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Life with Open Bible, 1885

 

 

 

좀 전에 노래 한 곡을 올렸는데 혹시 너무 감상적인 혹은 사적인 마음가짐으로 쓰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아한참 작업 분위기 낼 때 들었던 노래로 바꾸어 올렸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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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밝힐 것. 각주는 두 개가 아니라 이번 것 빼고 여덟개였다. 미리 서문의 한 반쯤을 영문으로만 타이핑을 해서 옮겨 두었었는데 그때 꼼꼼히 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었다. 지난 번 것 까지는 텍스트와 번역본에 모두 옮겨 넣었고, 문헌의 이름과 저자 정도만을 언급한 각주는 따로 옮기지 않았다. 설령 한 두 줄쯤의 말이 덧붙여 있더라도, 꼭 옮겨야만 할 내용이 아니라면 본문과 번역본에 영문을 옮겨 두는 정도로 넘길까 싶다. 마찬가지로 본문을 옮길 때 몇 단어를 빼고 올렸다. 옮기기는 책을 놓고 하면서 올리기는 미리 필사해 둔 것으로 했더니 이렇다. 다행히 미리 타이핑 해 둔 내용이 곧 바닥이긴하고, 그 자리에서 옮겨 올린다고해서 이런 실수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주의하기로.

 

2.       지난 번 본문이 꽤 까다로웠던 것인지, 그때 헤맨 덕분에 가닥을 잡아서 그런지, 아니면 아무래도 다 못할 것 같아서 어제 미리 몇 번을 읽어 두어서인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레 쓰고 옮기고 읽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두통약을 먹고 그랬는데, 그에 비하면 일찍 마쳤고, 옮기는 일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시선의 허리를 펴서 내용도 한번쯤 쳐다 볼 수 있었다.

 

3.       I say ‘corrupted’ because it has become all too common to allow a vague concept of justice and rights to encompass large areas of morality that virtue ethicists believe are better dealt with in terms of other, more concrete, virtues. 첫 문장. 어떡해서건 타락의 의미에 잘 들어맞게 이 문장을 풀어야겠다는 괜한 부담이 있었다. 거꾸로, 그게 아니라, 이 문장의 뜻에 맞게 지난 번 말이 잘 선택됐는지를 생각해야 맞지 않느냐는 생각이 좀 지나 제대로 들었다. 옮겨 놓고 보니 corrupt 를 타락으로 할 경우 약간 튀는 것 같고 조금 덜 적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말의 다른 뜻이 더 나은 것 같지도 않아서 그대로 두었다.

 

4.       Too common to 에서의 common 이 다음에 나오는 vague 모호함의 의미를 받아야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느슨해서, 기준이 없이, 되는대로, 원칙없이의 뜻을 받는 말을 찾고 싶었지만  사전적 의미로는 발견하지 못했다. 한 가지 헛갈렸던 점은 a vague concept of 에서 그것이 관련된 말이 justice 하나인지 아니면 rights 까지인지였다. 내용만 보면 둘 다를 받아도 무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굳이 vague concepts of 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1. 조금 아래의 문장에서 나온 killing 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고, 확인도 하기 위해서 웹검색을 했다. 어느 글에서 다음의 구절을 읽고 새로웠고, 도움이 되었다. 그 덕분에 먼저는 허용하기 때문에로 당연하게 옮긴 allow 내버려두다로 바꿀 수 있었다. 더 나은 번역이라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평할 수 있었다. 아래는 참고로.

 

6.       한편, '허용하다'라는 말의 애매성은 단지 우리말에만 특수하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자연 언어들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인 것같다. 예를 들어, 영어 표현 'to allow'에는 적어도 서로 다른 가지 의미들이 있는 같다. 우선, 막을 있는데도 막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이런 의미로 어떤 사건 X allow 한다는 것은 다음의 것들을 전제하고 있다. , X 가져올 일련의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고, 문제의 도덕 행위자에게는 X 일어나지 않게 간여할 있는 능력이 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함정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경고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함정에 빠지도록 allow 하는 것이다. 하지만, allow에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푸트가 논증하기를, 그것은 능력을 부여하는 (enabling) 대체로 동등한 부류의 허용(allowing)이다. 경우의 핵심을 말하자면 일련의 사건들을 제지하고 있는 장애물의 제거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마개를 뽑아서 물이 흐르게 내버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을 열어 놓아 동물이 밖으로 뛰쳐나가도록 내버려 있을 것이며, 그런가 하면 또한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어 그를 자립하도록 허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임/죽게 내버려둠에 관한 레이첼스의 견해에 대하여-구영모의 중에서)

 

7.       what is wrong with lying, when it is wrong, is not that it is unjust (because it violates someone’s right to the truth’ or their ‘right to be treated with respect’) but that is dishonest, and dishonesty is a vice. 이 문장과 그 아래의 문장에서 wrong 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wrong 틀렸다, 잘못이다, 그르다, 나쁘다뜻 모두를 포괄하고 있으나 아마도 여기서의 저자는 덕 윤리학의 의미가 담긴 wrong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때문에. 웹 검색 대신 책을 몇 장 뒤적이다가 다음을 찾아 읽었다. (그 내용은 참고글로 여기 옮겨 두었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0879 )

 

8.       내용을 보면, 덕 윤리학에서는 그릇됨 보다는 나쁨을 고유한 의미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wrong 을 나쁨의 의미로 받았다. 어떤 식으로건 일관되게 말을 옮길 수 있었으면 했는데 역시 내용을 알고, 그 내용에 근거할 때라야 가능한 기대였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옮겨 본 글 자체가 좀 어려워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추가로, 반복해서 나오는 when it is wrong 제한의 의미(혹은 전제의 의미)’ 로 옮겼다.

 

9.       위에서도 적었지만, Killing 은 살인/살해 보다는 넓은 의미의 죽임인 듯해서 그렇게 옮겼다. 한 가지, What is wrong with killing, when it is wrong, may be not so much that it is unjust, violating the right to life, but, frequently, that it is callous and contrary to the virtue of charity. 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frequently 의 쓰임이었다. 저자가 왜 저기서 굳이 always 가 아닌 frequently 를 썼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만약 frequently 가 내가 이해한대로 자주, 대개, 주로의 의미라면 그것은 when it is wrong 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 이미 앞에서 어느 경우를 (조건을) 제한했는데 왜 다시 한정의 성격이 있는 수식어를 썼는지. 혹시나 해서 frequently 의 여러 의미를 찾아 보고 동의어 사전도 보았는데

 

10.    오늘의 후기에서 내가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이 Charity 의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비록 서문 옮기는 정도라고는 하나),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자선, 자비로 옮겨도 될런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런 의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왔는데, 첫 번째는 덕 윤리학이 말하는 charity 가 의무론 등에서 전제하는 자비, 즉 남을 가엾게 여겨서 돈과 같은 물질적인 혜택을 베푸는 행위와 같은 지를 확인할 길 없어서 그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나머지 이유는, 대단히 막연한 수준으로 쓸 수밖에 없기는 하나, 나는 근본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자비라는 말이 상호소통하는 말로써 적합한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 나는 자비와 자애는 신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와 죄많고 부족한 인간의 관계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현재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자비, 자선이란 말에는 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선과 자비의 (사회화되고 역사가 묻은) 이름하에 위선과 가식을 보이거나, 그 결과 그 대상자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결국 그 뜻이 훼손되고, 그것이 아니면 실제 자비의 연민과 동정의 마음에 담긴 순수함과 진정함이 곡해되거나 의심받음으로써 감정과 정서가 빠진 제도나 규범와 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형식만이 남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비자선의 말 뜻이 회복되거나 아니면 차라리 그 말은 종교적 의미가 큰 것으로, 그리고 큰 존재가 인간에게 주는 것을 설명하는 말로 제한하고 우리는 인간애, 사랑의 원칙이라는 말 정도로 바꾸어 쓰면 어떨까 싶다. 나는 동정과 연민가 베품의 마음(과 그 회복) 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11.    Could human beings even sustain social union, let alone a just one, if parents did not love their children, and if there were no such things as what Aristotle describes as ‘civic friendship’? 여기서의 civic friendship 을 어떻게 옮겨야 좋을지가 쉽지 않았다. 분명, 아리스토텔레스 고유의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고 검색을 해 봤지만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던 예상과 달리 명시된 번역어가 없었다. 참고로 아래의 글은 보았고, 읽어 보면서 은유적 표현 대신 완전한 직역을 해 두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it is bound to be unable to give an account of justice or political morality.  에서는 역시 한글 웹페이지 검색으로는 political morality 의 통일된 번역어를 찾을 수 없어서 직역을 했다.

 

12.    To open this space, I want to take up analyses of citizenship as a form of friendship, and to consider possible analogies between civic friendship and personal friendship. Reading political solidarity on the model of friendship has a long lineage, most famously in Aristotle’s work, and has been taken up more recently by political philosophers as diverse as Alasdair MacIntyre on the one hand, and feminist theorists of coalition like María Lugones and Elizabeth Spelman on theother.7Analogies between civic and personal friendship are useful first of all because they draw attention to affective connections between persons, allowing us to unpack assumptions about the role of sameness or difference in constituting these bonds. Secondly, in returning to Aristotle’s own analysis ofcitizenship as a form of friendship we find an emphasis on sameness as bond, an emphasis consonant with many contemporary analyses.

 

13.    참고글을 타이핑 하다가 이미지를 찾게 됐는데, 그때 문득 (덕의 부활이란 책의 이미지를 보다가) ‘철학과 현실사와 같은 출판사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책이 번역중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급히 찾아 보았는데 그 출판사에는 홈페이지가 없다는 정보만을 얻었다. 예전에 어느 게시판에서 책 소개를 하는 글과 관련해서 나왔던 글이 생각났다. 그 책의 저자가 현재 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 중 적지 않은 수가 홈페이지 하나 갖기(관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세하다는 말을 했었다. 얼핏, 개인도 홈페이지 만들고 운영하고 그러는데 왜 홈페이지 하나를 못 갖겠는가, 의지가 있다면 왜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는 했었는데그렇게 볼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차차 들었다. 그때의 단상이..품절 표시가 붙은 덕의 부활이라는 책 이미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들었고, 그래서 오늘은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림이 없어서 그림없이 올리겠구나 했던 마음을 바꾸어서 이 마지막 말 쓰면서 생각 난 그림을 올려 본다. 고흐의 정물 그림 중 하나.   

 

 

아래는 11, 12 번째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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