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kimji > 나도 서울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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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장 가는 날
박영택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서울에 살 때는 몰랐다. 내가 얼마나 용이하게 미술관람을 하고 사는지. 버스 한 번, 지하철 한 번을 타면, 기껏해야 두어번 갈아타면 찾아갈 수 있는 곳에 무수한 미술전시장이 있는지 말이다. 인사동이 그랬고, 사간동이 그러했고, 광화문이 그런 공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미술전시장이 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천의 현대미술관이라든지, 천안의 아라리오 갤러리 같은 경우는 서울 내에서의 이동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시간을 소요하면 다녀올 수 있는 미술관이었다. 그러므로 서울에 살 때,라는 전제는 조금 엄살일 수도 있다. 강원도나 경상도, 제주도도 마음만 먹으면 그 곳에 있는 미술관에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는 충분한 거리니까. 그러나 '쉽게', 혹은 '용이하게'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단연 서울만큼의 누림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은 또한 없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미술전시장이 밀집되어 있는 인사동, 사간동, 광화문은 이제 나에게는 경상도나 제주도처럼 큰 마음을 다잡고 떠나야만 도착할 수 있는, 이제 나에게는 너무 먼 지명이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럴까. 그 지명들이 아무렇지 않게 적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렴풋이 질투의 시선을, 그리움의 감정을, 그리고 조금은 심통이 난 기분을 가졌던 이유가 말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곧잘 묻곤 했다. 어떻게해서 미술관에 다니느냐, 혹은 어떻게 해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 미술관을 어떻게 가게 되었느냐, 라든지 혹은 보면 무얼 아느냐,라고도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과 미술작품을 보러 전시장에 가는 일은 똑같은 의미라고. 영화,라는 매체가 시간 떼우기든, 공부이든, 데이트 코스의 일환이든, 혹은 개인적 목적에 의해 영화를 보는 이유처럼 각자에게 나름의 취미와 취향, 유의미의 실천이듯이 미술관에 가서 그림이나 미술작품을 보는 것도 똑같은 의미라고 말이다. 그럼 또 묻는다. 비싸지 않느냐고. 보면 좀 알겠냐고. 그 쪽을 전공하거나 공부하지도 않았는데도 그게 가능하냐고 말이다. 그럼 또 대답한다. 비싼 전시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보다는 저렴한 가격이며(내 생애 가장 비싼 전시는 로댕, 램브란트, 샤갈 정도의 전시였고, 그 비용은 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외 시립이나 국립미술관의 경우는 천원 미만이며, 대체로 전시장 입장권은 오천원 내외로 생각하면 된다), 영화를 전공한 사람만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만이 소설을 읽을 줄 아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미술전시장에 가는 일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만, 경험이 없는 이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또한 자신과 전혀 무관한 세상의 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미술관에 가는 것을 여전히 겁내하거나 혹은 낯설어 한다. 관심이 있어도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다.
나는 그네들에게 예전에는 <내 사랑 미술관(황록주, 아트북스, 2003)>이라는 책을 권하곤 했다. 미술관과 미술이 일반인에게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고, 또한 생활 속에서 함께 어울려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해주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책과 더불어 <미술전시장 가는 날>을 권하고 싶다. <내 사랑 미술관> 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인 시선으로 기술되어 있어 어렵게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 책이 오히려 미술작품과 미술관, 그리고 관람 자체,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를 만나는 길을 안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책의 포인트는 다소 다르다. <내 사랑 미술관>이 미술관,이라는 자체에 조금 더 의미를 두어 찾아가는 방법이나 위치 정보까지 다루고 있다면, 이 <미술전시장 가는 날>은 조금 더 광의의 의미에 기대어 미술, 자체로 초점이 맞춰줘 있기 때문이다)
목차만 후루룩 훑다보면, 미술전시장을 다니는 관람객, 그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어쩌면 싱거울 것 같은 인상이다. 미술전시장이 밀집되어 있는 인사동과 사간동, 광화문의 미술관을 지도책을 보듯이 차례로 열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은 단순히 그런 정보만을 제공하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우선, 인사동, 사간동, 광화문 지역의 일괄적인 이미지와 의미, 정보를 제공하고, 그 지역의 실제적 위치를 따라 미술전시장을 하나하나 되집어간다. 마치 필자를 따라 미술전시장 순례를 하듯이 말이다. 첫번째 미술전시장이 등장한다. 그럼 그 미술전시장이 유래와 역사를 말해주고, 그 미술전시장과 필자의 개인적인 일화, 그리고 그 미술관에서 보았던 인상 깊었던 전시나 작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 사이사이 미술비평과 작가론, 작품론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하나의 전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음은 바로 옆에 위치한 미술전시장. 그 다음은 그 앞의, 그 옆의, 그 뒤의 미술전시장을 따라 주욱 이어진다. 책을 총체적으로 봤을 때 대등한 꼭지로 연결된 거대한 열거법으로 기술된 책인 셈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읽어가는 묘미이며, 최대의 장점이 된다.
필자는 대략 서른개가 넘는 미술전시장을 따라 각 미술전시장에서 한 작가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시도한다. 노화랑에서는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이수동을, 인사아트센터에서는 조각가 이일호를, 갤러리 룩스에서는 사진가로서의 신현림을, 학고재에서는 평면회화의 송현숙을, 성곡미술관에서는 신미경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부부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듯이 이야기는 계속계속 이어진다.
미술전시장에서 그 전시장에서 전시를 했던 작가로, 그 작가의 작품세계로, 그 작품세계가 의미하는 통시적 공시적 의미에 대해서, 그런 총체적인 미술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관람자가 미술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혹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이어진다. 마치 미로를 헤매듯이 이야기는 펼쳐지지만 따지면 아주 일목요연한 기술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겁고 어려운 미술이론서 한 권 보다는 조금 산만하더라도 이런 구성으로 짜여진 책 한 권이 현대인에게 미술이 가지는 의미와 미술전시장에서 미술 관람의 의미에 대한 현실적인 답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 명쾌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지만, 전반적으로 아우르고 있는 내용을 섭렵하고나면, 어쩐지 미술 관람이, 미술전시장을 가는 행위가 부담스러운 행위가 아니고, 또한 너무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어떤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왜 미술전시장을 다니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림을 보는 행위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되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그저 취미일 수도 있으며, 조금 더 겉멋을 부려 표현한다면 아름다운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은 열망의 표출이라는 치기어린 답변을 할 수는 있지만, 정작 내 스스로도 의아하고 또한 당황하기란 마찬가지다. 게다, 수월하게 미술전시장을 다닌다고 해서 내가 미술사를 꿰뚫고 있거나, 혹은 현대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거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개인적 목적이 있어서 그걸 위한 관람도 아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인 관람자의 행태로 작품을 수집하거나 혹은 창작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술전시장에 간다. 그리고 그 행위를 조금 더 유의미하게 의미부여하기 위해 이런 책을 읽는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것을 맹신해서가 아니라(나는 오히려 모르는만큼 느낀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알고 나서 내 스스로의 의식을 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은체를 위한, 허위의 지적 욕구가 아니라,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내 스스로의 앎을 위해, 조금 더 깊은 느낌을 얻기 위해, 때로는 과감하게 군더더기를 버리거나 껍데기를 구분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미술전시를 위해 자문을 구하는 지인들에게 이 책을 과감하게 권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의 글은 장황하여 긴장을 놓치면 가독성을 잃게 하는 단점을 지녔지만, 간간히 전문 용어때문에 일반인들에게 거리감을 만드는 요소도 있지만, 처음부터 어떤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말랑한 목적, 혹은 알량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데에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국내작가들의 이름을 몰라도, 그들의 작품세계가 현대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받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의미 파악이 안 되더라도, 미술판의 세계에 대해서 전무하더라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있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서도 책 곳곳에서 만나는 내게 익숙한 지명과 그 지역의 카페, 식당의 이름들, 그리고 문구점과 그 주변의 이미지, 사변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이기도 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그 공간에서의 인간적인 필자의 동선과 시선을 읽는 일도 꽤나 흥미롭고 즐겁다. 게다 세련되게 편집되어 있는 삽화나 미술전시장 사진, 소개하는 작가들의 작품 사진들을 볼 수 있는 기회(충분하다,라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만한 것도 어딘가!)도 부여하고 있다.
내가 무수히 지나쳤던 인사동, 사간동, 광화문이 이 책을 통해 다른 의미로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절감한다. 책을 통해 만나는 미술의 세계가, 미술전시장의 세계가, 책 내용으로서의 끝이 아니라, 직접 그 공간을 디뎌 내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오히려 책을 읽는 동안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민들이 갑자기 부러워졌다. 지난 날 내가 더 열심히 그곳을 디디지 못한 나의 게으름이 갑자기 억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