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풋한 별빛이 아직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다. 다른 별들은 슬슬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샛별만은 아직도 그 자리에 붙박힌체 영화에서처럼 십자형태를 그리며 반짝거린다. 집 대문을 닫고 골목길을 5분쯤 걸었다. 새벽빛이 슬그머니 올라오기 시작하고 자욱한 아침안개 사이로 주홍빛 미등이 보인다. 그 빛을 확인하고도 내 발걸음은 조금도 빨라지지 않는다.  

 '놓치면 말지 뭐.., 어차피 지금 시간이면 걸어가도 다른얘들보다 빨리 도착할텐데..' 

  괜히 첫날부터 배짱을 튀긴다. 정말로 놓쳐버리면 걷다 지쳐서 등교길의 반은 투덜거리느라 입만 아플테면서... 

  항상 타는 버스는 이제 마을버스가 아니라 스쿨버스와 같은 존재감이 느껴진다. 내가 느긋하게 걷더라도 아저씨는 5분정도는 더 기다려 줄 것이다. 벌써 삼년째다. 새벽 여섯시. 마을버스를 타고 꼭 맞게 10분정도 후면 학교에 도착한다. 수위아저씨보다 먼저 학교를 활보하며 교무실 불을 켜고 열쇠함에서 우리반 교실키를 가지고 간 것이 삼 년... 아마 아저씨는 몰랐을 것이다. 3년 동안 자신이 늦잠을 자는 날이면 어김없이 교무실 불을 켜준 사람이 매번 같은 학생이였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느긋하게 늦잠을 즐길 수도 없다는 것을... 

  물론 오늘도 나는 그 곳에 내렸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내가 걷는 방향은 정 반대방향이다. 오늘은 고등학교 입학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우리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하나의 교문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있다. 이 교문을 3년동안 넘나들었고, 앞으로도 3년동안 넘나들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교실키를 가지러 가기 위해 교무실 불따위를 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는 교실문을 잠그지 않았으니까... 

  실내화로 갈아 신고나서 아직은 불빛이 다 스며들지 못한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확실히 고등학교는 입시위주라니까! 신입생을 맨 꼭대기층에 올려보내다니.. 오히려 운동은 고3들이 더 많이 해야하는 거 아닌가? 죈종일 책상에 앉아 먹먹히 칠판만 처다볼텐데...투덜투덜 대는 나의 목소리가 차가운 벽을 때리고 내귀에 머문다. 신발주머니를 무릎으로 튕겨내며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푸르스름한 빛이 책상 위를 스친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창가쪽 끝에서 두번째 자리에 가방을 대충 던져 놓고 앉아 아직은 쌀쌀한 3월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다음번에 교실로 들어서는 녀석들이 춥다고 난리를 치겠지..찬 이슬이 얼굴에 총총히 맺힌다. 아 무 생 각 없 이..진실로 아무 생각없이 가로등과 안개, 텅빈 운동장, 내가 걸어온 진입로의 시린나무들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꽊꽉 들어찬 불만들이 하나씩 없어지자 슬슬 새로운 생각들이 들어찬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100m쯤 뒤로 이동한 교실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중학교 시절을 보낸 반 친구들의 모습이 맺힌다. 진로가 달라지면서 뿔뿔히 다른 학교로 흩어져 버린 3달 전의 반 친구들... 지금쯤 일어나 씻고 있겠지? 학교가 먼 얘들은 벌써 일어나 밥을 먹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지 몰라.. 그들 중 절반은 이곳을 향하고 절반은 다른 곳을 향해 갈테지.. 

  그때 멀리서 남학생 하나가 진입로를 따라 실내화를 질질 끌며 어슬렁거린다. 나처럼 할일 없는 사람이 또 있네! 한참을 주시해서 보고 있는데 내가 있는 건물 옆에서 발걸음을 획 틀어서 다른 동으로 간다. 아~ 고3 양반이구만! 그럼 그렇지.. 고3이 아니고서야 이 시간에 학교에 오는 미친놈은 없지.. 뭐.. 물론 난 미쳤으니까!! 

  고3은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건물동에 배치되어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건물 왼편에 2층짜리 건물인데, 1층에는 교장실, 양호실과 과학실, 3년 내내 절대로 발 한번 않 디밀꺼 같은 상담실이 있고, 2층은 3학년 교무실과 교실이 있다. 교실과 복도가 일렬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교실이 마주보고 있는 형태라 여름이면 무척 덥다는 소문이 있다. 동떨어진 동이라 조용하긴 하지만 덥다는 것. 그래서 여름이 되면 코피터지게 선풍기아래 자리싸움을 한다는 것. 각종 학교 행사가 있을 땐 건물 입구를 아예 폐쇄해서 하교 시간에만 내보낸다는 것 등등... 벌써부터 저 건물로 들어가게 될 때가 두렵다. 물론 더위때문이 아니라 고3이라는 특별 수식어 때문에... 

 

 아참!! 왜 이렇게 아침일찍 학교를 오는 미친짓을 하냐고? 그정도로 학교를 사랑하는 거냐고? 풉. 절대 아니지..너는 학교의 공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아침 일찍 학교의 공기는 신선하다. 아이들이 꽉 차 있을때의 교실에서 피어나는 먼지와 소음, 땀냄새.. 이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다른 곳이다. 단순히 공기 흡입하려고 학교를 이시간에 온다고 생각하는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난 생각이 많다. 집에서는 가족눈치로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선생님눈치로 내 생각을 정리할 마땅한 시간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슬슬 내 머릿속에 살림을 차리고 앉은 벌레들이 와글와글 거리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는 통에 여간 머리가 아픈게 아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이놈들을 찾아 헤집어 놓지 않으면 그날은 하루종일 하늘이 슬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무도 없는 이 시간에 학교에 와 있는 것을 좋아한다. 넓은 공간속으로 나의 작은 머이속에 비집고 들어와 있던 갖은 잡념들이 하나씩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득 채우면 어제의 슬픔도, 매서운 눈빛들도 하나씩 기억에서 지워지고 만다. 애들이 하나씩 차기 시작하는 7시까지 한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그냥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면 어디서부턴가 마음이 안개처럼 조금씩 젖어들어 동요되었던 흔들림도, 멈추질 않았던 욕심들도 다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날씨가 맑겠구나. 안개가 햇빛으로 묽어지자 군청색 무리들이 떼지어 걸어온다. 또 다른 버스가 교문 앞에 서자 우르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시야에서 가까워지자 다른 중학교에서 온 우리반 아이도 보인다. 이크! 그 아이가 우리반 교실을 올려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와있었냐고 물으면 방금전에 왔다고 둘러대야지.. 그나저나 창문을 닫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이가 처다보고 있는데 냅다 닫아버리면 왠지 쌀쌀맞아 보일 것 같고.. 열어두자니 오자마자 춥다고 난리칠 것 같고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사이에 아이가 없어졌다. 계단을 올라오고 있나보다. 나는 재빨리 창을 닫고 교실 불을 켰다. 이 추위에 창문을 열어 놓은 건 어찌됐건 간에 불이라도 안 켜두면 나를 완전 싸이코로 생각할지도 몰라..교실문이 열리고 아이가 들어온다. 아이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젠장.. 왜 춥게 문을 열어놨었냐고 하며 뭐하고 하겠지? 녀석을 처다보자 그때까지 내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들킨 것 처럼 고개를 황급히 돌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앞쪽 가운데 자리에 앉아버린다.. 여전히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어? 그냥 저냥 넘어가나본데.. 아까 그 초속 백만킬로미터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행동은 뭐지? 아~ 몰라몰라~ 초면이라 어색했나보지 뭐.. 

하지만..이건 나의 착각이였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아이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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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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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의 작가 김려령이 이번에 우리 앞에 펼쳐놓은 이야기는 완득이와는 전혀 다른 회색빛 시절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시민.. 소시민 가정의 평범한 집안환경(여기서 평범하는 것은 평균적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흔히 있다는 뜻이다)에서 살며, 평범한 학교생활을 겪는 과거의 우리였으며, 현재의 학생들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아니 설마.. 이게 큰 문제가 될까? 하는 문제를 떠안고 있는... 내일을 준비하던 소녀의 자살로부터 시작된다. 천지..그 아이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추억할 수 있을까? 

작가는 이 책을 우리에게 풀어놓게 된 이유를 솔직히 고백한다. 그녀 자신 또한 천지와 비슷한 나이에 삶을 내려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사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문제로 인하여 혹은 타인에 영향에 의하여 누구나 한번쯤 자살을 깊이 고려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나이를 지나 온 우리는 말한다. 삶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그들을 향해.. 그런 의지라면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때, 충동감이 온 몸을 지배하는 나를 죽이는 현장에서 운 좋게도 살아남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민감하게 느껴지는 시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있는 시기.. 차가운 말 한마디가 수백개의 바늘이 되어 온 몸에 박혀버리는 시기.. 관심어린 한마디가 평생 되새김질하게 하는 시기..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시기.. 거짓웃음을 누구보다 더 잘 지어낼 수 있는 시기..그렇기에 아무도 그 진실을 쉽게 알수 없게 하는 시기.. 죽음 뒤에도 슬픔보다 “왜?”하는 의아함이 들게 만들어버리는 시기..

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너무 모르는게 아닌가 싶다. 자신에게 보여지는 표정과 자신에게 들려지는 말로서 사람을 대한다. 그가 너무 우울한 마음을 지녔더라고 미소짓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일이든 덤덤한 표정을 하면 아픔 따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가 싶다. 그들에게 우아한 거짓말을 해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집단이 주는 안락함에 빠져 자신이 튕겨나가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결속력을 갖기 위해(공범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다른 희생양을 삼고,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쏠리지 않도록 모호한 행동과 우아한 거짓말로 상처를 주는 아이들..

나 또한 학창시절 한 아이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적이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때 우리반 아이의 가히 절반에 가까운 아이들이 한 아이로부터 일시적 따돌림을 받은 경우가 있다. 공교롭게도 한 무리내에서 자신도 모르게.. 서로가 서로를 따돌리도록 조종을 당했다고나 할까? A도 따돌림을 받고 있지만 B를 따돌릴 때에는 A역시 좋은 동조자가 될 수 있는 시스템.. 자신이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나 서서히 느끼게 되버리는 시스템을 만든 아이.. 마치 어느 누구라도 따돌리지 않으면 내일이 없는 것처럼 반복되는 이간질.. 후에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나머지 아이들은 따돌림의 시초가 된 그 아이를 세워놓고 물었다. 넌 왜 서로가 서로를 따돌리게 하지 못해 안달이지? 그 아이가 울면서 우리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 반 친구전체로부터 엄청 심한 따돌림을 당했는데(같은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누군지는 몰랐지만 어떤 아이의 책상과 책이 복도밖으로 마구 버려져 있었던..)그 후에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따돌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화연을 보면서 떠올랐던 그아이의 말..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따돌릴 수 밖에 없었다는 말.. 비록 천지는 죽었지만.. 그 아이의 죽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화연도 큰 아픔을 지니고 사는 아이임에 틀림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체가 아픔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무리속에 남아있고 싶은 잘못된 삶을 이어온 아이이기 때문에.. 그런 화연이 천지와 같은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한 만지의 모습에서  그때 그 아이의 입으로부터 빠져나와 교실을 왕왕 울렸던 충격적인 과거속에서도 모두 함께 안고 울며, 그 아이의 잘못을 용서해준 그때 친구들의 얼굴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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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녀 반올림 4
이경화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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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소년에서 청년이 되는 과도기.. 과도기는 불안정하다. 어느 편에도 속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위태롭다. 나 자신도 내가 아이인지 어른인지 분간이 안간다. 사람들은 때로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면서도 어른의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더 혼란스럽다. 그냥 16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16살의 나로만 봐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준희는 아이일까? 어른일까?'나는 아직 꿈이 없다. 꿈이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건 지금 결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준희는 꿈 때문에 부모님과 줄다리기 중이다. 나와 같은 나이인데 벌써 꿈을 정해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녀석을 보니 왠지 부럽고 두렵다. 나는.. 나는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는가...

나의 아빠는 아이같다. 내버려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떻게든 나를 먹여살리고 할머니를 부양해야겠다라는 책임이 없다. 아빠는 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의지도 없다. 그런 아빠에게 난 아이같은 아들이 되어야 할까? 어른같은 아들이 되어야 할까?

나의 그녀는 나의 논술 선생님이다. 나이는 곱절이나 많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나를 아이로 어른으로 구분 짓지 않는다. 그냥 나를 나로 받아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스스럼 없이 말한다. 준희 넌 너를 사랑해야 해! 넌 너무 이상해! 라고..그녀는 잊지 않은 것 같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테지만 어른이 되버리면 싸악~잊어버리는 지금의 많은 고민들을..

 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내 꿈을 정하고, 아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만 내 또래의 여자친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나도 준희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준희보다 더 격하고 혼란했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나도 다른 어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시절이 얼마나 강인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던지간에 어른이 되고 난 후의 나는 이미 그때의 나를 당시의 마음이 아닌 어른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난 후 나의 가까운 사람이 그 시기를 보낼 때 나는 그 아이가 겪는 그 시간들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기 보다 설득하고 다그치고 꾸중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마치 나에겐 그 시절이 편집된 것처럼 행동했다. 나도 너와 같은 시기를 겪어봤어! 난 너 보다 더 했어! 라는 말을 포장으로 씌우고, 너 이딴식으로 할꺼야? 뭐가되려고 그러는 거야? 하는 말을 건네줬던 것이다... 이제 그 아이도 성인이 되었지만 난 아직도 가끔 그때 내가 어른의 모습으로 그 아이를 다그친 것이 몹시 아프고 저리다. 과연 커버린 그 아이도 나와같은 어른이 될까? 마치 그 시절이 없었던 양... 

우리 청소년들은 누구에게 자신들의 속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그들이 인생선배인 어른들에게 얼굴을 붉히며, 하던말을 멈출때.. 어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부디.. 부디.. 준희는 나와 같은 어른이 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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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 - 속수무책 딸의 마지막 러브레터
송화진 지음, 정기훈 각본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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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를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다. 그런데 이런 공감이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가 보다. 

여러 독자들의 서평을 보면 알수 있듯이.. ^^

엄마와 딸사이에는 엄마와 아들사이에선 결코 생성될 수 없는 모종의 정, 질투(?), 같은 여자로서 가지게되는 이해심 그리고 같은 여자라서 가지게되는 경쟁심(?) 등이 있다. 나와 우리엄마 또한 애자와 그의 엄마처럼 속으로는 둘도 없이 사랑하면서도 겉으로는 왕왕 물어뜯기만 했던 시절이있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죽음이 임박한 엄마의 상황이라던가, 서른살이 되도록 마땅한 직업없이 카드 빚에 시달리는 애자의 상황속에 놓여있지 않은 체 엄마와의 사랑표현법이 물어뜯기에서 안아주기로 바뀌었다는 다른점이 있지만... 

단순히 엄마와 딸의 눈물겨운 관계회복기를 그린 책이라면 이렇게 인기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통해 인기를 얻은 후에 영화화 된 다수의 이야기들과는 반대로 시나리오로 먼저 쓰여져 영화를 개봉하고 나서 책이 된 이 이야기는 애자역을 완벽히 소화한 최강희씨와 영희역으로 분신한 김영애씨의 활약덕을 톡톡히 본거 같다. 감히 영화도 안 본 주제에(ㅋㅋ)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예고편만 몇 번 봤을 뿐인데도 내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애자역을 하고 있는 최강희씨와 영희역을 하고 있는 김영애씨가 머리속에서 대사를 외치고, 싸움질을 해대고, 등짝을 후려쳤기 때문이다.ㅋ 분명 글을 읽을뿐인데 음화되어 내귀에 걸죽한 부산 사투리가 들리니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2월이다.. 5월이 대표적인 가정의 달이라 하지만 12월도 만만치 않은 가정의 달이란 생각이 든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를 외치는 내겐 더더욱 그런 달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드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일찍 찾아오는 어둠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이 때가 가장 엄마가 그립고 보고싶을 때라 그런가 보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어느 주말이건 가볼수 있지만 '항상'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것에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런 애틋한 마음을 슬프지만 씩씩한 애자와 함께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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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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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생각이 많아져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빠지지 못하고 한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한다. 참 재미있게 읽히는 책인데.. 책을 다읽고 나니 한동안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이 잘 안된다. 작가의 말도 곱씹어 보고 다른 이들의 독서평도 읽어보았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책을 읽었으니 응당 독서평을 써보자 마음먹기를 며칠째..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가 생각한 말이 맞나 싶어 몇번을 지웠다 고쳐쓴다를 반복한다. 이까짓 소설책 하나 읽고 독후감쓰기를 뭐그리 고민고민하냐고 타박을 해도 어쩔수 없다. 그만큼 나에겐 이 열외인종 잔혹사는 어렵고 쓰다. 

오히려 책을 읽을 때는 별 생각없이 피식피식 웃어가며 술술 넘어갔다. 근데 다 읽고 되새김질을 해보니 이거.. 영 개운치가 않다. 4명의 열외인종이 대한민국에서 결코 겪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황당한 상황속에 놓여진 하루간의 이야기로 읽어 내려가면 참 재미있는 소설이 되지만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생각해보면 풀리지 않는 의문이 몇개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은 이런 의문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 만했다. 과연 나는 이 소설을 작가가 의도한 바 그대로를 실천하며 읽은 것일까?   

작가는 말한다. 경쟁과 착취, 혼돈과 모순 속에서 바로 우리들이 "열외인간"이라고, 그리고 지독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조차 '열외인간'을 벗어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4명이 이러한 열외인간에 속한다는 것인가? 나는 동의 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가 열외시킨 열외인간이라기 보다는 스스로를 열외의 범주속으로 몰아넣은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내세우는 천민자본주의라는 사회풍토 속에서 나 스스로를 열외인간으로 내몰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면 이들 네명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들의 상황을 사회탓으로 돌리기엔  이 들, 주인공의 모습은 공감되지 않는 면이 더 크기때문이다. 내가 다른사람보다 타인에 대해 더 냉정하기때문인가? 매말랐기때문인가? 하고 나 스스로에게 반문을 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나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노인들이 몸소 체험한 시간의 위대함을 알기때문이다. 하지만 장영달과 같은 노인은 내가 말한 노인의 축에 속하지 않는다. 나이만 많이 먹었다고 응당 대접을 받아야 한다라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대게 이런 사람들이 대접받고 싶은때는 나이를 거들먹거리고, 그렇지 않은때는 자신을 노인으로 여기는 것을 매우 불쾌해 한다. 더욱이 노인이기때문에 자신의 사고를 반성하지 않는 장영달의 태도는 더 분노를 산다. 보수꼴통이라는 말이 절로 입술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윤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 사회에가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를 선밖으로 내몰았다고 하기엔 그녀의 삶은 너무나 최악이다.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이 없다. 그저 명함하나 내밀고 월마다 들어오는 급여가 있는 일자리를 원할 뿐이다. 수도권 대학출신에, 어학연수도 다녀왔겠다, 힘든일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얻게된 제약회사의 인턴직.. 그런데 그것마저도 그녀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는 다른이를 부정하면서도 정규직사원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놓치지 않으려는 이중성을 보인다.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꼼수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녀의 청춘이 아깝다. 

기무는 어떠한가. 말이 필요없다. 현 교육사회의 희생양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필요가 없다. 현 교육사회의 희생양은 오히려 시골의 가난한 집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학원 한 번 못가보고 한달에 몇백씩하는 과외받는 친구들과 함께 경쟁해야하는 이에게나 써야 할 말이다.  

그나마 김중혁은 일말의 안쓰러움이 들기도 한다. 비정규직으로 월 80만원을 받고 미친듯이 일한 죄로 마누라의 외도라는 형벌을 받았으니말이다. 하지만 노숙자로서의 삶은 안쓰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포기했을 때 타인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것일까? 이억만리 타국에와서 노동착취를 당할지라도 매달 고국의 가족들에게 급여를 보내는 보람을 느끼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너희들때문에 내 일자리가 없어!, 너희들때문에 우리나라 노동현실이 더 최악이 되는 거야!'하고 주장하는 것은 노숙자들의 역할이 될 수 없다. 서울역사에 마네킹처럼 너브러져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구걸을 하고 있는 자들을 보면, 왜 저들은 막노동이라도 할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하고 생각하곤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벌기엔 그들은 이미 적선받는 것의 기쁨에 너무 길들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작가도 나와 같은 뜻인가 했는데.. 사회가 어떻든, 현재 우리의 문제가 뭐든.. 이런식의 삶의 방식은 곤란하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탓하기 전에 나를 추스려야 한다. 그리고 타인을 돌볼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기대했는데.. 코엑스몰에서 벌어진 대규모 참사 후 그의 말은 이런 동질감을 순식간에 이질감으로 돌려놓았다. 뭐랄까? A를 한참 같이 씹어대던 B가 느닷없이 모든것은 C탓으로 돌리고 A를 옹호하고 나선 것 같은 황당함이라 할까? 그리고 이러한 황당함을 갖는 나는 과연 어떤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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