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풋한 별빛이 아직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다. 다른 별들은 슬슬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샛별만은 아직도 그 자리에 붙박힌체 영화에서처럼 십자형태를 그리며 반짝거린다. 집 대문을 닫고 골목길을 5분쯤 걸었다. 새벽빛이 슬그머니 올라오기 시작하고 자욱한 아침안개 사이로 주홍빛 미등이 보인다. 그 빛을 확인하고도 내 발걸음은 조금도 빨라지지 않는다.  

 '놓치면 말지 뭐.., 어차피 지금 시간이면 걸어가도 다른얘들보다 빨리 도착할텐데..' 

  괜히 첫날부터 배짱을 튀긴다. 정말로 놓쳐버리면 걷다 지쳐서 등교길의 반은 투덜거리느라 입만 아플테면서... 

  항상 타는 버스는 이제 마을버스가 아니라 스쿨버스와 같은 존재감이 느껴진다. 내가 느긋하게 걷더라도 아저씨는 5분정도는 더 기다려 줄 것이다. 벌써 삼년째다. 새벽 여섯시. 마을버스를 타고 꼭 맞게 10분정도 후면 학교에 도착한다. 수위아저씨보다 먼저 학교를 활보하며 교무실 불을 켜고 열쇠함에서 우리반 교실키를 가지고 간 것이 삼 년... 아마 아저씨는 몰랐을 것이다. 3년 동안 자신이 늦잠을 자는 날이면 어김없이 교무실 불을 켜준 사람이 매번 같은 학생이였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느긋하게 늦잠을 즐길 수도 없다는 것을... 

  물론 오늘도 나는 그 곳에 내렸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내가 걷는 방향은 정 반대방향이다. 오늘은 고등학교 입학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우리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하나의 교문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어 있다. 이 교문을 3년동안 넘나들었고, 앞으로도 3년동안 넘나들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교실키를 가지러 가기 위해 교무실 불따위를 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는 교실문을 잠그지 않았으니까... 

  실내화로 갈아 신고나서 아직은 불빛이 다 스며들지 못한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확실히 고등학교는 입시위주라니까! 신입생을 맨 꼭대기층에 올려보내다니.. 오히려 운동은 고3들이 더 많이 해야하는 거 아닌가? 죈종일 책상에 앉아 먹먹히 칠판만 처다볼텐데...투덜투덜 대는 나의 목소리가 차가운 벽을 때리고 내귀에 머문다. 신발주머니를 무릎으로 튕겨내며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푸르스름한 빛이 책상 위를 스친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창가쪽 끝에서 두번째 자리에 가방을 대충 던져 놓고 앉아 아직은 쌀쌀한 3월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다음번에 교실로 들어서는 녀석들이 춥다고 난리를 치겠지..찬 이슬이 얼굴에 총총히 맺힌다. 아 무 생 각 없 이..진실로 아무 생각없이 가로등과 안개, 텅빈 운동장, 내가 걸어온 진입로의 시린나무들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꽊꽉 들어찬 불만들이 하나씩 없어지자 슬슬 새로운 생각들이 들어찬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100m쯤 뒤로 이동한 교실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중학교 시절을 보낸 반 친구들의 모습이 맺힌다. 진로가 달라지면서 뿔뿔히 다른 학교로 흩어져 버린 3달 전의 반 친구들... 지금쯤 일어나 씻고 있겠지? 학교가 먼 얘들은 벌써 일어나 밥을 먹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지 몰라.. 그들 중 절반은 이곳을 향하고 절반은 다른 곳을 향해 갈테지.. 

  그때 멀리서 남학생 하나가 진입로를 따라 실내화를 질질 끌며 어슬렁거린다. 나처럼 할일 없는 사람이 또 있네! 한참을 주시해서 보고 있는데 내가 있는 건물 옆에서 발걸음을 획 틀어서 다른 동으로 간다. 아~ 고3 양반이구만! 그럼 그렇지.. 고3이 아니고서야 이 시간에 학교에 오는 미친놈은 없지.. 뭐.. 물론 난 미쳤으니까!! 

  고3은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건물동에 배치되어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건물 왼편에 2층짜리 건물인데, 1층에는 교장실, 양호실과 과학실, 3년 내내 절대로 발 한번 않 디밀꺼 같은 상담실이 있고, 2층은 3학년 교무실과 교실이 있다. 교실과 복도가 일렬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교실이 마주보고 있는 형태라 여름이면 무척 덥다는 소문이 있다. 동떨어진 동이라 조용하긴 하지만 덥다는 것. 그래서 여름이 되면 코피터지게 선풍기아래 자리싸움을 한다는 것. 각종 학교 행사가 있을 땐 건물 입구를 아예 폐쇄해서 하교 시간에만 내보낸다는 것 등등... 벌써부터 저 건물로 들어가게 될 때가 두렵다. 물론 더위때문이 아니라 고3이라는 특별 수식어 때문에... 

 

 아참!! 왜 이렇게 아침일찍 학교를 오는 미친짓을 하냐고? 그정도로 학교를 사랑하는 거냐고? 풉. 절대 아니지..너는 학교의 공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아침 일찍 학교의 공기는 신선하다. 아이들이 꽉 차 있을때의 교실에서 피어나는 먼지와 소음, 땀냄새.. 이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다른 곳이다. 단순히 공기 흡입하려고 학교를 이시간에 온다고 생각하는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난 생각이 많다. 집에서는 가족눈치로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선생님눈치로 내 생각을 정리할 마땅한 시간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슬슬 내 머릿속에 살림을 차리고 앉은 벌레들이 와글와글 거리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는 통에 여간 머리가 아픈게 아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이놈들을 찾아 헤집어 놓지 않으면 그날은 하루종일 하늘이 슬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무도 없는 이 시간에 학교에 와 있는 것을 좋아한다. 넓은 공간속으로 나의 작은 머이속에 비집고 들어와 있던 갖은 잡념들이 하나씩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득 채우면 어제의 슬픔도, 매서운 눈빛들도 하나씩 기억에서 지워지고 만다. 애들이 하나씩 차기 시작하는 7시까지 한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그냥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보면 어디서부턴가 마음이 안개처럼 조금씩 젖어들어 동요되었던 흔들림도, 멈추질 않았던 욕심들도 다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날씨가 맑겠구나. 안개가 햇빛으로 묽어지자 군청색 무리들이 떼지어 걸어온다. 또 다른 버스가 교문 앞에 서자 우르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시야에서 가까워지자 다른 중학교에서 온 우리반 아이도 보인다. 이크! 그 아이가 우리반 교실을 올려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와있었냐고 물으면 방금전에 왔다고 둘러대야지.. 그나저나 창문을 닫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이가 처다보고 있는데 냅다 닫아버리면 왠지 쌀쌀맞아 보일 것 같고.. 열어두자니 오자마자 춥다고 난리칠 것 같고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사이에 아이가 없어졌다. 계단을 올라오고 있나보다. 나는 재빨리 창을 닫고 교실 불을 켰다. 이 추위에 창문을 열어 놓은 건 어찌됐건 간에 불이라도 안 켜두면 나를 완전 싸이코로 생각할지도 몰라..교실문이 열리고 아이가 들어온다. 아이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젠장.. 왜 춥게 문을 열어놨었냐고 하며 뭐하고 하겠지? 녀석을 처다보자 그때까지 내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들킨 것 처럼 고개를 황급히 돌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앞쪽 가운데 자리에 앉아버린다.. 여전히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어? 그냥 저냥 넘어가나본데.. 아까 그 초속 백만킬로미터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행동은 뭐지? 아~ 몰라몰라~ 초면이라 어색했나보지 뭐.. 

하지만..이건 나의 착각이였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아이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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