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진 > [퍼온글] 글쓰기의 쾌락

[특별부록|글쓰기의 쾌락]
글쓰기의 쾌락-생각의 질주,몰입의 황홀(신동아 '03 11월호 별책부록)

생각의 질주, 몰입의 황홀
삶의 모든 것을 기록하라
글쓰기의 백미는 책을 쓰는 일이다. 그곳에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이 숨어 있다. 아이디어가 넘쳐 흘러 쾌속으로 질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이디어가 막혀서 오도가도 못할 때가 있다.

나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새벽녘에 글을 쓰다 보면 몰입상태에 빠져들 때가 많다. 그때 세상 천지에는 오로지 자신과 마주한 또 다른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두뇌 속에 입력된 수많은 정보가 날아갈듯 조합되면서 컴퓨터 화면을 메워나간다. 조용한 새벽녘, 빠른 속도로 컴퓨터 문자판을 두드리면서 나는 곧잘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누구에게든 정체성이란 것이 필요하다. 정해진 코스에 따른 공부를 마친 다음, 나 역시 정체성의 위기를 맞았다. 그런 방황을 거쳐 얻은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다. 이제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마치 음식을 먹는 일처럼, 옷을 입고 벗는 일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50여권의 책을 썼다. 1992년 상업용 출판을 처음 시작했으니까 본격적인 글쓰기의 역사는 10년 남짓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따로 글쓰기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시골에서 자란 보통 아이들처럼 독서나 글쓰기보다 바닷가를 뛰어다니거나 고기잡이 배를 타고 남해안 이곳저곳을 다닌 시간이 훨씬 많았다.

나는 전업 전문작가도 아니다. 언젠가 찰스 핸디의 ‘코끼리와 벼룩’을 읽다가 그에겐 글쓰기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보너스 정도라는 표현을 보았다. 직장을 다닐 때나 지금이나 글쓰기는 나의 전부를 걸어야 하는 주업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 고향 경남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이 글쓰기에 필요한 감성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풍부한 감성은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고기잡이 뱃전에서 바라보는 여명(黎明)이나 노을에 붉게 물드는 통영 항구의 정경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 있다.

그러나 내가 타고난 자질로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꾸준히 글쓰기 능력을 다듬어 왔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도 쓸 수 있다’는 그런 용기 말이다.

글은 훈련의 산물이다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 그리고 체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능력이 있다. 즉 조금만 훈련하면 누구나 글쓰기를 중요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글쓰기는 원고지에 만년필로 메워가야 하는 일이었다. 육체적으로도 고된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능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컴퓨터는 글쓰기의 혁명을 가져왔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생각을 손쉽게 담을 수 있다. 그리고 편집기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글쓰기의 심리적 저항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심리적 저항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누구나 느끼는 ‘망설임’이다. 그런데 컴퓨터 앞에 앉으면 ‘그냥’ 쓰기 시작하면 된다.

어른이 되어 나의 첫 글쓰기는 보고서였다. 내가 일하던 곳은 연구소였기 때문에 딱딱한 보고서를 1년에 한두 권씩 내야 했다. 그런데 박사과정이라는 훈련을 거치고 연구소에서 수많은 보고서를 쓴 것이 지금 하고 있는 대중적인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논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웠기 때문이다. 주위 동료들은 대부분 연구 보고서를 쓰는데 만족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기승전결이 꽉 짜여진 그런 보고서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첫 작품이 ‘한국기업흥망사’였다. 당시만 해도 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상업용 출판을 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한국기업흥망사’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상당한 인기를 얻자 문제가 발생했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상업용 책을 내놓았다는 ‘죄’로 인사위원회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직장에서 쫓겨날 뻔한 그런 해프닝들을 지금 돌이켜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연구소 시절 초기, 그러니까 20대 말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 떠난다. 죽은 후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재산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남기고, 또 어떤 사람은 책을 남긴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영원히 사는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유한한 삶을 뛰어넘어 삶의 자취를 남길 수 있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한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30대부터 괜찮은 책을 쓰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당시 쓴 책 가운데 지금까지 읽힐 만한 책을 나름대로 꼽아본다면 나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업가’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그 적들’ 등이다.

매일 자서전을 써라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를 남기는 것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글로 써서 남기지 않은 삶은 죽음과 함께 망각의 늪으로 사라져버린다.

스스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도 그 길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독특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의 경험이든 글로 남길 가치가 있다. 그리고 글로써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다 보면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부족한 점을 알아야 채우는 일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세일즈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가 세일즈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애환들, 세일즈를 통해서 본 인간과 세상…. 이 모든 것이 훌륭한 글감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삶의 모든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라’ 내가 좋아하는 글귀 가운데 하나다. 나는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나의 저작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다. 이 책은 2001년 12월에 출간되어 2002년 경영경제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이 심오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내가 20여년 동안 해온 자기경영의 경험들을 차근차근 정리했을 뿐이다. 내가 무(無)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를 정리한 것인데, 의외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어찌 보면 이 책도 용감함의 산물이다. 정론이나 이론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자기경영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런 경험과 지식이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평소 생각해 왔던 바를 글로 분명하게 기록할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사실 그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관찰력 덕분이었다. 조직생활을 하는 동안 젊은 사람들이 직장업무에 매몰되어 정작 ‘자신을 만들어 가는 프로젝트’를 갖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시간, 지식, 건강, 행복, 인맥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했다.

자, 내 책을 소개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하며 자신의 경험이 평범하게 보이지만 차곡차곡 정리해 두면 쓸모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의 삶을 기록해두지 못한 것이다. 70세 이상 어르신들은 일제 식민지, 2차대전, 해방,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들이다. 그분들이 험난한 세월 생계를 유지하고 사업을 일으키고 자식을 키운 과정 그 자체가 훌륭한 이야기다.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누우신 점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막상 우리는 기록하는 일에 무척 인색하다. 산업계에서도 큰 획을 그은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평소 자신의 삶을 차근차근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리라. 리처드 닉슨이 낙향한 후 집필한 ‘지도자들’이란 책을 보면, 그가 매일 메모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그는 파란만장했던 정치역정을 진솔하게 그려서 적지 않은 인세수입을 얻기도 했다.

지난해 교보생명 창업자인 고 신용호 회장이 쓴 ‘새경영’이란 책을 읽었다. 한문체 문장을 또박또박 읽어가면서 ‘아! 현장을 뛰면서도 이런 경지까지 지식을 끌어올릴 수 있구나’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면, 그 지식은 육신의 소멸과 함께 영원히 사장되어버렸을 것이다. 미국에서 페코철강을 일구어낸 백영중 회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생을 ‘나는 성실과 정직으로 미국을 정복했다’란 제목으로 묶어놓지 않았다면 누가 그의 일생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는 공병우 박사의 글을 읽을 때면 여전히 그가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처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약간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게다가 두려움도 함께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글쓰기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문리를 터득하게 되지 않을까. 수백, 수천 장의 원고지를 채운 다음 이루는 경지라 할 수 있다. 지름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단은 많이 써야 한다.

 

글쓰기의 황홀

글쓰기에는 어떤 기쁨이 있는가. 글쓰기에는 쾌락과 고통이 아주 가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창조하는 재미를 들 수 있다. 글쓰기는 멋진 ‘지적 유희(遊戱)’다. 두뇌가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쏟아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다. 세상에는 골프, 테니스, 여행 등 여러 가지 취미 활동이 있지만 글 쓰기는 이들 취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큰 감동과 재미를 제공한다.

짧은 글을 쓸 때는 지적 즐거움의 크기도 그만큼 작다. 하루 동안 여러 편의 짧은 글을 쓰면 공허감이 밀려든다. 그래서 짧은 글과 긴 글을 병행해야 한다. 여기서 긴 글이란 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내게 “그렇게 자주 책을 내놓는 비결이 뭐냐?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다.

글쓰기의 백미는 책을 쓰는 일이다. 그곳에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이 숨어 있다. 아이디어가 넘쳐 흘러 쾌속으로 질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이디어가 막혀서 오도가도 못할 때가 있다. 책을 쓰는 일은 자신을 다스리고 강건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작(多作)을 한다면 그만큼 자기관리에 엄격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긴 글을 쓰는 것은 아이들이 레고 블록을 쌓으며 몰입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진한 즐거움을 준다. 새로운 주제의 책을 쓰는 일은 정말 무에서 출발한다. 그 상태에서 주춧돌을 놓고 건물을 올려 가는 것처럼 두뇌 속에서 하나하나 작업이 진행된다. 물론 여기서 느끼는 기쁨은 고통의 경계선을 넘나들기도 한다.

강연, 기고, 방송 등과 같은 활동도 나에겐 중요하지만 책을 쓰는 일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만큼 지적 쾌락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꽉 차는 듯한 충만감도 그런 느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쓰지 않으면 공허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책을 시작한다. 책을 만들어 가고 있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매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글쓰기가 주는 즐거움은 그것만이 아니다. 글쓰기를 즐겨 하는 사람은 주변을 대충대충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예리하고 섬세한 눈을 갖고 있다. 글쓰기를 하면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라도 무심코 넘기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글쓰기의 소재를 찾는 목적도 있겠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이 완전히 변화했음을 알게 된다. 매사를 예리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꿈꾸듯 살아가지 않는다. 삶이 주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가진 실용적인 혜택을 무시할 수 없다. 글을 쓰기 때문에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글쓰기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은 생각을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의 세계를 들여다보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직접 다듬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흔히 부하의 머리를 거쳐 나온 글을 다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지만, 글쓰기가 안겨주는 큰 혜택을 포기하는 셈이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생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자주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글을 쓸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 나갈 수 있다.

내가 즐겨 드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운전이다.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아서 따로 운전기사를 둘 형편이라 하더라도, 직접 운전을 할 줄 모른다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를 놓치는 셈이다. 직접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머리와 손을 거치는 글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에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반드시 직접 써야 한다.

당신은 왜 사는가. 부, 권력, 명성 등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심성 저변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부를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데도 이 같은 원초적 본능이 강력히 작용한다. 글로써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을 드러내는 일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내면의 소리가 글의 소재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20대 청년에서 30대 젊은이로, 그리고 40대 중년을 향해서 변화해 가는 자신을 지그시 지켜보는 것도 글쓰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누구나 처음 글을 쓰려면 두려움이 앞선다. 글쓰기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일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선뜻 시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제안하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긴다고 생각하면 뜻밖에도 간단하다. 예를 들어 부모라면 아이들의 유년기를 일기형태로 남겨 본다. 또 책을 읽고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또박또박 정리해 독후감을 쓴다면 글쓰기 입문으로 손색이 없다.

그냥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글을 쓰겠다는 결심이 서면 바로 컴퓨터를 켜서 이 글에 대한 여러분의 느낌이나 의견을 쓰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반드시 꾸준히 써야 한다. 글쓰기에 왕도(王道)란 없다. 얼마나 많은 글을 써보느냐로 좌우된다. 글을 쓰면 쓸수록 두뇌의 한 부분에서 글쓰기와 관련된 도로망이 커져간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일기형식도 좋고 메모형식도 좋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가장 좋은 도구가 노트북이다. 틈 날 때마다 파일을 만들어서 그곳에 생활 속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 둔다. 때로는 특정 주제를 두고 수필 형태로 써보기도 한다. 어떤 형식이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만일 책을 쓰고 싶다면 한번은 심리적 저항감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책이 중요하다. 한번 성공하면, 여러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쓰고자 하면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다음,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전체 목차를 정리한다. 그 다음에 각각의 목차에 속한 소제목의 글들을 채워나간다.

책을 쓸 때 내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먼저 전체 구성안을 마련하고, 각각의 구성안에 들어갈 소제목을 정한 다음, 소제목 하나하나를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글을 만들어 간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 책을 쓰는 일도 처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 잠정적인 계획안은 항상 변화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책을 쓰는 일이 긴 여행처럼 느껴질 것이다. 좀더 프로답게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읽는 것을 즐겨야 한다.

좋은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글쓰기와 글읽기는 거의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만약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남의 이야기를 읽기만 하고 자신의 유익함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 단순히 독자에 만족하는 것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주변에는 독서를 가까이하지만 정작 실용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남의 글이란 자신의 재창조에 직접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다. 세상살이에서 관계란 주고받는 것 아닌가. 읽은 만큼 생산해야 한다. 다음 생산을 위해 꼭 필요한 독서라고 하면 독서의 의미도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은 내면세계를 기록으로 남겨가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위험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누구나 좌절과 실의,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이때 글쓰기를 꾸준히 해왔다면 위기를 쉽게 넘길 것이다. 글쓰기란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멋진 도구다.   (끝)

글: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gong@gong.co.kr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기업센터·자유기업원 초대 소장 및 원장, 코아정보시스템·인티즌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저서로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 ‘공병호의 독서노트’ 등 50여권이 있다.
발행일: 2003 년 11 월 01 일 (통권 530 호)
쪽수: 38 ~ 4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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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퍼온글] 나의 책읽기 - 01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처음 접하고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천재는 많지만 꾸준한 인간은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의 유고집입니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은 출판되지 않았을 테죠. 이 책은 '김현의 독서일기'라는 부제를 달아도 좋을 책이죠. 그때 제가 그의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요. 어째서 대단하다고 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하다는 건 변함없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 동안 난 뭘 했나 하는 부끄러움에서 오는 충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렇듯 흘러가듯 글을 씀에도 대상의 핵심에 접속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대한 감탄에서 오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저는 10여년 전 대학에서 저보다 나이어린 동기들과 공부했습니다. 그때 저보다 나이가 서너살 어린 동기 중 하나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형 나이가 되면 분명 형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 거라"고. "그래, 그렇겠지."라고 말하며 저는 웃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 저는 그 사실을 잊었는데 그는 그걸 잊지 않았더군요. 10여년이 흐른 어느날 우연히 그 녀석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지금 나는 그 때의 형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이를 먹었음에도 그때의 형보다도 책을 읽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잘난 척이나 하기 위해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책을 읽는가? 누군가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겁니다. "닥치는 대로 읽어라. 그러다보면 읽는 법이 생길 거다."라고요. 그렇게 답해주면 질문한 이는 마치 제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으면서도 말해주지 않는 양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곤 합니다. "닥치는 대로 읽어라. 그러다보면 읽는 법이 생길 거다."란 말의 핵심이 어디에 있을까요? "닥치는 대로" 혹은 "읽는 법" 아마 아는 분들이 다 아실 겁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읽다"에 있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기 위해 애써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 일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 일인지... 깨워놓고 돌아서면 또 드러누워 버리는 게 애들이지요. 하지만 일요일 아침 명작 만화라도 할라치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 TV 앞에 앉는 것이 또한 애들입니다.

좋아서 하는 일도 힘든 법이지요. 하지만 즐기면서 맘 편하게 하는 일은 그만큼 덜 힘듭니다. 책을 읽는 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제가 책의 맛을 알게 된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 때문이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처음 읽었던 삼국지에 빠져들게 된 것은 삼촌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그 무렵 삼촌은 삼국지를 3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세상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며 삼국지를 권했습니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어린 제 손으로는 들기도 어려운 삼국지를 벗삼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삼국지를 100여번 가량 읽은 것 같습니다. 재미로 읽다가 중독되어 버린 것이죠. 지금도 삼국지를 붙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시 읽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이 삼국지의 매력이겠지요.

책은 무엇보다 재미로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책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요. 가령, 롤스의 "정의론" 같은 책은 재미로만 읽기엔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게 '정의론'이 다른 책들 가령,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배배꼬인 문장을 읽는 것보다 고통스럽거나 재미없었던 책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다시 앞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서 책을 읽는다. 그 행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읽을 것인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아무 곳에서나 책을 읽고, 아무 곳에나 책을 두고, 특별한 자세 없이 읽습니다. 그렇게 읽어도 기억에 남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실험을 햇다고 하더군요. 1500명의 학생들에게 30장 분량의 역사책을 읽게 하고, 20분이 지난 뒤에 읽은 책에 대해 요약해보라고 시켰더니 단지 15명의 학생들만이 기본적인 주제에 대해 이해하고 있더란 겁니다.

저는 책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한 책을 기억하기 위해 읽지도 않습니다. 기억하려고 일부러 공을 들여 읽지도 않습니다. 다음은 책 읽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많은 독서가들이 지적한 공통의 내용입니다.

1) 책 속의 모든 단어를 읽어야 한다.
- 앞서 분명히 오해라고 말했음에도 벌써 까먹은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수록된 모든 단어를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 긋고 요약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핵심이 무엇이고, 이것을 요약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책도 역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장은 다시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단락이 모여 하나의 주제 아래 소단원이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한 장을 이루고, 1부가 됩니다. 그것을 역순으로 풀이해보면 모든 문장, 모든 단어가 중요할리 없겠지요.

2) 한 번만 읽으면 충분하다.
- 저는 극장에서 본 영화는 반드시 집에서 다시 비디오로 봅니다. 인간이 사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50분이라고 합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죠, 영화의 평균 런닝 타임은 2시간 30분 가량합니다. 그런데 제 경우는 전자오락 할 때를 제외하고는 10분 이상 집중을 못합니다. 영화는 한 장면에 때로 책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에 저는 종종 영화를 보다고 남들은 다 봤다는 중요한 장면을 기억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한 번 본 영화를 두 번 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시간 낭비를 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 볼 필요가 없는 책을 샀다면 반품하셔야 합니다. 몇 장 안 되는 동화책도 다시 읽으면 다시 새로운 장면이 등장하곤 합니다.

3) 건너뛰거나 너무 빨리 읽으면 이해력이 떨어진다.
- 계단을 걷다보면 때로 두 개씩 오를 때도 있습니다. 다리 길이만 충분하다면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는 법은 없지요.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보면 중요한 대목과 그렇지 않은 대목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100미터를 질주하는 단거리 선수들도 스타트 순간과 스퍼트 순간, 골인 지점에서 힘을 안배한다고 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힘의 안배는 필요한 법이죠.

4) 내가 책을 읽지 못하는 건 빨리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 종종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꼭 그들의 탓은 아니지만 러시아인들의 악명 높은 이름 때문에 등장인물조차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제 집사람과 영화를 볼 때 제가 짜증내 하는 부분 중 하나는 저도 처음보고, 자기도 처음보면서 왜 저래? 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매우 친절하게 스토리 라인을 짜맞춰 가기 때문에 제가 답하고 있는 동안 혹은 물어보고 있는 동안 다음 대목에서 작중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장면으로 충실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즉,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읽다보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다음 어느 순간엔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책은 종류에 따라 읽는 템포와 방법을 달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김성동의 천자문을 읽는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꾸준하게 정독하는 방법도 맞을 것이고, 어느 특정 부분부터 읽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하지만 죄와벌을 건너뛰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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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퍼온글] 황인숙 - < 강 >

 

                              <  강  >

                                           -  황    인    숙  -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최근 제2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황인숙 시인의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에 수록된 시 ‘강’. 듣는 이에게 꽤 야속하게 들릴 것 같은 시 ‘강’이 작가들과 네티즌의 입에, 또 글에 오르내리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소설가 김형경씨는 최근 펴낸 심리 에세이집 ‘사람풍경’(아침바다)에서 이 시 전문을 인용하며 삶의 의존성을 넘어선 진정한 자아의 독립에 대해 풀어냈다. 김씨는 “우정이며, 이타주의이며, 휴머니즘이라는 생각에서 예전에는 누군가의 하소연, 고통의 토로를 몇시간씩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행동이 내면의 고통이나 삶의 어려움과 맞서지 못한 채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방어적 태도였으며 무엇보다도 억압된 의존성의 표출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그 뒤 모든 이타적 행위, 타인을 보살피는 행동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는 한밤중에 걸려온, 고통을 호소하는 후배의 전화에 “성인이 된 네가 스스로 보살펴야 해”라고 말했단다. 의존성이 극복되는 지점이 바로 진정으로 독립할 때 맞는 감정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같은 맥락에서 김씨는 황씨의 시 ‘강’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담아낸 것으로 시를 읽을 때마다 겉으로 관대하고, 초연해 보이는 시인인 황씨 역시 자신처럼 꽤나 많은 의존적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외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를 하소연하는 대상이 됐던 것 같다고 풀어냈다.

또 이 시는 잡지의 편집자 레터에 자주 인용되기도 하고, 숱한 네티즌들의 블로그와 카페에 오르고 있다. 이들은 ‘인생이 나한테만 관대할 거라는 환상을 버려라’라는 말과 함께 시를 인용하기도 하고, ‘사람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라는 글과 함께 시를 풀어놓기도 한다. 모든 이의 삶은 힘들다는 것을 강렬하고도 역설적으로 표현한 시가 독자들에겐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것이 김씨가 지적한 것처럼 독립적 인간들간의 관계이든, 스스로의 감정을 정리하고 만나는 젊은 세대의 ‘쿨’한 정서이든.

이에 대해 정작 황씨는 “좀 몰인정한 시지요. 엄살이 혐오스럽다는 이야기예요. 물론 그 사람에겐 엄살이 아니겠지만,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하소연하는 것 자체가 엄살이지요”라며 “결국 나도 살기 힘들다는 뜻이에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 힘듦 때문에 시를 쓴다”라며 “결핍감, 일상의 고난함, 어려움, 그 속의 절실함이 없으면 시를 쓰지 못하겠지요”라고 말한다.

한편 김수영문학상에 대해서도 시인은 “김수영의 열렬한 독자지만 정치적, 윤리적 감수성을 문학속에 버무려냄으로써 정치와 시를 동시에 밀고 나가는 일에는 능력도 관심도 없었다. 김수영의 이름을 딴 상을 받는다는 것은 다소 겸연쩍은 일이다. 하지만 상을 받는 것은 즐겁고 기쁜 일이다”라고 말하며 예의 ‘쿨’한 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최현미기자 chm@munhwa.com

*시집에 있었을 때는 별로 도드라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액자에 넣어놓으니까 확 살아나는구나. 시가 지은 집도 좋고 기사가 채워준 세간살이도 괜찮고 . 징징 짜지 말자. 두고두고 명심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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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퍼온글] 어느 사랑의 모습.

쌍문동 과외돌이. 꽤나 즐겁고 황당한 캐릭터인 이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좀 미루자. 오늘 매너가 할 이야기는 녀석의 부모님, 다시말해 매너의 고용주에 대한 이야기다.

모 대기업의 부장이신 저 과외돌이의 아버지. 그 분, 초기에 매너를 꽤나 싫어하셨다. 맨몸으로 서울에 와서 날품팔이로 하루하루 이어살며 검정고시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마쳐 대기업 건축회사에 입사해 전 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니다 부장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탓일까. 학교 수업만 제때 가서 듣는 것 이외에 만만치 않은 돈을 들여 과외수업까지 받는 게 그 분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을까. 매너가 인사를 꾸벅 드려도 본 척 만 척 인사도 제대로 안 받으시던 그분, 꽤 오랜 후에 그나마 '약발'을 좀 받은 과외돌이와 과외순이(그녀석 누나) 성적이 좀 달라지자 매너를 보는 눈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간혹 해외 출장에서 돌아와 거실 소파에 기대어 프로야구 중계를 보거나 신문을 읽는 그 분을 대하는 것은 여적 쉽지 않다.

지금은 이집트에 계신다고 했던가. 당연히 매달 집으로 얼마의 돈을 부쳐주시는 모양이다. 오늘 자락 긴 옷을 질질 끌고 가서 녀석 책상 옆에 앉아 "숙제 다 했니?"물으니 녀석이 실실 웃으면서 딴소리를 한다.

"선생님, 재밌는 거 보여줄까요?"

매너 공식반응: 숙제 안했냐? 뭔 쓸떼없는 소리여? 누구 칼 물고 엎어지는 꼴 보고싶어? 죽을래?

입을 삐죽대며 녀석은 왠 통장 한 면을 삐죽 내민다. 거기에 뭐라고 써 있었냐고?

여보이번주목요일                     1,000,000
당신생일축하해                         1,000,000
멀리있어당신                             1,000,000
안아주진못하지만                     1,000,000
사랑하오.XXX씨                         1,000,000

세상에 세상에... 매너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내용이 꼭 들어맞진 않겠지만 대강 저런 내용이었다. 입금자 성명을 쓰게 되어 있는 공란을 저렇게 채워 편지를 쓰다니. 그 고지식하고 무뚝뚝해 보이던 분이 저렇게 멋진 남자였구나. 역시 사람은 한 면만 봐가지곤 정말 모르는 거다. 매너, 저렇게 청년이, 중년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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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진 > [퍼온글] 책 만드는 일이 쉬울까? 반도체 만드는 게 쉬울까?

종종 나는 책 한 권을 반도체에 비유하는 것을 몰상식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책 한 권을 반도체에 비유하곤 한다. 처음 플로피 디스켓이란 것이 나왔을 무렵, 사람들은 신기(神器)의 저장매체라도 되는 양 1.44MB의 엄청난(?) 용량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언론에서 이야기했던 저장 용량으론 신문을 비롯해 문자의 경우 40만자 가까이 저장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다. 40만자 내외면 200자 원고지로 기준하면 2,000매로 장편 소설 한 편이 저장될 수 있는 정도다.(그 때 기억엔 더 엄청나게 떠들어댄 것 같지만)

그래서 당시 PC통신이 막 대중화되던 당시 출판사들은 필자들에게 워드프로세서나 아래아 한글 파일로 된 파일을 디스켓에 담아 우송해오는 것을 받거나 아니면 PC통신을 통해 받았다. 전화기 모뎀으로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이야기 몇.몇" 뭐 그런 프로그램을 썼었다. 그런 유행 탓이었을까? 종종 농담삼아 몇 KB(킬로 바이트)나 써서 보냈어? 하는 식으로 원고 매수 말고 디스켓에 담긴 용량으로 글의 매수를 어림짐작 해보기도 했다.

그게 어느 새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러니까 "코에이 삼국지 3"하던 시절의 이야기다(참고로 현재 이 시리즈는 10편까지 버전업되었다). 그런데 왜 책 한 권을 반도체에 비유하는 걸까? 그걸 반도체 만드는 이들이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겠으나 최소한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렇다는 거다. 그냥 반도체가 아니라 그 뭐더라 이것저것 많이 집어넣은 반도체로 생각해보면, 책 한 권 만들기란 공정의 복잡함, 혹은 결점 없고, 사고 안 나게 책 만들어내는 일이 꼭 그 놈의 반도체 만들어 내는 것 만큼 복잡하고, 때때로 불가항력이란 건데...

책은 잘 되기 보다는 잘 못되기가 쉬운 성질의 물건이라서 그렇다. 이건 편집자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어본 이라면 잘 안다. 우선, 기획 단계부터(영화판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좋은 필자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기획안이 있어도 필자가 못 따라주는 경우가 태반이고, 필자가 스스로 기획해서 출판 제안을 하는 경우엔 도무지 마케팅적인 요소를 전혀 안배해주지 않은 원고이기가 쉽다(자기만 재미있는 원고). 그래서 출판사들은 돈 잘 벌어주는 필자 선생님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거나 아예 출판사 사장이 특정 필자군이랑 특별히 잘 지낸다. 이 경우 대개 각종 인맥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된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원고가 쓰여지면 대략 단행본 책 한 권을 만드는데(문학 말고 교양 인문, 사회과학류)의 1,800장에서 2,000장의 원고가 필요하다. 이를 다시 역으로 풀어보면 도합 40만자의 글자에 오자가 없어야 독자들이 보고 잘 만들었다고 말해준다는 거다. 대개 편집자들은 교정을 4교 가량 본다. 1교, 2교, 3교, 4교(소위 O.K교)를 보는데, "40만자X4" 해보면 책 한 권 내기 위해 대략 160만자를 읽어댄다고 보시면 된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치 않은 것이 국문학과 교수님들도 틀리는 것이 우리 말과 글인지라, 예전에 아주 신중한 초보 편집자 시절, 나는 당시 덕수궁에 있던 국립국어연구원 같은 곳에 문법이나 기타 교정보다 잘 모르겠는 건 전화까지 해서 물어보곤 했다.

지금?
그런 짓 안 한다. 그런 짓 안 하는 이유가 뭐냐? 물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을 만큼 난해한 내용은 우리 문법 체계 상 여러 의견들이 존재하는 경우들이 있어서 명확한 답변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 나머지 것들은 사전에 나오거나 기타 관련 책자들을 찾아보면 된다. 참 열혈이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넘기 어려웠던 건... 외구의 인명과 지명과 관련한 표기 규정이었다. 웬간한 고수들도 이건 참 처치곤란한 문제다. 예를 들어 "호모 루덴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호이징하(의 표기도 참 통일 안 된다)와 더불어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로제 카이와의 경우, 그의 대표 저서 "놀이와 인간"(문예출판사)에선 "로제 카이와"로, 문학동네에서 나온 "인간과 성"의 경우엔 "로제 카이유"로 되어 있는데, 다시 이화여대 출판부에서 나온 "문화사회학으로의 초대"에서 "로제 카이와"는 "가이요와"로 표기된다.

어느 것이 맞을까? 물론 외래어니까, 뭐가 딱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가이요와"는 분명 이 책의 원저자가 일본인이라서 쓰인 일본식 표기를 고스란히 가져온 걸게다. 즉, 우리의 외래어 표기법상 현지 발음에 맞춘다는 건, 편집자들로 하여금 스타워즈의 수다쟁이 로봇 "R3P5"가 되란 뜻이다. 더욱 괴롭고 힘든 일은 일본인 인명 표기는 별도의 발음 설명 없이는 한자만 가지곤 발음을 알 수 없다는 거다(원래 걔네 말이 그렇단다). 게다가 외래어 표기법에 있어서의 사실상 유일한 원칙, 현지 발음에 따라서 표기하라는 건 잘 지켜지느냐? 단적인 예로 파리(Paris)가 맞나? 빠리가 맞나? 이건 또 어디나 파리로 적는게 일반적이다. 파리가 미국이나 영국의 도시가 아닌 이상 빠리가 맞는다고 해야 하는데, 영어가 습관처럼 굳어버려서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다. 중국어 표기도 난리부르스다. 신해혁명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던가 해서 이전 사람들은 우리 한자음대로 표기하는데, 신해혁명을 전후해서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우리 역사에 직간접으로 연계되었나? 쑨원, 손문, 장제스, 장쩨스, 짱쩨스, 장카이석 등등. 그럼,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영어 표기는 통일되었나? 요새 레이먼드 윌리엄스 책을 구하느라 헌책방 검색하기 위해 이름 검색으로 평균 4번은 해야 한다. "레이먼드, 레이몬드, 윌리엄스, 윌리엄즈"

종종 알라딘에서 번역 개판인 책이라 비난 받는 책들이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이야기 듣는 출판사의 편집자는 얼굴이 벌개질 거다. 그런데 이게 오로지 편집자의 잘못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번역은 대개 대학원 박사급 이상(아니면 전문번역자, 혹은 교수들)이 한다. 이 경우는 그나마 아직 학생 티를 덜 벗어서 서로 얘기가 된다. 물론 편집자가 또 초보 이상의 수준은 지녀야 가능하다. 그나마 편집자도 모르고, 번역자도 모르고, 더 문제는 편집자가 자기가 뭘 모르는지, 그걸 번역자와 소통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못 느끼면 그 책의 번역 상태가 좋아지길 기대하는 건 난망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필자 혹은 번역자가 편집자에게 고마워하는 일이 거의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자가 편집자에 비해 위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월급쟁이인지라 어쩔 수 없기도 하고, 그나마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 저자라는 이들이 또 어디가서 방귀께나 뀌는 자들이라 밉보여서 좋을 거 없기 때문이다.

종종 편집자는 저자라는 교수 밑에 딸린 조교처럼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판에 기획 단계 지나서 뭐 이렇게 고쳐주세요. 저렇게 고쳐주세요는 더욱 어렵고, 특수한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책의 경우엔 고집스럽게 우기는 저자(명망있는)에게 편집자가 이기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은 "알프레드 코르토"라고 다들 쓰는데도 굳이 "알후레드 꼬르토"라고 써야 맞다고 한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하비 콕스의 유명한 저서명이자 개념이기도 한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는 같은 책 안에서도 번역자에 따라 세속사회로 표기되기도 한다. 대개의 편집자들은 동일한 단어에 대해서는 한 권의 책 안에서는 동일한 표기로 통일하고, 개념을 정리해주고 싶어하는데, 이 경우엔 통일이 안된 거다. 확실치는 않지만 학자들간의 이견이 변역과정에서 조정되지 못한 것이거나, 아예 그럴 기회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 모든 걸 저자(번역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우선 편집자가 유능해도 좋을 일이고, 저자에게 원고 교정을 위한 시간을 좀더 주거나, 아니면 감수를 거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책은 문화이지만 동시에 상품이다. 상품의 회전수를 늘려야 장사가 된다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 아닌가? 나는 편집자 한 명이 일년에 책 4권 만들면 제 몫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대개 출판사에서는 한 명당 6-8권 이상 만들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도 웬만한 메이저 출판사를 제외하곤 돈 100만원 조금 더 받아가며 말이다(운 좋으면). 지금 한국영화가 누리는 저 영화가 과연 그냥 이루어진 일일까? 아마도 그건 우리 사회의 영화에 대한 욕망과 유행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역량(분명 다른 분야에서 일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을)을 총집결시킨 결과일 것이다. 만약, 편집자가 일반 기업체 수준의 연봉 수준만 된다면, 좀더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이들이 편집자로 일할 것이다. 지난 IMF 이후 국내 출판사들은 많은 편집자들을 내몰았다. 워낙 영세한 판국이라 노조 있는 출판사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대개 아동전집류(거기다 학습지를 병행하는)를 내는 메이저급 출판사들이나 방문교사 차원에서 만들어진 노조에 더부살이 형태로 들어 있을 거다.

그런데 IMF 이후 가뜩이나 척박한 출판환경에서 유능한 편집자는 태부족인 상황이 되었다. 다른 경제 분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출판사라고 비껴가는 건 아닐 테니 당연한 일이다. 출판에서 그나마 폼나 보이는 기획 파트를 지망하는 이들은 많은데(마치 영화판을 선망하는 것처럼), 그 기초인 교정.교열 볼 인력은 지망자가 없거나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출판사들도 이런 일들은 그냥 외주로 빼는 경우가 잦아진다. 사람을 구하자니 없고, 신입사원 뽑아서 교육시키자니 가르쳐 놓으면 나가 버릴 테고, 붙잡자니 돈 들고 해서 꽂감 빼먹듯 편하니까 외주로 돌리는 거다. 지금처럼 몇 년만 더 가면 교정교열의 귀신 소리 듣던 옛날 분들만 외주로 남고, 출판사는 그야말로 기획집단화 되어버릴 거다. 그런데 기획 지망생들이 과연 편집의 기초인 교정.교열에 대한 안목도 남다르실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이런 과정들 거쳐서 원고가 완성되면 그걸로 끝이냐? 천만에 말씀이다. 책이란 건 필름 뽑아서(예전엔 대지발이했지만, 참고로 난 그것도 해봤다), 하리꼬미(이거 일본말인데, 다른 우리 말이 뭐였더라)해서 PS판 떠서, 인쇄기에 앉히고, 인쇄 감리하고, 표지 찍고, 라미네이팅하고, 접지하고,제책하고, 재단하고, 책 나오면 보도자료 뽑고, 신문사에 돌리고....  그렇게 해서 독자들 손에 들어가야 끝나는 거다. 거기에 저자가 모든 원고를 다 써주는 게 아니다. 저자도 여러 길인데, 책 나오는 그 순간까지 편집자를 달달 볶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나 몰라라 하는 이들도 있다. 대개 전자의 경우를 싫어할 듯 싶지만, 제대로 된 원리원칙 있는 깐깐한 필자라면 편집자들이 욕은 할지언정 싫어하진 않는다. 편집자들이 왜 책 만들겠나? 그들도 책 좋아하다 보니 그 길로 샌 거다. 좋은 책 만들고 싶은 욕심은 저자 못지 않게 강하다. 하지만 책 날개에 들어가는 글이나, 표4(뒷표지)에 들어가는 카피 같은 걸 뽑는 것도 편집자의 몫이다.

거기에 보도자료란 건 기자들에게 우리 책 이런 거니까, 기사 자료로 잘 살펴봐주시고 기사 잘 좀 써달라고 보내는 건데, 이걸 또 잘 써야 한다(편집 아카데미 출신들에겐 특히 그런 아카데믹한 의식들이 있다). 이걸 꼭 틀린 말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꼭 맞는 말도 아니다. 그건 또 기자들과 데스크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책 나오면 직접 신문사로 책 들고 간다고 한다. 뭐 밥 먹고, 촌지 줄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기자도 사람인지라 직접 얼굴 보고, 부탁하면 아무래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서라는 건데... 내 알기로 그 사람 책 신문에 서평 나왔다. 그리고 끝으로 한 마디... 만약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출판사가 있다면, 그 출판사는 그래도 괜찮은 출판사다.

나는 종종 후배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준다. 니가 이름을 기억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 시인은 유명한 시인이고, 니가 한 구절이라도 그 구절을 외우는 시인이라면 우리 문학사에 남을 거라고... 오늘도 어떤 사람이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럴 때 무슨 생각이 드냐하면 요새 대한민국은 시인공화국이 아니라 시인공장이 되었나 보다 하는 거다. 출판사 차리는 거 쉽다. 망할 각오만 하면 된다. 그러니 책 한 권 만드는 게 반도체 만드는 일보다 쉬울 게 뭐가 있나? 난 책 한 권 만드는 일이 혼자서 반도체 만드는 것 만큼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책은 회로가 한 두 개 끊겨도 독자들 잘 만나면 나름의 몫은 한다는 거다. 내가 알라딘 서점에서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책도 별 셋 이하로 주고 싶지 않은 건, 알량한 동업자 의식이 아니라 그만큼 책 만드는 일이 이 나라에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 배종옥과 문성근, 박해일 주연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 잡지 편집장으로 문성근이 나온 적있다. 사람들은 편집장쯤 되면 대단한 뭐라도 되는 것으로 알지만... 뚜껑 열어보면 생산직 노동자만 못한 대접 받는 이들이 태반이다. 펜대 굴리고, 그래도 난 책 만든다란 의식으로 자위하며 사는 거 그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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