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태우스 > 우리 가족을 구한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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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좋은 리뷰가 세상을 바꾼다고, 100만원의 상금이 걸린 리뷰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그와 무관하게 리뷰의 개념을 바꿀만한 초현실 리뷰를 하나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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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지 않았다면 난 오늘 하루를 망쳤을 뻔했다. 나 뿐만 아니라 생신을 맞은 할머니와 어머님까지도.
드 보통이 든 여러 유형의 환자 중 한가지만 인용해 보자. 매우 무식한 사람이 있다. 무식을 보상하기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습관을 얻게 되었다” 모르는 게 나오면? “만물박사 특유의 공황이 발생한다... 하지만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 드 보통은 여기에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건 잠깐 동안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체면을 버리고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얻으라는 보통의 말이 오늘따라 절실하게 들렸던 건 내게 행운이다.
할머니 생신이라 별로 비싸지 않으면서 근사한 곳-용산에 있는 양평해장국-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난 퇴근버스를 탔고, 버스는 오늘따라 밀렸다. 7시 반까지 집에 간다고 했는데 늦을 거 같아 지하철에서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다.
“엄마, 저 십분만 늦을께요”
그랬더니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 “그냥 집에서 먹자!”
우리 어머님, 항상 이러신다. 당장 귀찮아서 이러시는 것 같은데, 오늘은 할머니 생신 아닌가.
“아이, 그러지 말고 갑시다. 오늘 할머니 생신이잖아요”
집에 갔더니 어머님은 또 이러신다.
“용산까지 언제 가냐. 그냥 이 근처에서 사먹자. 친구가 소개해 줬는데 설렁탕 맛있게 하는 곳이 있어”
나, 원래 욱하는 성질이 있다. 나름대로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이렇게 호응이 없으면 삐져 버린다. 삐지면? 밥을 안먹는다고 하고 친구를 불러내 술을 마셔버린다. 하지만 엄마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내가 집 근처 식당을 가는 데 동의한 것은 순전히 드 보통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길. 밥 안먹어!--> 친구랑 술마셔--> 엄마, 할머니 속상해한다. 내 몸 망가진다. 나도 속상하다.
두 번째 길. 엄마 말을 들어--> 맛이 없더라도 축하해 줘--> 엄마, 할머니 기뻐한다. 이 길이 훨씬 상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89세의 할머니와 배가 고픈 나, 그리고 엄마는 엄마 친구분이 권유해 준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그곳은 원래 보신탕집이었고 지금은 설렁탕을 파는, 아니 설렁탕 뿐 아니라 오만가지 요리를 다 파는 곳이었다. 손님이라곤 딱 두명, 넓은 테이블이 훵하니 비어 있다. 평소에도 그럴진대 오늘은 할머니 생신, 그런 데서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다시금 삐진 티를 냈다. “차라리 집에 가서 먹죠. 라면 먹을래요”
결국 엄마는, 모레네 설렁탕을 타협안으로 내세웠다. 평소 같으면 이미 늦었다. 난 삐진 후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엄마 말씀을 좇았다. 왜? 드 보통의 책을 읽었으니까.
첫 번째 길. 라면 먹는다--> 엄마, 할머니 속상해한다--> 밥까지 말아먹으니 엄청 살찐다
두 번째 길. 모레네 설렁탕을 간다--> 겁나게 맛있다--> 김치도 한통 작살낸다--> 우리 모두 뿌듯하다. 이 길이 훨씬 상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난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그래서 맛있는 식당이라는 느낌을 주는 모레네 설렁탕에서 고기 반, 국물 반인 설렁탕을 먹으면서 김치 한통을 작살냈다. “여기 김치는 정말 맛있어” 이래가면서. 조금 남기셨지만 할머니 역시 맛있게 드셨고, 우린 집에 와서 내가 사온 케이크로 해피버스데이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올해는 89세라 초가 많이 필요한데요, 내년에는 아홉 개만 있으면 된다구요”
크라운 베이커리 생크림 케이크를 먹으면서 할머니는 “고맙다. 니들 덕분에 호강한다”를 연발하셨다. 한손에는 내가 드린 용돈을 쥐고서.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드 보통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삐진다고 내키는대로 행동할 게 아니라, 드 보통처럼 각각의 경우에 어떤 득실이 있는지를 따져서 행동해야겠다. 내가 이 책에 고마워하는 이유다.
사족: 그나저나 엄마는 왜 그렇게 외식을 싫어하셨을까. 집에 왔을 때 난 그 이유를 알았다. 엄마는 내가 차를 넣는 동안 먼저 들어가서 잠깐이라도 <굳세어라 금순아>를 보시겠다고 뛰어올라가셨고, 케이블에서 내일 재방송을 하는데 채널이 몇 번인지 아냐고 내게 물으셨다. 그러니까 엄마가 시큰둥했던 건 순전히 금순이 때문, TV가 바보상자고 드라마가 국민 의식을 저하시킨다고 그러지만, 드라마의 폐해가 이정도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 엄마 나빠요! 초현실주의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