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호밀밭 > 웃고 있는 삐에로를 닮은 소설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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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을 묶은 소설집의 제목은 작가와 잘 어울리곤 한다. 신경숙의 소설집 제목은 은근함이 있다. <딸기밭>이나 <종소리>는 은은한 매력이 느껴진다. 은희경은 <타인에게 말걸기> <상속>과 같이 약간은 냉소적인 제목의 소설집을 냈었다.(<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는 은희경의 두 번째 소설집의 제목은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이었어야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김연수는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서정성을, 김영하는 <오빠가 돌아왔다>로 호방함과 호기를 내보인다.

제목만으로 마음을 끄는 소설집이 있다. 이 소설집도 제목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끌 만하다.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호기심이었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다소 예민한 제목이다. 이 제목을 어떤 간증처럼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소설집을 사서 표제작부터 읽는 일은 드문 편인데 이 책은 최순덕의 이야기부터 읽고 싶었다. 최순덕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처럼 2단으로 구성된 심상치 않은 편집이 눈길을 끌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노니>로 시작하는 성경을 본뜬 편집과 구성이 독특했다.

단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초콜릿 상자를 여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8편의 작품은 얌전하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초콜릿과는 다르다. 줄을 맞춰 있지도 않을뿐더러 줄을 서라고 해도 제대로 설 것 같지 않은 초콜릿이다. 금박의 포장지를 뚫고 나올 만큼 개구쟁이 같고, 몸에 붙은 아몬드를 흔들어서 툭툭 털어 버릴 것 같은 자유분방함이 있다. 사실 이 소설들은 달콤함이나 이국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초콜릿보다는 땅에서 자라는 감자처럼 흙 냄새가 나는 소설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실체도 알기 힘든 고독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스로 마이너리그라고 자책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쨍하고 해뜰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도 아니고 허황된 희망에 부풀어서 사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현실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지만 현실에 뿌리내리지는 않은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은 땅 밑으로도 사라질 수 있고, 머리카락의 힘으로 하늘로 떠오를 수도 있고 뒤로 걸어 다닐 수도 있다. 어느 날 스타가 되어서 나타날 수도 있고, 햄릿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은 이시봉, 최순덕, 순희, 순녀 등으로 도시적이거나 세련된 느낌을 주는 이름들이 아니다. 순한 이름으로 독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딱딱한 현실이 아닌 조금은 몽롱한 환상의 세계에 반쯤 기대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웃고 있어도 정말로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삐에로 분장을 한 것과 같다. 하지만 풍선처럼 둥글둥글한 삐에로 옷을 벗으면 마른 몸매가 드러날 것만 같고, 삐에로의 분장을 지우면 울고만 있을 것 같은 슬픔이 느껴진다. 잘 읽히는 재미난 문장이 속도감 있게 다가오지만 마냥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소설들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들을 읽고 마음이 허탈했다거나 쿵 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읽는 사람은 웃어도 쓰는 사람은 웃으며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 소설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이 소설, 저 소설을 기웃대며 읽고 있다. 한 달 간 거의 소설만 붙들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과 저 소설이 합쳐지고, 저 소설 주인공이 이 소설 주인공과 겹쳐져도 별 무리 없이 연결되는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집만은 좀 달랐다. 이 소설들은 신생아실에 엄마 이름 이기호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올망졸망 모여 있는 아기들과도 같다. 이 소설들이 이기호라는 이름표를 단 8명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절대로 일란성 쌍둥이는 아니다. 누구는 키가 크고, 누구는 얼굴이 길다. 누구는 벌써 옹알이를 하고 있는가 하면 누구는 발만 꼼지락거린다. 비슷비슷한 8명, 혹은 10명의 쌍둥이를 낳은 엄마는 누구에게는 파란 옷을 입히고 누구에게는 머리핀을 꽂아서 구별을 해 주어야겠지만 이 쌍둥이들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누구는 웃고 있고, 누구는 울고 있는, 개성 강한 쌍둥이들이다.

흥부네 집 자식들처럼 못 먹고 못 입고 있지만 그래도 심성 고와 보이는 쌍둥이들을 만난 기분이다. 지금은 흥부네 자식이지만 언젠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부잣집 도련님, 아가씨로 변신할 꿈을 간직하고 있는 쌍둥이들. 다음에는 더 고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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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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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기 있는 신인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그런 면에서 이기호의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을 만난다는 것은 패기가 넘치는 실력 있는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최상의 즐거움을 갖고 있다.


지난 1999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기호의 소설집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점은 ‘화법’이다. 등단작이기도 한 ‘버니’는 ‘랩’이라는 음악 형식을 차용해 보도방 남자와 아가씨의 삶을 그려내고 있으며 표제작이기도 한 ‘최순덕성령충만기’는 성경의 어투를 차용하고 있다.


이런 화법들은 쉽게 쓸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기호는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다른 걸 제쳐두고 이 화법만 본다 해도 신인 작가 이기호의 이름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게 만들 정도다.


“나는 말없이 계집애들 데리고, 봉고차로 왔어, 좆나게 담배 피며 순희를 기다렸어, 계집애들 투덜대며 순희를 기다렸어, 순희는 한참 후에 나왔지, 가슴팍에 만 원짜리 지폐를 꽂은 채, 바보같이 웃으며, 순희가 왔어, 조수석에 앉으며, 나를 보고 웃어, 웃으면서 랩을 해, 신이 나서 랩을 해…” <버니 중에서>


“19 최종 학력이 고졸이 된 순덕은 이렇다 할 직장도 갖지 않고 밤낮으로 교회 내에 머물렀으니 월요일부터 주일밤까지 거의 매일 하나님 아래 기거하더라 그 어미와 함께 교회에서 밥을 먹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드리고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지라…”<최순덕 성령충만기 중에서>


하지만 이기호는 눈에 띄는 화법만 갖고 사람들에게 찾아온 작가가 아니다. 경쾌하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한 화법 뒤에 숨겨진 사람들의 슬픈 얼굴을 때로는 냉소적인 얼굴을 조용하게 내미는 그 솜씨가 일품이다.


맹목적으로 종교에 매달린 끝에 ‘바바리맨’을 아담으로 여겨 구원하려 한다는 ‘최순덕 성령충만기’나 뒤통수에 박통의 눈을 갖고 있어 반짝하는 존재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결국엔 그것으로 인해 망해버리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백미러 사나이’, 군대와 획일적인 사회의 구성원들 때문에 애꿎은 피해를 당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등 이기호의 작품 곳곳에서는 유쾌하지만 마냥 유쾌할 수 없게 만드는 냉소적인 시선들이 자리 잡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막나가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갖은 것 없고 머리에 든 것 없는, 이른바 ‘하류인생’들이 저자의 소설집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저자는 그들의 묘사하는데 있어 최대한 희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울어야 될 상황에서 웃게 만드는 저자의 솜씨는 만만치 않은 역설의 힘을 갖고 있다.


“좆나게 공부만 한 기자 새끼도 보도, 좆나리 이쁜 척하는 앵커도 보도, 줄이면 괜찮아, 줄이면 괜찮아, 말하면 괜찮고, 쓰면은 안 된다, 우리를 욕하면서, 우리 말 다라 쓰는, 바구니 같은 새끼들, 좆나게 폼 잡고 있지만, 내 폼이나 네 폼이나, 엎어치나 메치나, 바구나나 빠구리나…” <버니 중에서>


“각종 매스컴이 몰려들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계속 뒷걸음질칠 뿐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에 한 말을 잃은 리포터는 건강엔 아주 그만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멘트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웅얼거렸다. 그때부터 전국 공원이나 약수터에서 뒷걸음질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늘어났고,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부딪혀 넘어지는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백미러 사나이 중에서>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볼 줄 알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 낼 줄 아는 신인 작가 이기호. 등단이후 5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에 나온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힘 있는 신인 작가의 등장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기대할 만한 작가의 행보를 알려주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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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ustystuff > {최순덕 성령 충만기}, 욕으로 꾸는 꿈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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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와그의책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말의 엄숙성에 딴죽을 겁니다. 그는 묻습니다. 왜 말이 엄숙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고 어려워야 하냐고. 그의 소설에 따르면, 일견 멋져 보이는 지식이나 지성의 언어도 뒤집어보면 사실 별 것 아닙니다. 왜 '보도방'이라고 하면 되고 '보지 도매'라고 하면 안 될까요? '보도방'이 '보지 도매방'의 줄임말이니 '보도방'이라고 하나 '보지 도매방'이라고 하나 차이가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지성의 언어(엄숙한 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른바 '식자'들은 그네들의 입맛에 맞춰 말로 현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식자들의 언어 속에서 현실은 왜곡되고 조작됩니다. 식자들은 그 왜곡된 현실 속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언어는 합리화를 위해 고도로 발달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그들에게 만들어주는 세계는 가짜 세계입니다. 살 만 하고 견딜 만 하게 가공된 세계입니다. 합리화를 모르는 언어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만이 진짜 세계를 살아갑니다. 진짜 세계는 늘 팍팍하고 괴롭습니다.

늘 팍팍하고 괴로운 진짜 현실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욕밖에 없습니다. 하층민들의 언어가 거칠고 막돼먹은 것은 그들이 하루하루 부딪히며 사는 생활 자체가 거칠고 막돼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현실은 지랄 같아서 욕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욕은 솔직합니다. 그것이 현실과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생생한 욕은 곧 생생한 세계입니다.

이기호는 이것을 압니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에 모인 그의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대부분이 문맹자들입니다. 그들은 '글/활자'를 모릅니다. 고상하게 말할 줄 모르고 고상하게 쓸 줄 모르며, 때로는 아예 어떤 말도 못하고 어떤 글도 못 씁니다. 이기호는 이런 식으로 말의 엄숙함에 맞섭니다. 그는 욕-말-글(활자) 순으로 올라가는 상승구조에 시비를 겁니다. 욕은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지만 말은 그것을 한 번 에둘러 표현하고, 글은 그것을 더 꼬아서 표현합니다. 욕은 날 것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말은 거기서 도망가고, 글은 아예 그것을 부정합니다.

이기호가 보기에 식자들의 언어는 현실도피의 언어입니다. 그들은 공중정원에서 저희끼리 아옹다옹 살아갑니다. 때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지만 그뿐입니다. 때로 아래를 향해 뭐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뿐입니다. 이기호는 이게 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으로, 일자무식한 사람들의 언어로 소설을 씁니다. 쉬운 말로 무거운 현실을 노래({버니})하기도 하고, 어려운 말로 우스운 현실을 짐짓 강변({최순덕 성령 충만기})하는 척하기도 하면서 말을 가지고 놉니다. 말은 엄숙한 무엇이었다가 그의 소설에서는 그냥 놀잇감이 됩니다. '엄숙한 말'의 권위는 이렇게 조롱당합니다. 발가벗겨집니다. '엄숙한 말'들이 우리에게 '엄숙할 것을' 요구했던 이유는, 그들의 텅 빈속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음이 벌겋게 드러납니다.

이기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갑니다. 그의 단편소설들에는 유난히 환각이나 환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는 현실 속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을 보여줍니다. 그 환상들은 그러나 도피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식자들의 엄숙한 말이 만들어내는 '살 만 한' 가상 세계와는 다릅니다. 그 환상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었다가, 마지막에는 꼭 그 징그러운 정체를 드러냅니다. {햄릿 포에버}에서 주인공은 햄릿을 보았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봅니다. {머리칼 서신}에서 주인공은 처음에는 여인을 성녀로 보았다가 마지막에는 메두사로 봅니다. {백미러 사나이}는 눈을 감고 뒤를 보면서 즐거웠다가, 눈을 뜨고도 뒤를 보게 되면서 인생을 망칩니다.

이렇듯 이기호가 보여주는 환각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 '환각'의 세계 속으로 도망갈 수 없습니다. 도망가려다 좌절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세계는 도망가려 하기 전의 세계보다 훨씬 더 무섭고 솔직합니다. 환각에서 깨어나 다시 보는 세계는 과연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이기호는 그래도 환각을, 환상과 상상을 권합니다. 아프지만 상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 익숙해지지도 말고 현실을 벗어나려고도 하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아픈 상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상상은 '엄숙한 말'의 거짓 권위에 속아서 꾸는 허황된 꿈과는 다릅니다. 그 꿈에 권위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꿈은 욕으로 꾸는 꿈입니다. 솔직해지기 위해 꾸는 꿈입니다. 더러운 것을 인정하기 위해 꾸는 꿈입니다.

우리는 '위를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공중정원의 식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세계도 사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 봤자 팍팍하고 지긋지긋한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사실 어디에도 '행복한 위쪽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피라미드는 가짜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좌절하게 됩니다. 더 불행해지고 더 처절해집니다.

문제는 저 위의 허공이 아니라 딱딱한 우리의 발밑입니다. 이기호가 보여주는 꿈은 우리에게 발밑을 내려다보게 합니다. 그는 지독한 환각이 우리를 상승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현실을 바로, 그리고 가까이 보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설집은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으로 끝나고,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 모자가 파종한 씨감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집 앞, 어느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이 정말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 눈앞에 보이는 아무 땅이나 파보아라. 지상에서부터 약 십오 센티미터 정도만 파고들어가면, 그곳에 당신이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당신이 상상치도 못했던, 씨감자가 싹을 틔우고 있을 테니...... 주변이 온통 시멘트 천지라고? 철물점에 가서 시멘트 깨부수는 망치를 사라, 이 친구야. 시멘트 밑에 뭐가 있겠는가?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가볍지만 충분히 아픈 소설집입니다. 여기에 모인 소설들은 크게 휘두르는 어퍼컷이나 훅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세기의 잽들입니다. 한 방 크게 맞아야 넘어질 것 같았던 우리는 그러나 잽 몇 방에 무너지고 맙니다. 세계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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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조경란 읽기
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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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네개의 의미가 다른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 소설집은 지독한 나, 작가 자신이 자신을 갉아 먹고 드러낸 이야기들이 모인 작품집이다. 나 라는 우주를, 나 라는 동네를, 나 라는 거리를, 나 라는 여자를, 나 라는 타인을 혹독하게 걷고 걸어가며 써내린 글들이다. 내게는 쉬운 책읽기는 결코 아니었다. 한편으론, 조경란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조경란이 쓴 글을 잘 읽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였는지를.

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났던 조경란의 글들은 이색적이었다. 뚜렷한 서사를 갖고 있지만, 표현하는 이미지와 불쑥 튀어나오는 화두의 촛점은 늘 생경스러웠다. 그녀의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고, 그녀의 글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그녀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지금의 모습처럼 (사진에서 본) 검은 단발머리에 새하얀 얼굴, 마른 몸, 그 모두를 차치하고 독보적인 시선을 갖고 있을 것 같은 검고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나를 보고 웃었지만, 그녀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듯 말하고 말았지만 그녀에게 압도되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전율이다.

그 이듬해였나, 우연히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녀의 글을 신문지면으로 읽게 되었다. (내 생애에 신춘문예 지면을 처음 보게 된 계기다)  우리 동네 뿐만 아니라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만 나가도 눈에 띄던 '불란서 안경원',  제목을 단 그녀의 소설을 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을 보았었구나 싶어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글은 신문에서, 서점에서 자주 보게 되었으나 어쩐 일인지 나는 그녀의 눈빛만 기억하는 걸로 만족했는지 책은 사보지 않았다. 그러다 틈틈이 종합선물 같은 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난 그녀의 글은, 도시에서 사라진 그녀 안에만 들어있는 놀이 동산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낯설어 나와는 다른 취향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국자 이야기>를 읽은 건 올해 문학과 사회 봄호에서였다. 나는 단번에 매료되었다. 그 커다란 눈에 힘을 주고 모니터와 펜과 종이 사이를 노려보며 썼을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시쳇말로 하면, 독하게 썼다는 느낌이었고,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아의 초상을 잘 벼린 칼로 고른 호흡으로 해부하였다는 침착함에 사로잡혔다. 나의 내부와 나의 외부가 싸우는, 자아찾기의 소설. 얼른 그녀의 소설집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국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역시 그녀는 자기와 잘 싸우고 있는 작가 이전의 한 사람이었다. 그 뒤에 실린 글들은 나와 가족, 함께 세상을 떠받들듯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온다. 소설의 배경도 가까운 서울의 거리, 세상에 놓인 거리들이다. 

조경란에게는 두 가지의 세계가 그녀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현재 모든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와 그녀가 살아왔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고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 연유로 인해 그녀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 세계는 쉽게 대화하고 심심치않게 많은 동물들의 이름도 딸려나온다. 아무렇지 않게 코끼리와 대화하고, 악어가 나오고, 마냥 길을 걷기만 하고, 뿔뿔이 가족과 흩어져 결국 혼자 남는 나의 이야기들이다.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쉬운 독서는 아니었다. 나는 내 집중력을 탓해야 했고 가벼운 엉덩이를 원망해야 했고 옆에 쌓인 다른 책들을 책상 밑으로 내려놓아야 했다. 재미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소설집은 독선적이라고 할 만큼 자기와 싸운 전투의 흔적이며 자기와 치열했던 순간의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나와의 싸움을 힘들게 치루고 있는 작가의 글을 두고 어떻게 재미와 흥미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를 괴롭혀 봤자 결국 나 자신이다. 나를 벗어나려고 해봤자 결국 나 자신이다. 옷을 갈아입듯 나를 갈아치울 수는 없지만, 나와 싸워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나와 싸워 이겨 나를 받아들이는 삶이 어떤 가치를 갖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완성을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도 나를 조금은 편하게 놓아주는 일일지 모르겠다. 거북이를 방생하는 일만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일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고 빌기 전에 내가 나를 풀어주고 다른 어깨에 기댈 정도 만큼 놓아주는 일도 나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게 곧 나의 발견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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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분홍달 > 리처드 롱, 나도 그를 안다..
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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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샤갈의 그림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리처드 롱'이란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세계의 오지를 걸으며 그곳에서 만난 돌, 나무, 흙 등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 때론 삐까삐까한 전시장에서 그럴싸하게 전시도 하지만, 그가 걷기를 통해 만났던 소재의 현장에서 그 만의 전시를 하기도 한다. 보통 설치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엄청난 산고를 통해 창조했을 자신의 작품을 소유할 수 없는 작가에 대해 연민을 느끼곤 한다. (정작 당사자들은 괘념하지 않을테지만...) 하지만 '리처드 롱'의 작품에선 뭔지모를 숙연함을 느낀다. 그리고 반갑게도 '국자 이야기' 가운데, '100마일 걷기'를 통해 다시한번 그를, 우리나라 오지에서 채취한 돌로 만들었다는 '나선형'이란 작품을 떠올린다.

'국자 이야기' 한마디로 집중력이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몇번이나 책장을 되돌려 읽어야 했는지 모른다. 1인칭에서 3인칭 다시, 3인칭에서 나로, 독자들의 미간을 찌푸리게하며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점의 변화, 때론 국자로, 때론 코끼리로, 기린으로 변화하는 상징에 대해서도 쉽게 읽어 내려가긴 어려운 책이다. 난 엉뚱하게도 '국자 이야기'를 읽으며 '한 인간의 독백내지, 일기 또는 수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존재에 대한 다양한 고백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국자 이야기'를 비롯해서 '나는 봉천동에 산다' '돌의 꽃'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 '잘 자요, 엄마' '100마일 걷기' '입술' '좁은 문'까지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평론가 손정수의 말대로 하나같이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의 욕망이 진하게 드러나는 글들이다.  "나는 수년 동안 내가 벗어나지 못했던 균형에 대해 생각했다. 내 삶의 정교한 하나의 의식이라고 생각해왔던 그것은 일시적인 정렬일 뿐이었으며 또한 나 자신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힘든 투쟁에 대한 역사이기도 했다...나의 삶은 그것으로도 이미 한 세계이며 나의 의지가 그 세계를 관통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첫번째 소설 '국자 이야기'의 결말부분이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만이 자신다울 수 있다는 주인공은 외삼촌의 국자를 통해 균형과 대칭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기에 이르는데, '잘 자요, 엄마'에서도 역시 불안과 공포, 자살충동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주인공의 힘겨운 싸움이 펼쳐진다. 

그런가하면,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는 봉천동을 배경으로 소통과 공존에 관해 이야기한다. 개발의 논리에 집을 잃은 건 사람만이 아니라, 그곳에 깃들어 살던 고양이들에게도 해당한다. 심각한 환경문제로 까지 발전했던 들고양이들, 허나 이를 세심하게 돌봐주는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는 봉천동에 산다. '한쪽 날개로 날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불화와 상처를 딛게된다. 이 외에도 '나는 봉천동에 산다' 와 '입술', 그리고 '좁은 문' 역시, 스스로 혹은 환경에 의해 단절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현대인들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비밀이 많아지고,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덫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면서 여성이 쓴 글, 혹은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글에 대해 호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젠 "만약 내가 지금 고독하다고 느낀다면 이제 내 삶과 주변의 작은 것들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질 때'라는 기린의 말을 받아 들일만큼, "어쩌면 말이란 건 결핍이 아니라 과잉일지도 모르겠다. 때론 내가 원하는 것들까지도 전달하게 되니까.."돌의 꽃의 한부분처럼,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삼켜야 될 때가 많다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 지금에선 '국자 이야기'라는 책이 식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점묘화 처럼' '칼리그람 처럼'  존재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명확하게 '보여질 수 없는 나'를 끈질기게 찾아내려는 작가의 치열함 때문에 끝까지 이 책을 놓을 수가 없었고, 다 읽고 난 지금에선 자격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조경란'이란 작가를 맘껏 칭찬해주고 싶다.

"어느 날엔가 나에게도 걸어서 생긴 선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완전한 하나의 원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마일 걷기'의 한 부분).. 내가 살아서, 걸어서 생긴 선이 정말로 원이 될 지 아님, 그저 구불구불한 선으로 혹은 바늘 땀처럼 끝날지도 모르지만, 내 삶의 증거로선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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