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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used to be much more combative and eager to argue that virtue ethics was not only a rival to the other two approaches but the best, and was able to solve or avoid problems that the other two were committed to finding intractable. While virtue ethics was not generally recognized and was being dismissed, I think that was the right tactic, and one powerfully pursued in Slote’s From Morality to Virtue. But the reaction to virtue ethics’ emergence that I mentioned above has been so sudden and so fruitful that, only six years after that book’s publication, I find it reasonable to hope that the combative stance is no longer necessary. Hence, though I contrast virtue ethics with simple versions of deontology and utilitarianism in the early chapters, I do so only to aid initial comprehension rather than to deny the possibility of sophisticated developments, and references to them fade away as the book professes.

 

Up until now my use of ‘we’ has mostly been limited to ‘myself and other virtue ethicists or moral philosophers’. From now on, unless context clearly indicates otherwise, I shall be using it to mean about my readership. It is not possible to write a book in moral philosophy without taking a fair amount of common ground for granted, and I am assuming that anyone who is interested enough in the area to read such a book shares my own ethical outlook to a fair extent. We may have lots of detailed disagreements but, I assume, we all think that ethics matters, and that (broadly speaking and allowing for all the detailed disagreements) we are against murder, dishonesty, cruelty, and so on and in favour of benevolence, honesty, justice, and so on. Hence, I assume, we would fill out those ‘and so on’ in the same way.

 

 

Neo-Aristotelianism 

The particular version of virtue ethics I detail and discuss in this book is of a more general kind known as 'neo-Aristotelian'. The general kind is 'neo'  for at least the reason I noted above, that its proponents allow themselves to regard Aristotle as just plain wrong on slaves and women, and also because we do not restrict ourselves to Aristotle's list of virtues. (Charity or benevolence, for example, is not an Aristotelian virtue, but all virtue ethicists assume it is on the list now.) It is 'Aristotelian'  in so far as it aims to stick pretty close to his ethical writings wherever else it can. Hence what I present here is only one version of virtue ethics amongst many possible 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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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옮기면서 들었던 노래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1895

 

 

작업하려고 책상 위를 치우고 사전이며 책 올려 둘 때 중고등학교 시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그 시절 어느 때 반장이었는데, 학교가 반 끼리의 경쟁을 나서서 부채질하고 그랬다. 잘 못하는 반은 대 놓고 구박하고, 잘 하는 반에다가는 유난한 티를 내 주고, 그러니 반의 전체 평균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는 아이들은 자기 공부 자기가 못하는 결과 말고도 맞고 욕먹고 무시당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내가 있던 반은 열 두 반 중에 꼴찌는 아니었어도, 아주 잘하지 않았다.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왜, 나도 학생인 주제에 우리 반 반평균 올리는 일에 신경을 쓰고 그랬는지는 끝에 묶어 이야기를 해얄 것 같다.

 

어찌저찌해서, 나랑 잘 지내는데 성적이 좋지 못한 몇몇을 꼬셔서 잠시 같은 독서실에 다녔다. 그리고 난 거기서 독서실 총무 노릇도 하고, 모르는 것 가르쳐주는 새끼 선생 노릇도 하고, 물론 컵라면에 물 붓고 히히덕거리는 친구도 하고, 독서실 짤막한 형광등 아래로 부지런히 쪽지 같은 걸 주고받으며 인생상담을 받고주고 그러기도 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다 같이 공부해서 함 잘 해보자, 그런 거였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좀 가물거린다. 중요한 건, 게중에 성적이 오른 아이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랑 그만큼 분명히 내 그때의 월말고사인지 기말중간 뭔지는 몰라도, 그때 성적이 그 앞 보다 떨어졌다는 거, 그거였다.

 

여기까지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학창시절의 어느 기억 뿐일 것 같다. 그런데 이 기억이 오늘 작업 하려고 막 준비중인 내게,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간 늦가을의 소국 화분처럼 떠올랐던 건, 그때도 바로 오늘까지도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때의 나  에 대한 무의식적인 되새김 때문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짧게 말하면, 그리고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 그 기억 속의 나에 대해 제법 관대해 온 것 같다. 그때의 내 좋은 마음, 친구들이 반별 경쟁 따위 때문에 애꿏게 선생에게 멸시당하고 그러는 것 정말 싫어서 어쩌구..비록 내 성적은 떨어졌지만 그건 실은 어쩌구...식으로.

 

그런데 그제, 어제, 그리고 오늘, ‘공부란 무엇일까’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일까’ ‘난 공부를 도대체 왜 하려고 그러나그런 질문에서부터, 어제 강유원님 사이트에서 읽은 정신나간 놈에 관한 몇 마디, ‘정신나감혹은 허위의 커멘트에서 따라 온 여러 생각들이 뒤섞여 그 시절의 나와 엊그제, 이 작업하면서 나 혼자, 사서, 조금 힘들어 했던 나 둘 다를 불러다 놓고 따끔했고, 쓰고, 신 혼자의 시간을 가졌다.

 

 

엊그제쯤  내 머리 속에 어느 틈엔가 기어 들어와 있던 차림의 자세, 혹은 초대의 자세, 주제파악이 잘 되어있지 않고, 먼저의 요구가 없는 상태에서 어느 마음 아름다울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절제의 부족, 무엇보다 공부라는 집중의 깨어짐따져보면 오래 밴 습성이고, 또한 따져보니 이건 나라는 사람의 장점과 단점, 부족과 지나침, 좋고 모자란 점 모두가 한데 있는 것 같다.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결론은 얼핏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게 중용은 아직 그 뜻을 잘 체화시키지 못하는 부담이라서 대신 균형, 그리고 꾸준함, 무엇보다 평정이 깨어진 내가 느끼는 어떠함들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나 자신, 그런 것들.

 

그림은 생각하던 도중에 가지치며 생각나서 찾았고, 영화에 흐르던 루 리드의 목소리도 함께 찾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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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비례 관계가 여전하다. 이번에도 본문이 짧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걸린 시간은 짧은 길이에 비하면 그리 적게 든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번에는 특히, 본문에 쓴 저자의 같은 수식어를 따라서 똑같이 옮겨야 하는지 아니면 반복을 피해 재량껏 옮겨야 하는지 등을 연습하고 생각도 해 봤다. Distinctively 같은 특정한 단어도 그렇고, 부사+형용사구 라던가 명사+명사 구 같은 것들.  

 

2.       첫 문장부터 아래로 두 세개의 문장이 모두 사물주어고 수동형 문장들이었다. 그것이 수동태이고 사물주어이기 때문에 ( a deeper reason/ the suspicion )  문제를 삼은 것은 아니고, 이전까지 해 오면서 나름대로 어조의 흐름이 생겼다고 판단해서, 가급적 능동형으로, 가급적 사람주어 문장으로, 대신 단어를 빼거나 사전에 명시되지 않은 뜻을 쓰거나 하지 않으면서 번역을 해 봤다.

 

  1. 첫 문장은 지금의 설명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고, 두 번째 문장. 의미는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두 가지, (1) 그 뜻을 분명히 하도록 적당히 말을 첨가할 수 있다 와 (2) 직역의 원칙을 그대로 지킨다 사이에서 한 번 더 고민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의 뜻이 더 분명하게 전달되려면, 내 생각으로는 ‘—해 본 들, 결국 저쪽에서 꿀꺽 해 버릴 것이 아니냐는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의 어조가 살아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 would become clear 이 부분을 두드러지게 해서 저쪽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내 맘대로 말을 추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해지지 않겠는가 부분만 계속해서 만 확실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임이 확실해지게 된다 등등을 계속 바꾸어 보면서 게중 나은 걸로 골라서 옮겼다.  

 

4.       But trying to make out that virtue ethics does have a distinctively different approach by listing putatively distinctive and plausible claims it subscribes to, seems to me a needlessly combative task. 세 번째 문장에서는 덕분에 평소에 흐리멍텅하게 써 오던 말의 의미를 점검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경우 맨 처음 distinctively different 란 말을 봤을 때 확연히 다른’ ‘판이하게 다른류의 말이 맨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문장의 의미가 잘 살 것 같다는 확신도 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의 설명과 영어 사전들에 따르면, 판이함이나 확연함은 각각 surely/entirely different 의 의미로 distinctively different 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것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나는 지금 이런 연습을 해 보기 전에는, 어떤 문장을 보고서 직관적으로 파악한 뜻을 실제 저자가 사용한 언어 각각의 뜻 보다 우선시해 왔음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어서였다. 그 점에서 지금 이 책이 철학서적이라는 점이 참 다행스러웠다. 본문에 나온 말을 재인용한다면, 이 점은 보편타당한 원칙까지는 아니겠으나, 전형적으로, 혹은 내 선입견에, 철학전공자가 쓴 텍스트는 최소한의 요건으로 건조하게 작성된 글이라는 가정을 한다. 그래서, 저자의 말은 그 하나하나가 최소한으로 선택된 말들이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그리고 빠짐없이 옮겨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창조력이 발휘되고 내가 마치 작가인 것처럼 몰입해서 하는 번역의 가능성이 있는 문학서적 보다는 현재의 나에게는 이런 철학책이 더 맞는 것 같다.

 

5.       As things are now, the approach is still new enough to be distinctive, and the aim of this book is to explore what insights can be gained into moral philosophy 이 문장에서 insights can be gained into moral philosophy 에서 시간을 좀 썼다. 직역을 하면 도덕 철학 안으로 통찰들이 획득되어질 수 있다  일텐데, 그렇게 옮겼더니 너무 투박해서, ‘도덕철학 내부에 어떤 통찰들이 생기게 있는지를이라고 옮겼다. 역시 직감적으로 약간 크게 변형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지레걱정이 들고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더, 그 다음에 나오는 detailed and comprehensive 를 나는 서로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두 개의 연결로 보고 and 하면서도 하는 으로 옮겼는데, 이 또한 불필요한 개입은 아니었을지 조금 불분명했다. 이 문장은 좀 자신이 없다.

 

6.       If utilitarians and deontologists disagree with what I say then of course I shall want to argue with them, and maybe some of our sticking points will be disagreements over particular theses that, typically, though by no means universally, they espouse and virtue ethicist reject, or vice versa. 이 부분에서는 sticking points 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좀 찾아 봤고, ‘교착에 빠진이라는 용례를 봤지만 튀는 것 같아서, ‘해결이 쉽게 보이지 않는 골치아픈 문제라고 길게 풀었다. 이런 걸 보면, 글을 옮기는 사람 자신의 언어역이 관건인 것 같다. 내 눈에 어색하거나 낯선 말이 정말 그 말이 어색한 말이라서 그런지 내가 그 언어의 쓰임을 볼 일이 적어서 그런지 

 

7.       여기서 오역 하나를 찾았다. But  maybe not. And if they were to agree, and their only protest was ‘But we can say that too-that’s a utilitarian (or a deontological) thesis’, 이 문장을 옮길 때 나는 무심코, theses 를 연구주제, 논제 등으로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사전을 펴 보니, the·sis[ sis] /논제(), 의제./2. (작문 등의) 제목.3. 학위 논문, 졸업 논문./4. 철학 (논증되어야 ) 명제(命題), 정립(), 테제./5. 음악 (지휘봉을 내리그으며 지시하는) 하박(下拍), 강박(强拍)(소절(小節)중의 센박/6. 운율 약음절 시각(詩脚); 장음 시각. 이라 되어 있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에서는 어떤 이론의 명제를 설명할 때 proposition 이라는 말을 거의 통일되게 사용해서, thesis 의 명제라는 말 뜻은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내용을 놓고 보면 명제라는 말이 더 적합해 보이고, 따라서 그 앞선 본문에 아마도 한 번쯤 나왔던 그와 같은 말도 연구주제, 논제가 아니라 명제로 바꿔야 맞겠다.

 

  1.  I should not be inclined to argue at all; I should be delighted. 이 문장을 옮기다 말고는 갑자기 세미콜론의 쓰임이 헛갈려서 일찍 마칠 수도 있었던 일을 오래 끌게 됐다. 내용을 살리려면 어쩐지 세미콜론 자리에 오히려라는 말을 넣어야 좋을 것 같은데, 기존에 알고 있던 세미콜론의 의미는 독립된 두 문장의 연결이라서 실제 올릴 때는 뺐다. 과연 이 문장에서 따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가 적절할지 아니면 따지지 않을 것이고, 기뻐할 것이다로 해아 맞을지 아직 분명치가 않다.

 

  1. Let us by all means stop caring about how we distinguish ourselves and welcome our agreements. 마지막 문장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좋은 문장이 떠올랐으면 했다. 이것저것 생각해 봤지만 결국은 평범하게 옮겼다.
  2. 이번 본문은 저자의 철학함의 태도가 참 잘 드러나는 문장들이라고 생각했다.

 

* 이어지는 13, 14  번째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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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eper reason for the demand that we should come up with a crisp answer to ‘What is virtue ethics?’, I suspect, is the persistence of the belief that virtue ethics is not, as I claimed above, ‘a rival to deontological and utilitarian approaches, as interestingly and challengingly different from either as they are from each other’. The suspicion is that, if only the virtue ethicists could be induced to state their position baldly, in a short list of theses, it would become clear that any of the theses that were not obviously and ludicrously false or indefensible could be accommodated by deontology or utilitarianism. But trying to make out that virtue ethics does have a distinctively different approach by listing putatively distinctive and plausible claims it subscribes to, seems to me a needlessly combative task. As things are now, the approach is still new enough to be distinctive, and the aim of this book is to explore what insights can be gained into moral philosophy when it is spelt out in a really detailed and comprehensive way. If utilitarians and deontologists disagree with what I say then of course I shall want to argue with them, and maybe some of our sticking points will be disagreements over particular theses that, typically, though by no means universally, they espouse and virtue ethicist reject, or vice versa. But  maybe not. And if they were to agree, and their only protest was ‘But we can say that too-that’s a utilitarian (or a deontological) thesis’, I should not be inclined to argue at all; I should be delighted. Let us by all means stop caring about how we distinguish ourselves and welcome our agreements.

 

 

짐작컨대 ‘덕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덕 윤리학자들의 명확한 답변이 나와야 한다는 요구가 있게 되는 더 깊은 이유는 위에서 주장했듯이, ‘덕 윤리학이 의무론과 공리주의적 접근이 서로 다른 것처럼, 그 둘 중 어느 하나와 흥미로우면서도 논쟁을 유발할만큼의 차이를 보이는 경쟁자적 견해’ 가 아니라는 계속되는 믿음에 있지 않은가 싶다. 의심스러운 것은, 만일 덕 윤리학자들에게만 명제들을 모은 짧은 목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천명해 보라고 유도한다면, 명백하고 어이없는 정도로 잘못됐거나, 옹호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면 그 중 어느 것이든 의무론이나 공리주의로 흡수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로 특별히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음을, 덕 윤리학이 잠정적으로 맡아 놓은 주장들, 특수하고 타당해 보이는 주장들을 늘어 놓으면서 이해시키려는 것은 내게는 불필요한 공격성을 띤 임무처럼 보인다. 지금 상태로는, 덕 윤리학은 여전히 고유할 정도로 충분히 새로우며, 이 책의 목적은 덕 윤리학의 접근법을 아주 상세하면서도 포괄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때, 도덕철학 내부에 어떤 통찰들이 생기게 할 수 있는지를 찾아 보려는 것이다. 만일 공리주의자들과 의무론자들이 내가 말한 바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맞서 논쟁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해결이 보이지 않는 골치아픈 문제들 중 일부는, 결코 보편적이지는 않겠으나 전형적으로, 그들은 지지하고 덕 윤리학자들은 반대하는, 혹은 그 반대인, 특정한 논제에 대한 이견이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동의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항의가 ‘그러나 우리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공리주의의 (혹은 의무론의) 명제다’ 라면, 나는 논쟁을 벌이겠다는 의향을 전혀 품지 않을 것이며, 매우 기뻐할 것이다. 부디 우리를 두드러지게 하는 데 쏟고 있는 관심을 멈추고, 서로가 동의하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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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eper reason for the demand that we should come up with a crisp answer to ‘What is virtue ethics?’, I suspect, is the persistence of the belief that virtue ethics is not, as I claimed above, ‘a rival to deontological and utilitarian approaches, as interestingly and challengingly different from either as they are from each other’. The suspicion is that, if only the virtue ethicists could be induced to state their position baldly, in a short list of theses, it would become clear that any of the theses that were not obviously and ludicrously false or indefensible could be accommodated by deontology or utilitarianism. But trying to make out that virtue ethics does have a distinctively different approach by listing putatively distinctive and plausible claims it subscribes to, seems to me a needlessly combative task. As things are now, the approach is still new enough to be distinctive, and the aim of this book is to explore what insights can be gained into moral philosophy when it is spelt out in a really detailed and comprehensive way. If utilitarians and deontologists disagree with what I say then of course I shall want to argue with them, and maybe some of our sticking points will be disagreements over particular theses that, typically, though by no means universally, they espouse and virtue ethicist reject, or vice versa. But  maybe not. And if they were to agree, and their only protest was ‘But we can say that too-that’s a utilitarian (or a deontological) thesis’, I should not be inclined to argue at all; I should be delighted. Let us by all means stop caring about how we distinguish ourselves and welcome our agre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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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Life with Open Bible, 1885

 

 

 

좀 전에 노래 한 곡을 올렸는데 혹시 너무 감상적인 혹은 사적인 마음가짐으로 쓰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아한참 작업 분위기 낼 때 들었던 노래로 바꾸어 올렸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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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밝힐 것. 각주는 두 개가 아니라 이번 것 빼고 여덟개였다. 미리 서문의 한 반쯤을 영문으로만 타이핑을 해서 옮겨 두었었는데 그때 꼼꼼히 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었다. 지난 번 것 까지는 텍스트와 번역본에 모두 옮겨 넣었고, 문헌의 이름과 저자 정도만을 언급한 각주는 따로 옮기지 않았다. 설령 한 두 줄쯤의 말이 덧붙여 있더라도, 꼭 옮겨야만 할 내용이 아니라면 본문과 번역본에 영문을 옮겨 두는 정도로 넘길까 싶다. 마찬가지로 본문을 옮길 때 몇 단어를 빼고 올렸다. 옮기기는 책을 놓고 하면서 올리기는 미리 필사해 둔 것으로 했더니 이렇다. 다행히 미리 타이핑 해 둔 내용이 곧 바닥이긴하고, 그 자리에서 옮겨 올린다고해서 이런 실수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주의하기로.

 

2.       지난 번 본문이 꽤 까다로웠던 것인지, 그때 헤맨 덕분에 가닥을 잡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무래도 다 못할 것 같아서 어제 미리 몇 번을 읽어 두어서인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레 쓰고 옮기고 읽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두통약을 먹고 그랬는데, 그에 비하면 일찍 마쳤고, 옮기는 일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시선의 허리를 펴서 내용도 한번쯤 쳐다 볼 수 있었다.

 

3.       I say ‘corrupted’ because it has become all too common to allow a vague concept of justice and rights to encompass large areas of morality that virtue ethicists believe are better dealt with in terms of other, more concrete, virtues. 첫 문장. 어떡해서건 타락의 의미에 잘 들어맞게 이 문장을 풀어야겠다는 괜한 부담이 있었다. 거꾸로, 그게 아니라, 이 문장의 뜻에 맞게 지난 번 말이 잘 선택됐는지를 생각해야 맞지 않느냐는 생각이 좀 지나 제대로 들었다. 옮겨 놓고 보니 corrupt 를 타락으로 할 경우 약간 튀는 것 같고 조금 덜 적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말의 다른 뜻이 더 나은 것 같지도 않아서 그대로 두었다.

 

4.       Too common to 에서의 common 이 다음에 나오는 vague 모호함의 의미를 받아야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느슨해서, 기준이 없이, 되는대로, 원칙없이의 뜻을 받는 말을 찾고 싶었지만  사전적 의미로는 발견하지 못했다. 한 가지 헛갈렸던 점은 a vague concept of 에서 그것이 관련된 말이 justice 하나인지 아니면 rights 까지인지였다. 내용만 보면 둘 다를 받아도 무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굳이 vague concepts of 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1. 조금 아래의 문장에서 나온 killing 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고, 확인도 하기 위해서 웹검색을 했다. 어느 글에서 다음의 구절을 읽고 새로웠고, 도움이 되었다. 그 덕분에 먼저는 허용하기 때문에로 당연하게 옮긴 allow 내버려두다로 바꿀 수 있었다. 더 나은 번역이라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평할 수 있었다. 아래는 참고로.

 

6.       한편, '허용하다'라는 말의 애매성은 단지 우리말에만 특수하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자연 언어들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인 것같다. 예를 들어, 영어 표현 'to allow'에는 적어도 서로 다른 가지 의미들이 있는 같다. 우선, 막을 있는데도 막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이런 의미로 어떤 사건 X allow 한다는 것은 다음의 것들을 전제하고 있다. , X 가져올 일련의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고, 문제의 도덕 행위자에게는 X 일어나지 않게 간여할 있는 능력이 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함정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경고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함정에 빠지도록 allow 하는 것이다. 하지만, allow에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푸트가 논증하기를, 그것은 능력을 부여하는 (enabling) 대체로 동등한 부류의 허용(allowing)이다. 경우의 핵심을 말하자면 일련의 사건들을 제지하고 있는 장애물의 제거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마개를 뽑아서 물이 흐르게 내버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을 열어 놓아 동물이 밖으로 뛰쳐나가도록 내버려 있을 것이며, 그런가 하면 또한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어 그를 자립하도록 허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임/죽게 내버려둠에 관한 레이첼스의 견해에 대하여-구영모의 중에서)

 

7.       what is wrong with lying, when it is wrong, is not that it is unjust (because it violates someone’s right to the truth’ or their ‘right to be treated with respect’) but that is dishonest, and dishonesty is a vice. 이 문장과 그 아래의 문장에서 wrong 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wrong 틀렸다, 잘못이다, 그르다, 나쁘다뜻 모두를 포괄하고 있으나 아마도 여기서의 저자는 덕 윤리학의 의미가 담긴 wrong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때문에. 웹 검색 대신 책을 몇 장 뒤적이다가 다음을 찾아 읽었다. (그 내용은 참고글로 여기 옮겨 두었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0879 )

 

8.       내용을 보면, 덕 윤리학에서는 그릇됨 보다는 나쁨을 고유한 의미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wrong 을 나쁨의 의미로 받았다. 어떤 식으로건 일관되게 말을 옮길 수 있었으면 했는데 역시 내용을 알고, 그 내용에 근거할 때라야 가능한 기대였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옮겨 본 글 자체가 좀 어려워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추가로, 반복해서 나오는 when it is wrong 제한의 의미(혹은 전제의 의미)’ 로 옮겼다.

 

9.       위에서도 적었지만, Killing 은 살인/살해 보다는 넓은 의미의 죽임인 듯해서 그렇게 옮겼다. 한 가지, What is wrong with killing, when it is wrong, may be not so much that it is unjust, violating the right to life, but, frequently, that it is callous and contrary to the virtue of charity. 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frequently 의 쓰임이었다. 저자가 왜 저기서 굳이 always 가 아닌 frequently 를 썼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만약 frequently 가 내가 이해한대로 자주, 대개, 주로의 의미라면 그것은 when it is wrong 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 이미 앞에서 어느 경우를 (조건을) 제한했는데 왜 다시 한정의 성격이 있는 수식어를 썼는지. 혹시나 해서 frequently 의 여러 의미를 찾아 보고 동의어 사전도 보았는데

 

10.    오늘의 후기에서 내가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이 Charity 의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비록 서문 옮기는 정도라고는 하나),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자선, 자비로 옮겨도 될런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런 의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왔는데, 첫 번째는 덕 윤리학이 말하는 charity 가 의무론 등에서 전제하는 자비, 즉 남을 가엾게 여겨서 돈과 같은 물질적인 혜택을 베푸는 행위와 같은 지를 확인할 길 없어서 그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나머지 이유는, 대단히 막연한 수준으로 쓸 수밖에 없기는 하나, 나는 근본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자비라는 말이 상호소통하는 말로써 적합한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 나는 자비와 자애는 신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와 죄많고 부족한 인간의 관계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현재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자비, 자선이란 말에는 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선과 자비의 (사회화되고 역사가 묻은) 이름하에 위선과 가식을 보이거나, 그 결과 그 대상자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결국 그 뜻이 훼손되고, 그것이 아니면 실제 자비의 연민과 동정의 마음에 담긴 순수함과 진정함이 곡해되거나 의심받음으로써 감정과 정서가 빠진 제도나 규범와 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형식만이 남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비자선의 말 뜻이 회복되거나 아니면 차라리 그 말은 종교적 의미가 큰 것으로, 그리고 큰 존재가 인간에게 주는 것을 설명하는 말로 제한하고 우리는 인간애, 사랑의 원칙이라는 말 정도로 바꾸어 쓰면 어떨까 싶다. 나는 동정과 연민가 베품의 마음(과 그 회복) 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11.    Could human beings even sustain social union, let alone a just one, if parents did not love their children, and if there were no such things as what Aristotle describes as ‘civic friendship’? 여기서의 civic friendship 을 어떻게 옮겨야 좋을지가 쉽지 않았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 고유의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고 검색을 해 봤지만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던 예상과 달리 명시된 번역어가 없었다. 참고로 아래의 글은 보았고, 읽어 보면서 은유적 표현 대신 완전한 직역을 해 두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it is bound to be unable to give an account of justice or political morality.  에서는 역시 한글 웹페이지 검색으로는 political morality 의 통일된 번역어를 찾을 수 없어서 직역을 했다.

 

12.    To open this space, I want to take up analyses of citizenship as a form of friendship, and to consider possible analogies between civic friendship and personal friendship. Reading political solidarity on the model of friendship has a long lineage, most famously in Aristotle’s work, and has been taken up more recently by political philosophers as diverse as Alasdair MacIntyre on the one hand, and feminist theorists of coalition like María Lugones and Elizabeth Spelman on theother.7Analogies between civic and personal friendship are useful first of all because they draw attention to affective connections between persons, allowing us to unpack assumptions about the role of sameness or difference in constituting these bonds. Secondly, in returning to Aristotle’s own analysis ofcitizenship as a form of friendship we find an emphasis on sameness as bond, an emphasis consonant with many contemporary analyses.

 

13.    참고글을 타이핑 하다가 이미지를 찾게 됐는데, 그때 문득 (덕의 부활이란 책의 이미지를 보다가) ‘철학과 현실사와 같은 출판사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책이 번역중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급히 찾아 보았는데 그 출판사에는 홈페이지가 없다는 정보만을 얻었다. 예전에 어느 게시판에서 책 소개를 하는 글과 관련해서 나왔던 글이 생각났다. 그 책의 저자가 현재 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 중 적지 않은 수가 홈페이지 하나 갖기(관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세하다는 말을 했었다. 얼핏, 개인도 홈페이지 만들고 운영하고 그러는데 왜 홈페이지 하나를 못 갖겠는가, 의지가 있다면 왜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는 했었는데그렇게 볼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차차 들었다. 그때의 단상이..품절 표시가 붙은 덕의 부활이라는 책 이미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들었고, 그래서 오늘은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림이 없어서 그림없이 올리겠구나 했던 마음을 바꾸어서 이 마지막 말 쓰면서 생각 난 그림을 올려 본다. 고흐의 정물 그림 중 하나.   

 

 

아래는 11, 12 번째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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