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중지 키운 ‘분신’ 대학에 시집보냈죠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② 이상보 국민대 명예교수

“서운하시겠어요?”

“무슨 말씀을…. 좋은 집으로 시집 보내는 기분이라 즐겁고 기뻐요.”(<갑사로 가는 길> 117쪽)

92년 그는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면서 연구실과 집에 있던 책 여섯 대 분량(1.5t 트럭)을 강남대 도서관으로 실어보냈다. 정말 즐겁고 기뻤을까.

5월 말 찾아간 이상보 국민대 명예교수의 서대문구 홍은동 집은 깨끗했다. 거실 책꽂이에 자신 및 가까운 지인의 최근 저서, 작은 방 두 벽에 전공인 국어국문학 관련 책, 침대 방에는 최근 헌책방에서 사들인 잡학 책이 쌓였다. 그뿐.

단행본(H) 2만4809권, 연속간행물(HP) 1059권, 참고도서(HR) 851권, 논문(T) 523권. 그가 서너 차례에 걸쳐 강남대에 기증한 책들은 도서관 4층 종합정보자료실 한쪽 별도의 공간에 비치돼 있다. 7단복식 2연서가 40개 분량. 그의 호를 딴 한실문고다. 문고 이름 첫자를 따 분류기호 앞에 H 기호를 부여했다. 관외대출은 안 되고 열람 또는 복사만 할 수 있다. 영구보존 조건에 기증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

92년 장서 인수 당시 강남대도서관 장서는 20만권. 한꺼번에 1/10이 늘어난 셈이다. 인수작업에 간여한 강남대의 한 직원은 “이 박사의 장서는 우선 양이 많았고 국문학 쪽으로 특화돼 소장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면서 “한번만 봐서인지 거의 새책 수준이었고 출판사에서 증정한 책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기증도서 목록을 보면 분류기호 800대 도서가 70% 가량 차지하고 그 가운데 시집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 한문책은 도서관 2층 고서자료실에 잠금장치를 두고 전시하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그가 연락해올 때마다 고인 책들을 인수하기로 약조했다.

그가 장서를 기증한 것은 물리적으로 그가 더이상 책을 보관하여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 아파트가 비좁을 뿐더러 나이듦에 따라 책의 활용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50년 이상 국문학 분야로 특화해 모은 책은 그의 분신과도 같았다. 종이뭉치로 전락해 먼지를 덮어쓴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책은 인간과 다른 운명을 가진 것. 표지를 닦고 먼지를 떨어내면 그 속의 콘텐츠는 다시 무시간성을 회복할 터. 젊은이들이 그 책들을 들춰 그 안의 진미를 맛보면 자신의 국어국문학 열정 역시 전해지지 않겠는가.

도서관에 둥지를 튼 그의 장서는 행복하다. 한살이를 끝낸 책들이 또 다른 한살이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장서가들의 책은 도서관에서 거절당하거나 홀대받기 일쑤. 관심사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집된 책은 패총처럼 분야와 층위가 잡다하기 마련이다. 질이 담보되지 않을 뿐더러 도서관의 자료와 겹치는 경우가 많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따른다. 하여, 나름대로 모아진 자료를 귀중하게 여기는 소장자와 일정기준에 따라 필요한 것만 받겠다는 도서관의 입장이 달라 ‘일괄 인수-보존’은 이뤄지지 않는다. 서가정리 겸 기증생색을 내려 귀중자료는 빼고 나머지만 인수해 가라는 사람조차 있다고 사서들은 전했다.

장서를 의탁한 강남대는 이 교수의 모교. 그는 동국대 국문과를 다니면서 강남대의 전신인 중앙신학교 2년 과정을 이수했다. 당시 한국전쟁 뒤 혼란기에서 믿을 이는 신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국군이 적을 퇴치하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선무방송은 대전에서 녹음된 것이었음을 나중에 알고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 터다. 환도하자마자 세운상가 자리에 있던 신학교에 등록해 함석헌 등에게 초교파적 신학을 배웠다.

“내 나이가 얼마나 돼 보이오?” “예순 다섯?” 약간의 아부섞인 대답. “올해 여든이오.” 실제로 그의 얼굴은 10년을 낮잡아볼 정도로 젊어보였다. 무슨 비결이라도?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했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지망생이었다. 학생이자 교사 시절 그는 원효로 건국청년훈련원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처음 만났다. 악수를 할 때 쇳덩이를 쥔듯 했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 수시로 경교장을 드나들면서 먹물 시중을 들거나 잔디밭에서 공을 찼다.

“을지로에 살았는데, 피난하면서 ‘이상보 동지에게’라고 백범이 서명한 <백범일지>를 항아리에 묻어두었소. 돌아와 보니 쑥밭이 되어 찾을 수 없었소. <백범일지>가 눈에 띄면 사 모으는 습관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요.”

고전시가 찾으려고 발로 글을 썼지

백범 사회장 때 그의 영구차 끈을 잡고 장례행렬에 참가한 뒤 다니던 단국대 정치학과를 때려치고 동국대 국문과로 편입했다. 그 이후는 국어국문학 인생. 한때 시집을 낼 만큼 시를 좋아했던 터, 고전시가를 전공하기로 하고 조선시대 3대 가객 중 ‘노계 박인로 연구’로 석사학위를 땄다. 정송강(김사엽), 윤고산(이재수)은 선점되었기에 박노계로 물꼬를 잡았다. 박사학위는 ‘가사문학의 연구’.

“옛 시가를 연구하니 시골 노인들이 옛날 책을 가지고 찾아오곤 했소. 한글 시가가 한두 편 섞인 문집은 아주 소중한 자료였소.” 목판본 문집은 5만원, 필사본은 10만원 하는 식으로 구입했다. 그가 산 고서는 골동품으로서가 아니라 연구자료로서. 이탁본 농가월령가 등 조선시대 기사를 발굴하면 하는대로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대부분이 일차적인 사항을 망라한 ‘발굴보고서’다. “요즘의 신문기자와 흡사하오. 전국 안 다닌 절이 없을 정도로 발로 글을 썼소. 요즘은 자료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소.” 웬만한 자료는 모두 햇빛을 보았다고 본다. 그는 ‘디지털 시대의 국어국문학 연구’가 마뜩찮다는 표정이다. 문예학이다, 사회학적 관점이다 해서 남이 써놓은 논문을 종합해 냅다 자기 얘기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19, 20세기 가사 자료가 많은데 미답지경이오. 지은이를 밝히려면 족보도 찾아보고 해야 하는데 힘이 달려요. 누군가 젊은이가 한다면 전부 넘겨줄 의사가 있소.” 몇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한 듯, 얘기해도 듣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의 책에 대한 관심은 여전해서 들며나며 집에서 가까운 헌책방을 들른다. 그 좋은 책들이 주인을 못 만나는 게 안타깝다. 자신이 거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한두 권씩 집어온 책이 다시 쌓인다. 장서의 빈자리처럼 허허한 가슴을 채우거나, 매만지고 냄새맡는 완상 수준에 머무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줌에 드는 작은책, 이름하여 좁쌀책. 기증도서에 포함하지 않고 지금껏 애완하는 책이다. ‘부지기수’라지만 2천권쯤 되지 않을까 추정한다.

“아직 버리지 못한 욕심이오.” 그는 여행가방 먼지를 떨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또다른 상자. 그것을 열자 비로소 좁쌀책이 우수수 쏟아졌다. 베트남판 춘향전, 일본·중국 시집과 유교경전, <고험요람> 등 옛책, 프라하에서 구입한 성구집, 바라밀경, 코란경, 호주 교포가 준 열쇠고리형 성경 등등. “이것좀 보시오” 하는 근엄했던 그의 표정은 아이처럼 바뀌었다. 1992년 러시아 철도여행 중 샀다는 <레닌 약력첩>. 1.7×1.8cm. 컬러사진과 활자가 빼곡하다. “보여줄까 말까?” 인주함 크기의 상자를 열자 인주 대신 동그란 구멍 속에 ‘작은 물질’이 들었다. 3.5×3.5×2.5mm. 핀셋으로나 집히는 게 책이다. 돋보기로 봐도 글자를 알아볼 수 없지만 분명히 활판인쇄다. 그렇다니 그런 줄 안다.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 구한 것이라며 회심의 미소다. “좁쌀책은 그 나라의 인쇄기술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를 비롯한 몇몇 좁쌀책 애호가들이 글을 모아 <나의 애장서> <나의 좌우명>이란 책을 만들어 나눠가졌다. 일련번호를 붙여 400부 한정본으로 만들었다. 1999년에는 그 혼자서 <인도차이나 역사기행>(민속원)이란 책을 만들었다. 일반판매를 하려 했지만 서점에서 분실 우려가 있다며 맡지 않더란다. 그는 실컷 자랑을 하고 한 권도 흘리지 않고 도로 여행가방에 넣었다.

지적 자산 보존 수집가가 애국자요

좁쌀책과 더불어 그의 계속되는 관심은 문학비 건립.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의 이름으로 문학비 23개를 세웠다. 이달 하순에는 정태진 문학비(파주도서관 앞) 건립을 앞두고 있다. 이 동호회는 나손 김동욱 박사의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의 후신. 31개의 시비를 세운 바 있는 나손의 동호회는 90년 그의 타계와 함께 이 교수가 대를 이었다.

“책 수집가, 그 사람들 애국자요. 자칫 인멸될 지적 자산을 보존하여 세대를 중개하는 몫을 하니까요.” 폼 안나고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의미깊은 역할을 하는 그들이 정당하게 대접 받았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는 자신의 약력을 참고하라면서 140쪽 수필집 <갑사로 가는 길>(범우문고 219)과 95년에 나온 <고서연구>(한국고서연구회 회지 11호)를 건넸다.

그는 요즘 ‘아름다운 가게’ 다니기를 즐긴다. 책값 싸서 좋고 이익금은 불우이웃돕기에 들어간다면서….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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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본은 관심 없소 관심 가는 게 희귀본”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① 프랑스 유학 1세대 불문학자 민희식 선생

이번호부터 ‘한국의 책쟁이들’, ‘한국의 글쟁이들’을 번갈아 싣습니다. ‘책쟁이들’은 책에 미쳐 이를 모으고 읽고 활용하는 사람들, ‘글쟁이들’은 글쓰기를 즐겨 업으로 삼은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지식산업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인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들이 말하는 심오한 책/글 세상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청계천 복개판 위에 세워진 삼선시장. 격한 구호에서 철거를 둘러싼 의견충돌이 드러난다. 삼선서림은 불이 켜진채 문이 잠겼다. 삼선로터리에서 성북동 방향. 구의원 선거원들이 기호와 이름을 합창으로 반복하는 행길. 90도를 꺾어 골목으로 들면 갑자기 한적한 주택가로 변한다.

‘고향떡집’ 맞은 편 이층 집. 성성한 백발의 노인이 막 대문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지난 여름 삼선서림에서 스치지 않았다면 그냥 슈퍼에라도 들를 참인 주민일 터다. 민희식(73) 선생. 해방 뒤 프랑스에 유학한 1세대 불문학자.

그는 요즘 간다라 불교에 흠뻑 빠져 ‘인생 이모작’ 중이다. 지난 화요일에는 마라난타 기념관 준공식에 초대되어 영광 법성포에 다녀왔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승려로만 알려진 마라난타. 파키스탄 초타 라홀에서 나 승려가 된 그가 페사발, 스와트, 길기트 훈자를 거쳐 텐산산맥을 넘어 구자국에서 수행을 하고 둔황을 거쳐 중국 동진에 이르고, 다시 동진의 수도 건강에서 배를 타고 백제의 법성포에 이르러 불법을 전한 경로를 밝혀냈다. 법성포를 도래지로 지목한 것은 아무포, 부용포에 이은 불교적 지명, 함께 가져왔다고 전하는 불두, 매향비가 남은 까닭이다.

간다라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 유학 때부터. 그동안 불문학 전공에 몰두해 묻어둔 화두를 퇴임 뒤 본격적으로 꺼내 들었다. 마라난타 연구를 위해 파키스탄 현지를 답사한 게 일곱 차례. 문헌조사와 도서구입을 위해 일본 3번, 프랑스·중국에 다녀왔다. 파키스탄 정부의 의뢰를 받아 관련 책 3권을 썼다. 불교방송에서 1년반 간다라 미술을 강의했다. 퇴임하면서 한 트럭의 책을 정리해 숨통이 틘 집안이 다시 책으로 넘쳐나는 것도 그 탓이다. 그는 간다라 미술이 실크로드를 거쳐 한국으로 오면서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불상 양식의 변화는 물론 사상의 변화까지.

25년 동안 한 번도 이사하지 않은 집안에는 세월이 고였다. 쌓이고 쌓인 책은 줄잡아 7만권. 다섯 개의 방에 흩어져 보관돼 있다. 이층에 둘, 일층에 하나, 지하실에 둘. 그가 주로 머무는 곳은 이층의 오른쪽 방. 사방이 책이고 가운데는 책상이 셋, 복사기 한대. 비집고 책꽂이로 다가가 책을 뽑은 뒤 책상에 앉아 읽거나 쓸 수 있을 뿐이다. 편한대로 안락, 등나무, 보통,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를 번갈아 이용한다. 천장은 빠꼼할 줄 알았는데, 전등과 함께 스피커가 매달렸다. 한차례 다과를 바꿔가면서 무려 다섯 시간동안 노 교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현지 답사…불교방송 강의도

조선어 사용금지, 창씨개명 등 엄혹한 유소년기를 거친 그한테 일본어는 사실상 모국어였다. 해방 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영어와 함께 한글 자모를 익혔다. 혼란스런 해방과 전쟁통. 제대로 교육받은 기억이 없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대학과 학과는 껍데기였다. 10~20년 전 기초프랑스어를 배운 이가 하루아침에 교수가 되었다. 교수와 학생이 함께 배우는 셈이었다. 강의는 대부분 휴강. 게다가 그는 대학입학 전후 군대를 이중으로 다녀와야 했다.

프랑스 유학 때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 59~64년 프랑스 정부장학금으로 5년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다. 책, 여행, 박물관, 공연관람을 통해 그동안의 갈증을 채웠다. 박사논문은 플로베르. 발자크의 <인간희극>을 영적인 문제와 관련지어 보려다 방향을 바꿨다. 지도교수는 1년을 지켜보다가 “건너편 육지가 보일 때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한 우물만 깊이 파는 대신 널리 그리고 이질적이고 대비적인 부문을 함께 공부할 것을 권했다. 거기서 공통점을 찾아내면 자기 것이 된다면서. 논문 주제는 <보바리 부인>. 쉽게 이뤄지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될듯말듯 벅찬 것에 몰두하는 사람 이야기. 병리가 규명되니 묘사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이 쉬워졌다. 두집 짓고 난 뒤의 행마처럼.

입국해서 그가 펼친 프랑스어 교수법은 획기적이었다. 당시 외국어 교육은 관사, 형용사 변화 등 문법을 외우게 하는 구태의 반복. 완전한 문장으로 가르치는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았다. 가르칠 책도 없는 형편.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번역해 냈다. 귀국 일주일만에 뚝딱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학생은 물론 외교관을 가르치고 정부에 프랑스 손님이 찾아오면 상대해야 했다. 그렇게 40여년. 성균관대 이화여대 한양대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번역 또는 지은 책이 100권을 넘는다.

프랑스어의 직설법-접속법 구분은 그의 삶에 배었다. 자신의 말에 책임지기, 생각(바람)과 현실을 분리해서 사고하기가 그것. 접속법은 “(서점에 있는) 그 책을 사다줄 게”라 말할 때 쓰는 화법. 팔렸으면 못 사다주지만 자신의 말을 어긴 게 아니다. 테제베 도입 협상 당시, 약탈해간 강화도 서고의 ‘의궤’를 돌려 주겠다고 했을 때 프랑스 대통령이 사용한 어법이다. 프랑스는 목적한 고속철을 팔아치웠고 의궤를 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핑계는 실무담당자의 반대.

‘불교 교수법’ 개척…쓴 책 100권

잠시 휴식. 나머지 네 곳의 책방 탐험에 나섰다. 같은 층 건넌방.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구조. 주로 일어 문고본. 시리즈별로 나뉘어 겹으로 뉘었다. 책꽂이 맨 위에 그의 저서와 역서가 먼지를 썼다. 의자를 놓고 하나하나 내려 쌓으니 키를 넘어 쌓을 수가 없다. 바닥에 두 겹으로 늘어놓고 카메라를 통해 보니 책등의 제목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표정이 착잡했다. 쪽방에는 불교책 500~600권이 쌓였다. 지하실은 본래 보일러실. 바닥을 깔고 책을 부려놓았다. 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불문·영문의 전공책, 백과사전만은 종이상자 또는 책꽂이에 두었다. 전공책은 그의 존재증명과 같아서 손이 타지 않는 곳에 두고 필요할 때만 꺼내본다고 설명했다. 보고나서는 제자리에 반납한다. 프랑스 작가의 작품은 모두 있고 백과사전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프랑스 백과사전은 너무 상세해 자주는 안 본다. 일층은 일반책이라 건너뛰었다.

다시 서재. 과연 이 많은 책 가운데 원하는 책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까? 방마다 분야별로 나누고 책꽂이를 세분해 대부분 잘 안다는 답변이다. 하지만 서재의 책은 손을 많이 타는 통에 둔 곳을 잊는 경우가 잦다고 털어놨다. 같은 책을 다섯 권이나 반복해 산 것도 있다. 이중으로 쌓아둔 책 뒤로 넘어간 책을 찾아낼 재간이 없다. 귀한 책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까치발로 (M. E. Burnouf 역. 프국립인쇄소, 1973)를 뽑아왔다. 법화경의 불역본. 19세기 초 초판이 나왔고 3단계로 걸쳐 완간되었다. 내용이 상세해 한문, 또는 국역본으로는 불분명하던 개념이 쏙쏙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희귀본이나 절판본은 관심없소. 관심이 있는 것이 귀할 뿐이오.” 그의 관심사는 불문학과 간다라문화. 불문학에 관심이 쏠렸을 때는 그쪽 분야의 책이, 간다라에 쏠렸을 때는 그쪽의 책이 무한 가치를 갖는다. 지나고 나면 껍데기다. 딩동댕 정답. 눈호사를 하려다 호된 꾸지람을 받은 꼴이다. 저·역서 책 무더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그래서 착잡했던 걸까.

퇴임하면서 연구실에 있던 책은 “집으로 나르기 귀찮아” 필요한 사람들한테 나눠주었다. 요즘도 빌려달라는 이한테 선뜻 빌려주고 반납을 채근하지 않는다. 책은 다른 것과 달리 대체 불가한 것. 자신의 욕심에 견주어 다른 사람들의 책욕심을 이해한다. 그래서일까. 책 알맹이는 다 뽑아져 그의 머리로 옮겨지고, ‘괜찮은 책’은 빌리는 형식으로 다른 주인에게 옮겨졌으니 책꽂이의 책들은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감히 탐내지 않는 책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터.

“우리 집은 도둑이 든 적이 없어요. 책밖에 없으니까요.” 살 때는 제값이지만 팔때는 값없는 책, 책들. 하긴 살때만 사용가치와 싯가가 일치하지 않겠는가. 외출 때도 대문만 잠근다. 그가 쓰는 방은 온통 책과 책상, 그리고 침대 하나뿐. 나머지 옷장이나 장식장 따위는 모두 마루에 나와있다. 책 이외에 하다못해 골동품 하나, 그림 한점 없다.

책밖에 없으니 도둑도 안 드네요

요즘도 그는 하루에 책 3권을 읽는다. 식전에 한권, 일과 중 돌아다니는 중에 한권 그리고 저녁때 잠자리에 들기전 한권. “하루 다섯권을 읽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 요령은 삼매경. 집중하면 안될 것도 없다. 전철 같은데서 오히려 집중이 잘 된다. 책의 핵심은 20%, 나머지는 불필요하거나 보조적인 내용이라며 핵심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속도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더 빨라 걱정이다. 책을 사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가까운 삼선서림은 산보삼아 들른다.

정원 한쪽 맑은 물웅덩이. 비단잉어와 금붕어가 노닐었다. 청계천 상류다! 도시가 아스팔트로 뒤발하고 있어도 맑은 지하수는 흐르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선거판 구호의 시끄러움과 아랑곳없이 책에 침잠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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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이름값 최소 5만부



[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① 역사 저술가 이덕일

한국 출판계에서 ‘자기 이름을 내건 책’만으로 살아가는 글쟁이, 곧 프로 저술가는 극소수다. 문학쪽은 오히려 더욱 전업작가가 적고, 인문·사회·경제쪽, 그리고 실용서쪽에서 최근들어 분야별로 한두명씩 서서히 저술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역사 전문 저술가 이덕일(45)씨는 가장 성공한 글쟁이로 꼽힌다. 책 이름에 ‘이덕일의~’라고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개인브랜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역사쪽에서 대중들과 직접 호흡하는 저술가, 특히 ‘대학교수’란 배경도 없이 책만으로 승부하는 저술가는 그가 유일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이 늦었던 ‘늦깎이 사학자’ 이씨는 1997년 서른일곱살이란 나이에 첫 책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을 쓰면서 저술가로 데뷔한 뒤 꼭 10년 동안 30여권의 책을 쓰면서 역사쪽에서 최고의 인기저자로 자리잡았다.

역사쪽에서 대중적인 인문서 쓰기를 시도한 이가 이씨 혼자만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 한국역사연구회 등이 ‘역사 대중화’를 시도한 뒤 여러 소장학자들이 대중과 직접 소통을 시도했다. 히지만 현재까지 남아 출판시장에서 통하는 이는 이씨뿐이다. 그만큼 이씨의 등장은 90년대 이후 출판계의 새로운 변화를 상징한다. 이씨가 저술가로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 때로는 지금까지도, 받았던 가장 큰 오해가 ‘재야 사학자’란 호칭이란 점은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 역사분야에서 ‘재야’란 말은 정식으로 역사를 전공하지 않고 홀로 공부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학과(숭실대)를 졸업했고 <동북항일군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정통 역사학 연구자인 이씨는 ‘재야’가 아닌데도 이씨처럼 저술활동만 전념하는 전공자가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씨를 재야일 것으로로 넘겨짚은 것이다.

저술가로서 이씨는 올해 경력의 절정을 맞고 있다. 1999년 나왔던 <누가 왕을 죽였는가>를 개정한 <조선왕 독살사건>이 지난해 다시 나온 뒤 10만부 넘게 팔리고 있고, 최근 펴낸 <조선 최대 갑부 역관>도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씨 책 두 권이 동시에 상위 순위에 올라있다. 또 <~역관>이 이씨의 책으로는 처음으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씨를 향한 출판사들의 구애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출판계에서 추산하는 이씨의 시장가치는 ‘5만부’. 올해 출판시장에서 이씨의 가치를 환산한 수치로, 이씨의 이름으로 5만명까지는 끌어올 수 있다는 의미다. 5000부를 넘기기가 쉽지 않은 인문·교양쪽에서 5만부란 수치는 다른 분야의 10만부 수준이다. 이씨는 30~40대 남성들을 고정팬으로 거느리고 있어 최소 1만부는 기본으로 넘긴다. 이런 점 때문에 이씨는 대형 종합출판사 김영사의 ‘빅4’ 필자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다른 3명이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원복 교수, <식객>의 허영만 화백, <토익, 답이 보인다> 시리즈로 토익시장 최고의 베스트셀러 저자인 김대균씨인 점을 보면 이씨의 힘을 알 수 있다.

김영사 ‘빅4’ 필자 중 한명

이씨가 저술가로 성공한 최고의 강점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인 ‘글쓰기’에서 나온다고 출판계는 분석한다. 학자풍의 딱딱한 글을 쓰지 않는 수준을 넘어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이씨는 실제 역사소설 <운부>를 쓰기도 했다)답게 이씨의 책들은 소설처럼 술술 읽을 수 있는 게 매력이자 장점이다. 김영사 신은영 실장은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에만 빠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고 글을 쓰기 때문에 독자들이 머릿속에 극적인 장면을 그림을 그리듯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책 내용을 차별화하는 틈새 주제 포착능력도 강점으로 꼽힌다. 누구나 아는 방향으로 책을 쓰지 않고 책마다 반드시 새로운 보여주는 게 있다는 말이다. 논쟁이 일었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처럼 책마다 ‘걸고 넘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인데, 이는 출판사나 편집자가 가장 바라는 점이기도 하다.

이씨의 글은 이야기가 맛깔진 반면 전하는 메시지가 약해 주장하는 바를 명확히 모르겠다는 평도 듣는다. 너무 글 ‘테크닉’에만 의존한다는 평도 있다. 이는 이씨의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지만, 이씨의 철학과 전략에 따른 선택이기도 하다. “독자를 가르치려는 책은 오래 못가는 것 같아요. 전에는 제 주관과 판단을 글에 집어넣기도 했는데 몇년 지나 다시 읽어보니 그 부분들이 꼭 목에 딱딱하게 걸리더라구요. 그래서 이야기 전개에는 주관을 넣어도 마지막 결론은 독자들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이걸 어기면 독자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아요.”

직장인처럼 규칙적인 생활과 철저한 자기관리도 이씨의 성공비결 가운데 하나.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까지 일하고, 가끔 야근도 합니다. 일이 되든 안되든 앉아서 글을 쓰든지 책을 보면서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게 원칙입니다.” 이씨는 술마시는 시간을 빼면 항상 글을 쓰거나 공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마감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기 마련인 대부분의 필자들과 달리 원고 기한을 어기는 법이 없다. 자기 일정과 작업량을 잘 감안해 합리적으로 마감을 정하기 때문이다. “책도 상품인데 아이스크림을 겨울에 낼 수는 없잖느냐”고 이씨는 웃었다.

지금은 ‘역사 저술가’로 이름을 굳혔지만 그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이씨 스스로도 “늘 어렵게 살았던 터여서 ‘라면 세 개에 소주 한 병이면 하루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던 것”이라며 “아마 온실에서 도전한 사람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른바 ‘일류대’ 출신이 아닌 그가 대학교수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긴 했기에 저술가를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시장)으로 일찌감치 정하고 도전해 거둔 성과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씨는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이 대학 기웃대지 않고 잘먹고 살면서 전문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준 점”을 자부심으로 꼽는다.

불행하게 가신 분 한풀어줘 보람

역사 저술가로서의 보람을 물었다.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추구하다 불행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애정이 많이 가는 편입니다. 책으로 그런 분들의 한을 풀어준다고나 할까, 그게 보람입니다.” 이씨는 저술가로서 앞으로의 방향을‘평전’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바라보는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씨는 평전 쓸 대상으로 우선 3명을 정해두었다. 이순신을 발탁한 정치가 유성룡,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아야 했던 비운의 학자 윤휴, 그리고 정조 임금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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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TV 샀고, 지도 찾기가 재미있다며 네비게이션 죽어도 사지 말자고 태양님과 얘기했었고, TV 살때 한경희 스팀청소기 사은품으로 받았고, 루이비통 백은.....원체 저런것에 관심없고....

그리하여..결론은...

어쩜..흥미를 댕기는 상품이 하나도 없는지...에잇.....차라리 스크래치해서 샤니 호빵 한봉지 더! 뭐 요런 거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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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10-3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작년에도 했던 것같아요 응모안했지만

씩씩하니 2006-10-3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전 루이비똥 관심있는데..흐...

이쁜하루 2006-10-3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루이비통 매고 입을 옷이 없어서..^^
 



올드 독에 보면 조지마이클이 한말을 인용하여 "책은 가구다" 라는 말을 한다. 음..나도 사놓기만 하고 안읽은 책이 너무 많으니 거의 가구 수준이 되어가고 있다.

읽다 만책도 너무 많고... 지금 한비야의 지구밖으로 행군하라를 다 읽었다 그리고 다음 책으로 뭘 선택할까 하다가 옛그림읽기의 즐거움 2 가 생각나서 그렇지! 너무 오랫동안 안읽었군! 하면서 리뷰어들의 글을 보러 갔는데 세상에 9명의 리뷰어 모두 별 5점을....

오늘 별 5점을 완벽하게 받은 책 두권을 발견하니까 웬지 보물을 찾을것 같기도하고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어..뭐 이딴 자만심도 생기면서..여튼 기분 좋은 마음으로 옛그림읽기의 즐거움2 들어갑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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