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달리 작업 도중에 노래를 떠올릴 것 같지 않아서, 나에게는 묘하게도 수요일과 화요일이 교차되는 이미지를 주던 노래를 올렸는데, 옮기면서 뭔가 찾으려고 Aristotelian 로 검색했을 때 본 Aristotelian cosmology 라는 그림에서 클라투를 연상했다. 노래목록을 보다가 처음 들어보고 본문에 나온 크리스틴과 겹치는 곡이라서 그것으로 올렸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3760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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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어려워서였다기보다 앞으로가 조금 걱정이 되어서 지금까지에 비하면 잡념도 사이사이 있었고 마음도 조금 처지고 무거웠던, 그래서 약간 (사서) 외로움도 느꼈던 작업이었다.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이번 본문에 거의 매 줄마다 나오던 ‘Aristotelian’ 이라는 말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대상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거리감과 그것을 닮은 생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러가지를 생각했다. 가장 먼저는, 몇 번의 수업에서 들었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비롯한 몇 권의 책에서, 웹에서, 또는 그밖의 경로로 접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지금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에 대한 점검이었다. 그 생각은 단박에 나를 한숨짓게 했지만 동시에, 이번 작업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적어도 어느 한 부분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그 너머, 그 안쪽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집중하며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오히려 행운이 아닌가 하는 긍정의 마음을 주었다. 그리고 이번 본문은 나에 대한 자리매김을 잘 상상하게 해 주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저자의 말을 비유해 본다면, ‘정통한 이가 베푸는 배려의 햇살 아래에 있는 독자의 자리’ 가 맞고 그래서 저자의 생각을 다른 언어로 옮겨 푸는 그림자의 자리는 아닌 것이었다.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므로 그런 생각 자체가 새로이 준 것은 없었다. 다만, 비록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번 일이 나의 앞으로의 시간에 많은 의미로 남을 것 같다는 느낌만은 더 확실해 진 것 같다. 잘 모르는 일을 하는 사람답게 조심하고 걱정하고, 힘들어 할 땐 힘들어 하되, 끝도 한계도 분명한 이 일이 오히려 조금씩 어떤 의미를 띄어가는 것 같은 은근함을 충분히 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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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번 작업과 관련해서 정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While virtue ethics was not generally recognized and was being dismissed, I think that was the right tactic, and one powerfully pursued in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덕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점차 밀려나고 있는 중이었지만, 나는 그랬던 것이 올바른 전술이었다고 생각하고, 슬롯 Slote 의 책 도덕성에서 덕으로From Morality to Virtue 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전에 옮긴 내용이고 그때 본문의 ‘그랬던 것이’ 에 대한 근거를 달았었는데, 하루 지나서 허공에 대고 다시 생각을 해 보니, 아무래도 문법상 virtue ethics 가 나와 있는데 그 말 대신 그 앞의 문장전체를 that으로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같았다. 기술적으로는 ‘그랬던 것이’ 라는 표현을 ‘그것이’ 라고만 바꾸면 앞의 해석이건 지금의 판단이건 아무 것도 반영하지 않아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히 하고 싶어서 앞으로 다시 바꿀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고치고 싶다. 즉, 나는 예전에 매우 전투적이었고 덕 윤리학의 최고성을 알리고자 열심이었다. 그러나 덕윤리학은 실제로 잘 인정받지 못했고 퇴거당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덕 윤리학은 (윤리의 제 문제를 다루는) 옳은 전술이라 생각하며, 슬롯이 자신의 책에서 왜 그러한가를(덕 윤리학의 강점과 의미를)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로 바꾸려고 한다. 헛갈렸던 이유를 다시 잘 보니까 I think it was the right tactic에서 나는 덕 윤리학을 굳이 was 라는 과거 시제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점을 마지막 근거삼아 예전의 내(저자)가 취한 전술적 태도가 옳았다고 본다는 것으로 결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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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적 의미에서 Aristotelian 은 Of or relating to Aristotle or to his philosophy. n. A follower of Aristotle or his teachings. /A person whose thinking and methods tend to be empirical, scientific, or commonsensical. 라고 되어 있다. 본문을 읽을 때 내가 받은 감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놓고, 그 대상적인, 그 대상을 따르는, 그 대상의, 라는 말을 자신있게 쓰기가 좀 어려웠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기 보다는 니체적인’ 등의 표현은 더욱 그랬다. (어떤 점에서는 너무 작은 예가 될 뿐이겠지만, 이번 본문에서 제시한 저자의 가정 혹은 의도와 실제의 책의 서술에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으로 고루 옮겼다.
2. For one thing, virtue ethics does not have to be Aristotelian in the sense just given. Michael Slote's recent 'agent-based' version of virtue ethics is not at all, he thinks, Aristotelian, but is to be found in the nineteenth-century ethicist Martineau, and some of Christine Swanton's work pays more attention to Neitzsche than to Aristotle. 여기서는 지난 번에 이어 미묘한 어순의 문제를 다시 느꼈다. 나는 ‘최근에 행위자 중심으로 해석된/씌여진/설명된 등등 슬롯의 덕 윤리학은’ 과 ‘행위자 중심에서 해석된/씌여진/설명된 슬롯의 최근’ 이 둘이 같은 문장이 될 수 없지 않는가 생각하는데 그것이 맞는지가 의문스럽다. 만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이 맞다고 한다면, 문제는 영문을 의식하지 않고 읽기에는 첫 번째 문장이 더 나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내가 옮긴 것은 영문의 순서에 따른다는 생각하에 두 번째로 했다. 이 점은 꼭 이 문장 뿐 아니라 아래에서도 반복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우리말의 어순에 대한 어떤 원칙 같은 것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아는 것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중에 참고할만한 것들을 좀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3. Pay attention to 의 경우 –주의하다라는 말이야 알고 있지만, 니체에게 더 주의를 한다니, 옮겨 놓고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니체를 더 많이 따르고 있다’ 고 했었다. 그랬던 근거는, attend 의 수행하다의 의미에 있었는데, 용례나 다른 사전을 찾아 봐도, pay attention to에는 그 의미가 없길래 마지막에 바꿨다. 내용만 보면, 니체의 철학에서 더 많은 것을 import 했다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을 어느 정도로 과감하게 옮길 수 있는 것인지 반복되는 의문이다.
4. For another, any virtue ethics which is 'Aristotelian' as described inevitably aims to stick close to the author's interpretation of Aristotle, and interpretation of Aristotle, on many of the relevant issues, vary. 여기서는 의인화된 주어로 보고 문장을 풀었고, vary 를 다양하다 대신 하나가 아니다로, 나름대로는 강조가 들어간 말로 골라 봤다. 아마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혹시나 해서 기록을 남긴다면, 나는 이 문장을 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덕 윤리학자<덕 윤리학 책(또는 이론) 식으로 보고 그래서 덕 윤리학(책/이론)은 저자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따른다로 풀었다.
5. To some readers, this aspect of his thought seems ineliminable. To others, myself included, this is not so. We agree that the elitism, like the sexism, is present, but we do not think it is built into the very structure of his thought. 이 부분은 본문에 없는 단어를 집어 넣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어느 정도라야 불필요하게 느슨해지지 않고 적절함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게 했다. 예를 들어 ineliminable 을 풀 때, 나는 그것 뒤에 from Aristotle philosophy 가 있는 것처럼 가정을 했고 그래야 뒤의 문장과의 대구도 더 좋다고 봤다. 대신 present 뒤에는 in Aristotle 을 쓰지 않았는데 아무런 이유는 없었다. 또 한가지, 문장을 쓸 때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와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이에 미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에 꽤 여러 번 그 ‘는’ 을 넣었다 뺐다 반복했다. 어떤 점에서는 그런 것 모두가 ‘시키지 않고 원하지 않고 따라서 오해를 살 짓’ 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점에선 ‘그것이야말로 번역자가 자신의 언어에 대해 갖는 언어능력이자 재량의 문제’ 라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 Built in 의 경우는 탑재된, 내재된, 고유한 등등의 말뜻이 있었지만 그 앞의 구조에 착안해서 근간으로 옮겼다. 국어원의 아래의 뜻을 참고했다. 근간(根幹)「명」「1」뿌리와 줄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 「2」사물의 바탕이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것, <1>간근. <2>근기03(根基). <2>근본『I』〔2〕. <2>근저03(根底). <2>기초06(基礎)〔1〕. 근간-적 (―的)「관」「명」중요한 기본 바탕이 되는. 또는 그런 것. ¶근간적 의미//근간적인 사업.§ 이 내용을 참고로 해서
7. And finally, as I first discovered when I tried to apply neo-Aristotelianism to abortion, and later to the question of moral dilemma, there are all sorts of specific areas that come up in contemporary moral philosophy about which Aristotle said little or nothing. 이 문장이 바로 그 예가 아닐까 싶다. 나는 여기서 when I tired to apply neo-Aristotelianism to abortion 을 하나로 하고, 그럴 때 처음 발견했고, 나중에 또 발견했다로 문장을 파악했다. 그런데 그렇게 썼더니 문장이 좀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 낙태의 문제에서 나중에는 딜레마의 문제에서” 로 했더니 그 처음의 의미가 발견했다깨닫다가 아닌, 낙태냐 딜레마냐의 수순의 표현으로 잘못 자리매김 되는 것 같아서 바꾸고, 또 “낙태에서, 나중엔 딜레마에서 처음” 이라고 했더니 이미 한 번 첫발견을 했는데 뒤에서까지 처음의 의미를 넣어선 말이 논리적이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 늘어지지만 다 풀었다. 가면 갈수록 아주 쉽다고 생각하는 ‘접속사 and but ‘ 의 의미라던가 이런 수식어의 위치의 문제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 헛갈린다.
8. When this happens, the neo-Aristotelian virtue ethicist has to launch out on her own, perhaps, as often in my case, feeling that she is pursuing a line of thought which is a natural development of his (albeit conscious of the fact that it would make him rotate in his grave); or perhaps self-consciously moving away from him. But either way, there are lots of different directions to go, so in launching out on our own we may come up with different versions. 여기서는 natural development 에 어떤 고유한 말뜻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 여러 번 검색도 하고 사전도 찾았지만 없어서 그냥 옮겼다. 괄호 안의 문장은 자던 사람 벌떡 깨게 한다 쪽의 의미 같았는데 용례를 찾지 못해서, make someone turn on one’s grave 의 의미가 편히 못 잠들게 한다의 뜻인 것을 보고서 그대로 옮겼다 .맛깔스러운 번역이 가능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9. Indeed, for all my claims to being, 'Aristotelian', most of this book must be described, in a way, as 'launching out on my own', because I have tried to write it without presupposing that my readers have read Aristotle's Nicomachean Ethics. 실수를 했다가 마지막 점검에서 고쳤는데 위에서 for one thing for another 가 나온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이 문장을 그와 마찬가지로 옮겼다. 내 모든 주장에 대해서/에 관련해서 로. 그러다 뒷 문장이 잘 풀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얼핏, 앞의 구와 뒤의 주절이 서로 양보관계가 아닌가 하고 보니 For all 이 그제서야 묶여서 보였다. 여기서부터 아래의 문장은 대체로 저자가 수동형을 써서 위와 다른, 그것이 문체의 변화를 주기 위해서건 아니면 어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럴수밖에 없는 경우라서 등의, 의미를 넣기 위해서건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10. But, for whatever reason, there are certainly some familiar stumbling blokcs for many people who are unacquainted with Aritsotle's ethics, and they should be addressed straight away. 이 바로 위의 문장은 따로 설명하지 않고 넘겼고, 이번에는 이 문장이 풀기가 좀 곤란했다. 먼저, 위와 마찬가지로 certainly 의 위치를 우리말로 옮긴 문장 내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 매끄러움을 생각하면 확실히, - 하고 시작하는 문장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 --는 확실히 있다 는 밋밋한 문장으로 옮겼다. 다음으로, 나는 저 문장에서 왜 저자가 familiar stumbling block 이란 말을 썼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한참을 보다가, (1)생소한의 unacquainted with와 대조 라는 느낌을 받고 거기서 (1-1) 아리스토텔레스에 생소한 독자에게는 어쩔지 모르나 정통한 나에게는 익숙한, 이거나 (1-2) 아리스토텔레스에 생소한 독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하면 거치기 마련인, 잘 알려진, 흔한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정은 두 번째로 하긴 했는데 확실히 둘 중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