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kimji > 한국소설에 밝은 미래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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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2004년을 뒤흔든 한국소설,을 꼽으라 하면 단연 이 작품집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에는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여하튼, 재미와 입담, 특이성, 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면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보편타당한 재미,라는 것이 있는가 고민해본다. 재미가 있다,라는 부분은 개인차가 무척이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심오하고 복잡한 이야기구조를 재미있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한바탕 큰 웃음을 만들어주는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해피엔딩이 재미있다고, 연인이 헤어져야 재미있다고 하는 독자들, 누군가 죽어나가야만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답이 없음으로 끝나야 재미있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나같은 경우는 흐지부지-오리무중의 인물이 나오는 걸 재미있어 하기도 하므로 나 역시도 그 개인적 성향이 강한 독자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재미, 보편타당한 재미있음,은 불가능한가? 나는 아무래도 있다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이기호의 소설집 이 <최순덕 성령충만기> 때문인 듯 싶다.
적어도 내가 말하는 재미는 웃음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웃음 이면에는 새하얀 백지 상태가 아닌 적절한 메시지를 수반한 웃음이어야 유쾌하게 웃을 수가 있다(그것이 실소이든, 비소이든). 그리도 수다스러워야 한다. 침묵으로 일관되는 웃음(재미)은 그로테스크로 빠지기 십상이니까. 인물의 비루함이나 정상적이지 못한 우스개의 행동도 재미있지만, 그들의 사고체계의 비정상화, 비일상화도 웃음을 지어낸다. 또한 그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우스개 행동들, 그 행동들로 인해 펼쳐지는 정상적인 일상 속에서의 좌충우돌적인 상황들이 그 재미를 배가 시킬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흔쾌히 동의하는 재미는 일단 입담이어야 한다. 거짓말처럼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 정말이야? 라고 되물어도 능청스럽게 정말이라니까- 라고 맞장구치는 상대에게 듣는 이야기처럼, 그런 밑도끝도 없는 이야기의 속도성, 집중력이 잘 어울어진 이야기 말이다. 이기호의 소설이 그런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작가의 소설들은 모두 재미있다. 단연코 재미있다.
어슴푸레하게 어떤 계보를 떠올려본다. 성석제, 김영하, (김종광), 박민규, 그리고 이기호. 이들의 특징은 앞서 말한대로 소설 속의 입담 만큼은 둘째하면 서러울 작가들이다. 이야기가 정말인지 궁금해지는,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진짜인지 의심해보고 싶은 이야기들. 거짓말도 적당해야 믿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도통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펼치므로 독자들을 계속 헤매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하는 가독성과 그 이야기 속에 교묘히 숨겨져 있는 메시지를 찾게끔 만드는 집요함, 그런 것들을 유발시키는 작가들과 작품들. 그래서 독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소설을 '재미있다'와 '입담이 좋다'라고 평하곤 한다. 나 역시 그 생각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진짜에 대한 거짓말을 구사하고, 그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보이기 위해 진짜 거짓말을 보탠 거짓말을 펼쳐 도대체 진짜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하고, 그래서 그 진짜를 찾는 것이 소설의 메시지로 통하게 한다면, 김영하는 분명하고 정확한 이야기라고, 어디 흠잡을 데 없는 거짓말을 펼쳐 놓아 독자로 하여금 깜빡 속게 만드는, 그러나 그 속임수의 이면에는 극명한 메시지가 거대하게 서 있어 독자에게 기함을 터트리게 만드는, 아주 명석한 도시인다운 재미를 구사한다. 김영하가 도시적 이미지의 재미라면 김종광은 반도시적인 이미지로, 이건 정말이야- 라는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보여지는 일화들을 거침없이 내뱉어주므로 호탕한 재미를 만들어 준다. 박민규는 현실과 환상/가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어디가 진짜고 어디가 거짓말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그런 의미 자체로서의 진실을 말하는 재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기호의 재미는? 김영하의 도시적 감수성에 깃든 냉철한 관찰에 의한, 성석제의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구사하며 김종광의 능청스러운 리얼리티의 거침없는 진술력, 박민규의 모호한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한 거짓말도 얼마간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 이기호의 소설에는 확실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형식의 특이성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한 형식이 서술구조와 메시지의 확고한 자리매김에 밑바침이 되어주는, 또 다른 구성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제작인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경우가 그러한데, 페이지를 2단으로 구성하고(성경책처럼), 서술어미를 또한 성경과 흡사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성과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다고 쉽게 치부될 문제는 아니겠으나, 적어도 그런 형식이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는 독자를 아주 손쉽게 속이는(거짓말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아주 부합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햄릿 포에버'의 경우에는 문/답으로 구성되어 마치 희곡을 읽는 듯한 이미지를 차용해 소설 내적 서사구조에 용이하게 흡입하게 만들고, '버니'의 경우는 리듬감을 살린 한 곡의 랩('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나를 찾아왔어, 사무실로 왔어, 우릴 보러 사무실로 왔어, 그녀의 매니저도 왔어, 좆나리 멋진, 크라이슬러 미니 밴을 타고 왔어, 매니저의 양아치들도 함께 왔어,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 p.7)처럼 소설 전반을 구사하고 있다.
일단 독자는 그런 생경스러운 형식에 놀라고 긴장하게 하나, 그 긴장은 오히려 이야기의 흡입에 일조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독자의 낯설음은 재미있다,의 의미로 편입되게 된다. 물론, 근간은 이야기구조이며, 그 이야기구조 속에 숨겨진 메시지다. 하지만 적어도 그 메시지까지의 진입을 용이하게 돕는 일을 작가 스스로 자청해서 구사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그것이 한낱 소설의 형식을 실험하는 치기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라딘의 소개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절에서 길러진 고아 소녀('머리칼 전언'), 지하철 앵벌이('옆에서 본 저 고백은'), 생활에 찌든 무능한 가장('최순덕 성령충만기'), 자기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모르는 청년('백미러 사나이'), 민통선 근처서 감자밭 가꾸기에만 여념이 없는 순박한 아낙('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등 사회 주변부에 놓인, 교양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막돼먹은' 사람들의 삶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마치 작정을 하고 '막돼먹은'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고집하는 작가 의식은 무엇인가를 고려하는 일도 이기호의 소설을 읽는, 그래서 그 재미의 이유를 찾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들의 삶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갖자는 일차적인 목적의식에 의해서? 정상적이지 못한 것도 존재한다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왜 독자가 그런 생각을 해야하는가(왜 작가는 그런 생각을 유도하는가). 내가 뭐라고,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내가 도대체 뭐라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곱씹으며 나의 삶을 반추하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내가 뭔데. 그것이 바로 이기호 소설이 부여하는 재미 이면에 있는 메시지이며, 또한 그 메시지로 인해 나의 재미가 그저 백짓장처럼 말끔한 유쾌함이 아닌, 깊고 진중한 즐거움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느새 독자도 작가가 펼쳐놓은 거짓말과 허구의 현실 속에서(그러나 그 허구의 현실이 사실 현실의 현실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한바탕 신나게 같이 나뒹굴었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호의 소설은 재미있다. 보편타당한 재미,라는 것이 있다면 작가의 소설은 그에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머리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재미있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조금 더 세심히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미지, 그 인물들의 행동반경의 속해 있는 실재의 현실, 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문체의 실험, 그리고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독자 스스로의 생각의 잣대와 그 잣대를 만들어 준 아주 무섭고 끔찍한 선입관과 더 나아가 그런 선입관을 만들어준 저 깊은 무엇에 대한 탐닉. 그것들을 세심히 찾아낸다면 이기호의 소설들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말만 잘 한다고 해서, 거짓말을 감쪽같이 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을 단순히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사람, 재미있는 소설이 되기위해서는 분명 핵심이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독자의 몫이다. 그 몫을 찾아낸 사람만이 작가 이기호의 소설에 진정한 박수를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