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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별 네개의 의미가 다른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 소설집은 지독한 나, 작가 자신이 자신을 갉아 먹고 드러낸 이야기들이 모인 작품집이다. 나 라는 우주를, 나 라는 동네를, 나 라는 거리를, 나 라는 여자를, 나 라는 타인을 혹독하게 걷고 걸어가며 써내린 글들이다. 내게는 쉬운 책읽기는 결코 아니었다. 한편으론, 조경란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조경란이 쓴 글을 잘 읽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였는지를.
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났던 조경란의 글들은 이색적이었다. 뚜렷한 서사를 갖고 있지만, 표현하는 이미지와 불쑥 튀어나오는 화두의 촛점은 늘 생경스러웠다. 그녀의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고, 그녀의 글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그녀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지금의 모습처럼 (사진에서 본) 검은 단발머리에 새하얀 얼굴, 마른 몸, 그 모두를 차치하고 독보적인 시선을 갖고 있을 것 같은 검고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나를 보고 웃었지만, 그녀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듯 말하고 말았지만 그녀에게 압도되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전율이다.
그 이듬해였나, 우연히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녀의 글을 신문지면으로 읽게 되었다. (내 생애에 신춘문예 지면을 처음 보게 된 계기다) 우리 동네 뿐만 아니라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만 나가도 눈에 띄던 '불란서 안경원', 제목을 단 그녀의 소설을 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을 보았었구나 싶어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글은 신문에서, 서점에서 자주 보게 되었으나 어쩐 일인지 나는 그녀의 눈빛만 기억하는 걸로 만족했는지 책은 사보지 않았다. 그러다 틈틈이 종합선물 같은 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난 그녀의 글은, 도시에서 사라진 그녀 안에만 들어있는 놀이 동산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낯설어 나와는 다른 취향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국자 이야기>를 읽은 건 올해 문학과 사회 봄호에서였다. 나는 단번에 매료되었다. 그 커다란 눈에 힘을 주고 모니터와 펜과 종이 사이를 노려보며 썼을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시쳇말로 하면, 독하게 썼다는 느낌이었고,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아의 초상을 잘 벼린 칼로 고른 호흡으로 해부하였다는 침착함에 사로잡혔다. 나의 내부와 나의 외부가 싸우는, 자아찾기의 소설. 얼른 그녀의 소설집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국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역시 그녀는 자기와 잘 싸우고 있는 작가 이전의 한 사람이었다. 그 뒤에 실린 글들은 나와 가족, 함께 세상을 떠받들듯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온다. 소설의 배경도 가까운 서울의 거리, 세상에 놓인 거리들이다.
조경란에게는 두 가지의 세계가 그녀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현재 모든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와 그녀가 살아왔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고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 연유로 인해 그녀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 세계는 쉽게 대화하고 심심치않게 많은 동물들의 이름도 딸려나온다. 아무렇지 않게 코끼리와 대화하고, 악어가 나오고, 마냥 길을 걷기만 하고, 뿔뿔이 가족과 흩어져 결국 혼자 남는 나의 이야기들이다.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쉬운 독서는 아니었다. 나는 내 집중력을 탓해야 했고 가벼운 엉덩이를 원망해야 했고 옆에 쌓인 다른 책들을 책상 밑으로 내려놓아야 했다. 재미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소설집은 독선적이라고 할 만큼 자기와 싸운 전투의 흔적이며 자기와 치열했던 순간의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나와의 싸움을 힘들게 치루고 있는 작가의 글을 두고 어떻게 재미와 흥미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를 괴롭혀 봤자 결국 나 자신이다. 나를 벗어나려고 해봤자 결국 나 자신이다. 옷을 갈아입듯 나를 갈아치울 수는 없지만, 나와 싸워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나와 싸워 이겨 나를 받아들이는 삶이 어떤 가치를 갖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완성을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도 나를 조금은 편하게 놓아주는 일일지 모르겠다. 거북이를 방생하는 일만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일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고 빌기 전에 내가 나를 풀어주고 다른 어깨에 기댈 정도 만큼 놓아주는 일도 나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게 곧 나의 발견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