련인, 잘 알려진, 흔한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정은 두 번째로 하긴 했는데 확실히 둘 중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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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one thing, virtue ethics does not have to be Aristotelian in the sense just given. Michael Slote's recent 'agent-based' version of virtue ethics is not at all, he thinks, Aristotelian, but is to be found in the nineteenth-century ethicist Martineau[11], and some of Christine Swanton's work pays more attention to Neitzsche than to Aristotle[12]. For another, any virtue ethics which is 'Aristotelian' as described inevitably aims to stick close to the author's interpretation of Aristotle, and interpretation of Aristotle, on many of the relevant issues, vary. (Thus, to cite one example amongst many, there is a debate over whether Aristotle is intrinsically elitist. To some readers[13], this aspect of his thought seems ineliminable. To others, myself included, this is not so. We agree that the elitism, like the sexism, is present, but we do not think it is built into the very structure of his thought.)

첫째,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당연시할 필요가 없다. ‘행위자 중심으로 해석된 마이클 슬롯 Michael Slote 최근의 윤리학론은 그가 생각하기에 전혀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19세기 윤리학자 마르티노  Martineau 이론에서 발견된다. 또한 크리스틴 스완튼Christine Swanton 일부 저작도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니체의 철학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다음으로, 앞서 설명한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모든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철저히 따르려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할텐데, 많은 관련 주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은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의 예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자인가를 둘러싼 논쟁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의 그런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배재될 없는 생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정도까지는 아니다. 우리는 성차별주의와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가 존재한다고 동의하지만,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체계에 근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And finally, as I first discovered when I tried to apply neo-Aristotelianism to abortion[14], and later to the question of moral dilemma, there are all sorts of specific areas that come up in contemporary moral philosophy about which Aristotle said little or nothing. When this happens, the neo-Aristotelian virtue ethicist has to launch out on her own, perhaps, as often in my case, feeling that she is pursuing a line of thought which is a natural development of his (albeit conscious of the fact that it would make him rotate in his grave); or perhaps self-consciously moving away from him. But either way, there are lots of different directions to go, so in launching out on our own we may come up with different versions.

 그리고 마지막으로, 낙태의 문제에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적용해 보고자 했을 처음으로 깨달았고 나중에 도덕적 딜레마의 문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던 것처럼, 현대 도덕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구체적인 분야 모두는 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의 또는 전혀 말한 없는 것들이다. 이러하므로,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윤리학자는 아마도 내가 그랬던만큼 자주,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자연발전적인 일련의 사상을 추구하는 중이라고 느끼거나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를 편히 잠들지 못하게 만들 일임을 자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의식적으로 떨어져 나오려고 하면서 스스로의 윤리학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식이 되건 길은 여러 방향으로 많이 있으므로, 아마도 우리는 각자의 작업을 진행해가면서 서로 다른 이론들을 놓게 것이다.      

Indeed, for all my claims to being, 'Aristotelian', most of this book must be described, in a way, as 'launching out on my own', because I have tried to write it without presupposing that my readers have read Aristotle's Nicomachean Ethics. And, consistently with that presupposition, I must say something here about what I import from him. In fact, just how much has dropped out of our thought only recently, and how much is still around, needing only to be brought to the surface and acknowledge again, would be a delicate question in the history of ideas. But, for whatever reason, there are certainly some familiar stumbling blokcs for many people who are unacquainted with Aritsotle's ethics, and they should be addressed straight away.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책의 대부분은 내가 책을 독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다는 가정없이 보려고 했기 때문에 마치 나의 독자적인 이론에서 나온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전제와 일관되게, 나는 여기서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지고 들어온 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사실상, 서문과 감사의 말에서나 다시 등장할 법한, 바로 요즈음 우리의 생각에서 얼마나 되는 것이 빠졌고 남아 있는가 하는 것들은 사상사에 속하는 다루기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생소한 대다수에게는 알려진 방해물들이 확실히 있으므로 그것들은 지체없이 다루어져야 한다. 



[11] Michael Slote, ‘Agent-Based Virtue Ethics’ (1995)

[12] C. Swanton, ‘The Supposed Tension Between “Strength” and “Gentleness” Conceptions of the Virtues’ (1997)

[13] See Peter Simpson, ‘Contemporary Virtue Ethics and Aristotle’ (1992)

[14] Beginning Lives (1987) and ‘Virtue Theory and Abortion’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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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one thing, virtue ethics does not have to be Aristotelian in the sense just given. Michael Slote's recent 'agent-based' version of virtue ethics is not at all, he thinks, Aristotelian, but is to be found in the nineteenth-century ethicist Martineau, and some of Christine Swanton's work pays more attention to Neitzsche than to Aristotle. For another, any virtue ethics which is 'Aristotelian' as described inevitably aims to stick close to the author's interpretation of Aristotle, and interpretation of Aristotle, on many of the relevant issues, vary. (Thus, to cite one example amongst many, there is a debate over whether Aristotle is intrinsically elitist. To others, myself included, this is not so. We agree that the elitism, like the sexism, is present, but we do not think it is built into the very structure of his thought.)

And finally, as I first discovered when I tried to apply neo-Aristotelianism to abortion, and later to the question of moral dilemma, there are all sorts of specific areas that come up in contemporary moral philosophy about which Aristotle said little or nothing. When this happens, the neo-Aristotelian virtue ethicist has to launch out on her own, perhaps, as often in my case, feeling that she is pursuing a line of thought which is a natural development of his (albeit conscious of the fact that it would make him rotate in his grave); or perhaps self-consciously moving away from him. But either way, there are lots of different directions to go, so in launching out on our own we may come up with different versions.

Indeed, for all my claims to being, 'Aristotelian', most of this book must be described, in a way, as 'launching out on my own', because I have tried to write it without presupposing that my readers have read Aristotle's Nicomachean Ethics. And, consistently with that presupposition, I must say something here about what I import from him. In fact, just how much has dropped out of our thought only recently, and how much is still around, needing only to be brought to the surface and acknowledge again, would be a delicate question in the history of ideas. But, for whatever reason, there are certainly some familiar stumbling blokcs for many people who are unacquainted with Aritsotle's ethics, and they should be addressed straight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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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alind Hursthouse with Frank Jackson, 2002

 

 

지난 번에 이어 이번 작업에서도 저자의 철학함이 잘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어서 이 사진을 찾았다. 사진만으로는 그가 동료 교수와 대화 중인지 (설마) 논쟁 중인지는 잘 모르겠다.

 

 

본문 끝에 덧붙여 쓰는 것도 후기고 뒷날의 기록도 후기라고 하니, 두 번째 뜻풀이를 따른다고 치고 그냥 넘어갈까 했던 한 가지를 독백삼아 적고 가야겠다. 지난 번에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연상했다고 하면서 루 리드의 노래를 올렸는데, 다음 날 그 영화엔 루 리드의 노래가 실제로 흐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에구구 했었다. 인상이 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떤 것들은 서로 연상이 되고 나면 다음에도 마치 서로 실제의 관련이 있는 것처럼 떠오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전에도 한 번 착각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인천 바다 근처를 배경으로 깔깔거리며 걷던 아이들이 느린 화면으로 떠올랐고 그 분위기가 트레인스포팅 트레일러에서 흐르던 루 리드의 perfect day 와 하나인 것처럼 연관이 되었다는 거..;;

 

작업량을 조금 늘려 봤다. 처음에 그리 정확하지 않게 대강 스물 다섯 번 쯤으로 해 두었는데 찬찬히 다시 보니 지금처럼 가면 스물 여덟 번 정도가 돼야 서문을 끝마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지만 가능하다면 한 문단 정도 더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해 보다가 시간이 부족하거나 본업을 위해 써야 하는 공부시간을 뺏긴다 싶으면 횟수를 늘이는 것으로 하고, 그렇지 않다면 원래대로 스물 다섯 번을 채우고 마칠까 싶다.

 

아래는 옮기면서 들었던 노래. 한 이 년 전부터 이맘쯤이면 Fogelberg 의 노래 한 곡 정도 찾아 듣게 된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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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작업에서는 단어 하나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그 의미가 (혹은 어감이) 달라지는 것 같은 경우 그것을 어떡해야 하는가, 즉 원문의 순서대로 풀어가는 것이 적절한가 아니면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어순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 몇 번 고민을 했다. 그런 고민의 흔적이 비단 이번 작업 뿐 아니라 앞으로의 내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기록으로 잘 남기고 싶은데 잘 될런지 모르겠다.

 

 

  1. I used to be much more combative and eager to argue that virtue ethics was not only a rival to the other two approaches but the best, and was able to solve or avoid problems that the other two were committed to finding intractable.  번역문을 올려 놓고도 이 부분 때문에 한참을 생각했다. 무엇이 헛갈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마 문법파악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싶은데) 문장 뒷부분의 밑줄 친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앞의 선행사 problems 가 있는데, 그래서 that the other two were committed to 까지로 하고 끝나는 문장이라면 될 것 같은데, finding intractable 이 붙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problems 와 동격을 이루는 절로 보고서 했고, 그러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whose finding is intractable 인가 생각해 보기도 했고, 아니면 avoid +problems +(from) finding intractable 아닌가 해 보기도 했지만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첫 문장에서부터 막혀서 좀 골치가 아팠다. 내일쯤 다시 보면 너무 쉽게 풀릴 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의문 부호만 자꾸 생긴다. 결론적으로는 그 부분의 번역을 빼고 올린 셈이 됐다 

3.       While (1)virtue ethics was not generally recognized and (2) was being dismissed, I think that was the right tactic, and one powerfully pursued in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먼저 (1)의 경우, () 덕 윤리학은 전반적으로 혹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았다가 직역인 것은 알겠는데, 그 문장을 예를 들어 () ‘일반적으로 덕 윤리학은 인정받지 못했다로 바꾸면 얼핏 같은 말 같으면서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아서 헛갈렸다. 앞선 번역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체 도덕 철학 분야에서 본다면 덕 윤리학의 그때 위치라는 것은 주목도 잘 못 받고 인정해 주는 세력도 별로 없는 처지였다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의 내 해석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가정할 경우 () () 모두 맞는 번역이 되는 것인지 좀 의문스러웠다. 이 점은 뒤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헛갈려졌다.(이런 말은 좀 이상하지만…)   

 

4.       (2) 의 경우 dismiss 라는 말의 여러 의미 중에서 적절한 것을 고르느라 골치 아팠다. 그 말은 퇴출이라는 뜻도 되고, 무시당하다는 의미도 되고, 잊혀진다는 의미도 되는데 나는 처음에는 미미하게 취급되는 혹은 무시되는으로 말을 썼다가, 문맥상 인정받지 못해서 (그 결과로) 잊혀지고 있는, 혹은 퇴출 중인 쪽으로 말을 바꾸었다.

 

5.       I think that was the right tactic, and one powerfully pursued in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이 문장도 밑줄 친 that 때문에 서너 번도 넘게 말을 바꾸었다. 나는 처음에 저 that 이 그 앞 문장에 나온 virtue ethics 를 받는다고 생각을 해서 덕 윤리학이 다른 두 이론 보다 더 올바른 전술이며, 그래서 슬롯이 자기 책에서 덕 윤리학을 강력하게 추구했다로 옮겼었다. 다시 읽어 본 결과 특히 앞 문장과의 연관만이 아닌 다음 문장하고의 논리의 흐름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이때의 that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런 자세로 덕 윤리학의 뛰어남을 역설했던 그런 것들이 적절한 전술이었고 슬롯의 책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전술은 더 필요하지 않게 된 것 같다의 의미를 받아야 맞겠다고 판단했다. 쉽게 파악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나는 틀렸고, 헤맸고, 그러다 틀린 줄 알게 되어서 시간은 걸렸지만 잘 되었다 싶다. (결론적으로 맞았다는 전제 하에)

 

  1. But the reaction to virtue ethics’ emergence that I mentioned above has been so sudden and so fruitful that, only six years after that book’s publication, I find it reasonable to hope that the combative stance is no longer necessary. 앞은 fruitful 의 말을 무엇으로 받을 것인지, 그리고 sudden fruitful 를 묶은 and 를 어떤 말로 정할 것인지를 따지는데 좀 신경을 썼고, I find it- 이하를 말로 풀어지게 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소리내서 읽어보기여기서 이렇게 작은 요령을 하나 제목으로 달았으면 한다. 지지난 번 정도부터 올리기 전에 한 두어 번쯤 소리를 내서 내가 옮긴 문장들을 읽어 보는데, 부족한 언어능력 자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직역의 특성상 뭐랄까 각각은 맞게 되었다고 쳐도 전체적으로 비뚤빼뚤한 말들의 높이를 조금 완만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입술과 목을 움직여 본문을 읽어 가다다 호흡이 걸리는 부분이 나오면 대체할 말을 생각해 보고 사전으로 확인한 뒤 옮기고 그랬다. 이번에는 reasonable 이 그 예였다. 처음엔 가 합리적인, 타당한 이렇게 했다가 가 무리(한 주장이) 가 아닌 정도로 했다 

7.       Hence, though I contrast virtue ethics with simple versions of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in the early chapters, I do so only to aid initial comprehension rather than to deny the possibility of sophisticated developments, and references to them fade away as the book professes. 저자는 therefore 같은 말 대신 Hence 를 애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어쨌거나 hence 를 다 똑같이 따라서로만 받을 수는 없어서 몇 개로 바꾸었지만 어느 때는 아예 옮기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생각해 봤다. 조금 더 자신이 붙으면 그럴 수 있을런지도. 밑줄 친 sophisticated developments 도 마지막에 말을 바꾸었다. 실제로 이번 작업에서가 아니라도 나는 sophisticated 라는 말에 많이 약하다. 마땅히 그 말을 받을 (사람에 대해 세련된으로 쓸 때는 제외하고) 우리말이 없는 것 같아서. 이 경우 처음에는 한층 발전된 전개/sophisticated complex 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고 이론들이 서로 섞여서 발전하게 되는, 다 함께 주의쪽으로 했다가/ 마지막엔 그 앞의 simple versions of deontology & utilitarianism 의 댓구가 아닌가 싶어서 잘 보니 그것이 맞는 것 같길래 그것으로 받았다. 안도했지만 동시에 잘 옮겨졌는지 약간 불안했다.

 

8.       It is not possible to write a book in moral philosophy without taking a fair amount of common ground for granted, and I am assuming that anyone who is interested enough in the area to read such a book shares my own ethical outlook to a fair extent. 이 부분도 좀 고민했는데 우선 common ground 를 공감대로 옮겨도 될런지 생각했고, 우리말인 그 말에는 끌렸지만 여기서는 감성의 영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해서 공통된 의견으로 직역했다. 문제는, 그런 점들이 당연하게 전제되지 않고서 책을 쓴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는 거였다. 왜 그런 것 없이 책을 못 쓰나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어서 뒤적거리다가 사전에서 in 의 의미 중 종사하다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보고선 전보다는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그 의미를 살려서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문장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차피 소수 견해요, 신생이론인 줄 알고 있을 것인데 그런 외로운 처지에서 책을 쓸 생각을 하면 가능할 법한 소리가 안 되는 것인지..

 

  1. we are against murder, dishonesty, cruelty, and so on and in favour of benevolence, honesty, justice, and so on. 여기서는 다시보기라고 요령을 달았으면 한다. 지금부터 한 대여섯 시간 전 쯤 번역문을 다시 폈는데, 그 전에 조금 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 보니까 교정과 확인이 필요한 부분들이 눈에 밟히도록 많았다. 철렁했다기보다는 안도했고 그때, 쫓겨가면서 번역하는 경우 혹은 한 군데 틀어박혀서 내내 작업하는 경우에는 전문적인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이 꼭 번역자의 자질 문제가 아니더라도 오역과 실수가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의 cruelty 가 그 한 예가 되지 않을가 싶다. 이번에는 마음 속으로 나름의 마감을 정해 두었었다. 그 생각을 따랐다면 이 말은 원래 골랐던 잔혹함으로 옮겨졌을텐데 물론 그것이 절대적으로 오역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마음을 바꾸어서 시간준수를 포기하고 난 뒤 점검 차원에서 ’cruelty 윤리라는 두 개의 열쇳말로 검색을 했을 때 (동물 등에 대한) 학대가 나오는 것을 보고서 느낀 바가 컸다 

10.    The general kind is 'neo'  for at least the reason I noted above, that its proponents allow themselves to regard Aristotle as just plain wrong on slaves and women, and also because we do not restrict ourselves to Aristotle's list of virtues. (Charity or benevolence, for example, is not an Aristotelian virtue, but all virtue ethicists assume it is on the list now.) It is 'Aristotelian'  in so far as it aims to stick pretty close to his ethical writings wherever else it can. Hence what I present here is only one version of virtue ethics amongst many possible ones.  여기서는 재량을 좀 발휘해서 인 것은 이기 때문이요, -인 것은 이기 때문이다 식의 댓구로 옮겼다. 그런 재량이 허용될만한 것인가는 변형의 과정에서 본문의 탈락이나 의미왜곡 등이 없다는 확인 하에 기본적으로 생각해 볼만하지 않는가 싶었다 

11.    번역의 문제와 좀 다른 차원에서 밑줄 친 benevolence 가 한 예가 되었던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웹 검색을 통해서만 본다면 지금 이 저자가 덕의 목록이라 한 그 덕의 이름들이 아직 통일된 우리말 번역어가 없어 보이더라는 것이다. Benevolence 의 경우 검색 결과는 仁 이라고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자애 자비 자선 인정많음 선의까지 엇비슷한 여러 말들로 옮겨져 있었고 엄밀하게 왜 그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Charity 도 마찬가지였던 것을 기억한다.)

 

* 조금 더 자세히, 석연찮았던 부분들을 더 쓰고 싶었는데 중간에 컴퓨터가 이유없이 나가 버려서 시간 상 이만 줄여야겠다. 아래는 이어지는 15, 16  번째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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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used to be much more combative and eager to argue that virtue ethics was not only a rival to the other two approaches but the best, and was able to solve or avoid problems that the other two were committed to finding intractable. While virtue ethics was not generally recognized and was being dismissed, I think that was the right tactic, and one powerfully pursued in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But the reaction to virtue ethics’ emergence that I mentioned above has been so sudden and so fruitful that, only six years after that book’s publication, I find it reasonable to hope that the combative stance is no longer necessary. Hence, though I contrast virtue ethics with simple versions of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in the early chapters, I do so only to aid initial comprehension rather than to deny the possibility of sophisticated developments, and references to them fade away as the book professes.

 

이전에 나는 지금보다 훨씬 투지에 불타 있었다. 그때 나는 매우 열성적으로 윤리학이 다른 둘의 경쟁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접근법이며, 이론이 맡았던 난제들을 해결하거나 막는다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점차 밀려나고 있는 중이었지만, 나는 그랬던 것이 올바른 전술이었다고 생각하고, 슬롯 Slote 도덕성에서 덕으로From Morality to Virtue 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윤리학의 출현에 대한 반응은 매우 뜻밖이면서 또한 의미있는 것이어서, 책이 출간된 겨우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이상 그런 전투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다는 기대가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따라서 나는  책의 전반부의 장에서 윤리학을 단순화된 의무론과 공리주의 이론과 대조할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다만 처음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 뿐이지 한층 정교해진 이론적 발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들과의 비교도 책에서의 주장이 계속 되어감에 따라 점차 사라지게 것이다.

 

Up until now my use of ‘we’ has mostly been limited to ‘myself and other virtue ethicists or moral philosophers’. From now on, unless context clearly indicates otherwise, I shall be using it to mean about my readership. It is not possible to write a book in moral philosophy without taking a fair amount of common ground for granted, and I am assuming that anyone who is interested enough in the area to read such a book shares my own ethical outlook to a fair extent. We may have lots of detailed disagreements but, I assume, we all think that ethics matters, and that (broadly speaking and allowing for all the detailed disagreements) we are against murder, dishonesty, cruelty, and so on and in favour of benevolence, honesty, justice, and so on. Hence, I assume, we would fill out those ‘and so on’ in the same way.

 

지금까지 나는 우리라는 말을 자신 다른 윤리학자들 혹은 도덕 철학자들 한정해서 써왔다. 이제부터는, 문맥이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 , 나는 말을 책의 독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할 것이다. 도덕 철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공통된 의견이 상당하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가정하지 않고서 책을 쓴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책을 읽을 정도로 도덕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고유한 윤리관을 많이 나와 함께 하리라고 본다. 아마도 많은 세부적인 이견들이 있을지 모르나, 나는 우리 모두가 윤리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넓게 말해서, 그리고 모든 세부적인 불일치를 묵인한다고 ) 살인과, 부정직과, 학대 밖의 다른 것들을 반대하며, 인정과 정직, 정의를 지지한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밖의 다른것들 사이의 간극도 마찬가지로 좁혀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Neo-Aristotelianism 

The particular version of virtue ethics I detail and discuss in this book is of a more general kind known as 'neo-Aristotelian'. The general kind is 'neo'  for at least the reason I noted above, that its proponents allow themselves to regard Aristotle as just plain wrong on slaves and women, and also because we do not restrict ourselves to Aristotle's list of virtues. (Charity or benevolence, for example, is not an Aristotelian virtue, but all virtue ethicists assume it is on the list now.) It is 'Aristotelian'  in so far as it aims to stick pretty close to his ethical writings wherever else it can. Hence what I present here is only one version of virtue ethics amongst many possible ones.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내가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논의하려는 특정한 덕 윤리학은 신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알려진 보다 일반적인 이론이다. 그것은 위에서의 지적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지자들 스스로가 노예와 여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명백히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록에 나온 덕에만 국한하여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컨대, 자선이나 인정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이 아니지만 현재 모든 덕 윤리학자들은 그것을 목록에 있는 덕으로 당연시 한다.) ‘neo’ 이며,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관련 저술에 충실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소개하려는 덕 윤리학은 많은 가능한 해석들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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