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살인교수 > 신이 예정한 구원과 인간이 진실로 바라는 구원
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시대에 과연 진정한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 세상에 던져진 모든 선과 악, 그리고 고뇌
와 절망은 누구의 창조물인가. 그것이 만약 신의 창조물이고 신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에 지
나지 않는다면 인간사에 던져진 그 모든 역경은 결국 신의 의지란 말인가. 따라서 어떤 죄
악도 상처도 결국은 신에 의해 예정된 일부이며 우리의 구원과 몰락도 그 예정에 따를 뿐인
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신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카인은 신의 이름으로 저주받고 심판 당해
야 하며 배고픈 민중들은 미래가 없는 가난에 허덕여야 하는가. 그것이 신의 무책임한 방임
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절대자(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작가 이문열
은 이 물음에 대한 고찰을 '사람의 아들'로 대신한다.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이문열이 이십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쓰기 시작하여(이런 어마어마한
작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십대 중반에
중편으로 완성했다 이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문열은 79년 이 작품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장편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
의 작가적 출발점과 이후 작품 활동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어찌하여 그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종교적 신성의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그의 처절했던 인생사와 맞물려 있다. 남로당계 간부였던 아버지의
월북과 가족의 이산, 월북자 가족에 대한 감시와 그에 대한 피해의식이 빚은 가혹했던 어린
시절의 삶, 이러한 유랑과 방황의 유년기가 청년 이문열로 하여금 사회와의 소통을 차단하
고 홀로 침전하여 관념의 늪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했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 그를 둘
러싸고 있는 현실은 바람직한 가치가 상실되어 버린 회의와 환멸과 상실의 정서 그 자체였
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책 세계 속에서 방대한 지식을 축척
하며 그 선험적 비판철학으로 인간과 삶의 탐구에 골몰했다. 그것은 그의 기구한 성장기에
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에 불과했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의 탄생 역시 청년 이문열에게 필
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사람의 아들'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이문열이 이 작품을 완성시켜 출판
사를 찾았을 때 무수히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세 가지 정도
로 생각해보았다. 첫 번 째로 70년대의 문단 상황을 고려해볼 때 유신 독재에 대한 사회학
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작품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고 두 번 째로 종교 문제를 정면
에서 다루었다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어쩌면, 이
작품이 가진 강렬한 '추리'소설 적인 색채와 '판타지 무용담'적인 면모가 당시 '순수문학'(예
술로서의 작품 자체에 목적을 둔 문학 - 필자는 아직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른다)
만을 고집해온 국내 문단에 달갑지 않은 사생아로(관념주의의 옷을 입은 통속소설 정도로)
비쳐졌기 때문이리라.
정말로 이 소설은 굉장히 '추리소설'적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전의 히트를 거둔 '다빈치
코드'와 닮아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사건 전개나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 방식, 종교 문
제를 다룬 지적 스릴러의 요소 등이 상당부분 닮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닮은 점이라면
방대한 지식을 에너지원으로 하고 있음에도 '굉장히' 재미있다는 점이겠다. 이문열은 이 작
품을 쓸 때 그 자신의 엄청난 독서량에 의해 이미 베스트셀러의 공식을 꿰차고 있었으며 그
노하우가 응축된 작품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정
말 잘 읽힐 수밖에 없는 정교한 오락적 장치들의(추리 소설적 요소를 가미, 미스터리를 증
폭시킨 것, 그리고 신화적 인물의 재해석과 그 파란만장한 여정 등이 치밀한 액자형 교차적
구성으로 강렬한 흡입력을 제공한다) 경지를 보여주며 출간 즉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
했다. 그리고 밀리언셀러로 등극하여 지금까지 현대 고전으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오락적 측면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이 작
품에는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위대함이다. 필자는 아직 이문열의 모든 작품을 읽
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비롯한 단편 몇 편, 그리고
'젊은날의 초상'이 전부다. 하지만 이문열 연구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대부분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고 가장 많이 팔린 책도 역이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고 필자
역시 이 작품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최고 작품으로 보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가장 간단한 이유를 말한다면 이 작품에 내재된 작가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색채,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고 이채로운 성찰은 사실 이후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면적인 모습으로 반복해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야말로 이문열 문학의 뿌
리요 모체인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이문열 작품은 '사람의 아들'로 통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액자 형식으로 맞물려서 진행된다. 액자 속의 '아
하츠 페르츠' 이야기와 액자 밖의 민요섭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진행된다. 민요섭은 비상한 두뇌와 세상을 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신앙심 깊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민중 구제라는 실천 신학에 빠져들게 되고 그후 홀연히 자취를 감
추었다가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살인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남 경사는 민요섭의 자취를 더
듬어가다 그가 남긴 노트에서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소설을 접하게 된다. 민요섭이 쓴 소
설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와 남 경사가 수사하는 민요섭 살인사건이 서로 맞물리며 소설
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진적인 방식으로 단서와 비밀들이 공개되어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을 거의 일대일의 방식으로 대응시
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인 일역을 하는 것처럼 생각과 행동이 닮아 있고 그래서
어느 한 쪽을 탐색하면 저절로 다른 한 쪽까지 탐색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민요섭의 행적
속에 묻어 있는 의문은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고,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 속
에 묻어 있는 의문은 민요섭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 형성되어진다.
그러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러한 구성을 압도하는 것이 바로 폭발하듯 쏟아지는
강렬한 주제의식이다. 이 주제의식은 이문열 스스로가 성장기를 통해 억제하기 힘들었을 사
회와 자아에 대한 심각한 성찰의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이 작
품의 위대함이고 필자는 이 위대함에 전율했다.
무엇보다 필자를 전율시킨 것은 민요섭과 아하스 페르츠가 주장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근
원적인 물음이었다. 이것은 소설 속 두 주인공의 여정 중 신에 대한 회의, 방황, 반항에 해
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묻는다. 신의 말씀에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다수의 군
중을 '죽음' 말고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어째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오로지 '죽음'으로
만 구원하려 하고, 공허한 천국의 약속만으로 굶주림과 모진 고난을 겪게 하는가. 그것이 신
의 자비인가. 신의 사랑인가. 또, 원수를 사랑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그 모든 가르
침의 실천이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 교훈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 아닌가. 신으로
인해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 인간과는 별 상관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 아
닌가.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절대자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
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며 어째서 사악한 무리가 사악함을 품
지 않도록 하지 않으며 어째서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방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당시까지 누구나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종교적 위대함에 대한 강한
반기였다. 작가는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 그리고 예수를 비롯한 무수한 신적인 존재들을
내세워서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한다. 그래서 그때까지 무조건적으로 맹신했던
신과 종교에 대한 근간을 뒤흔들며 무엇이 진실이며, 그 진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다각도의 생각을 하게 했다. 어쩌면 작가는 아버지의 부재를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
었던 지도 모르겠다. 혹은 당시의 견고했던 독재 권력을. 아무튼, 필자는 이러한 물음을 필
자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필자가
무신론자임을 감안하더라도) 아하스 페르츠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다빈치 코드'에서 다
루어진 신화와 역사의 날조는 역시 절대적 권력가들의 횡포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의혹이 더
욱 짙어졌다. 정말로 신이 절대적 선의 존재라면, 어째서 악은 만들었는가. 어째서 오늘날
가난에 허덕이며 자살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가. 열차 전복 사고를
구경만 하는가. 전쟁으로 죽어 가는 무수한 인명들을 구하지 않는가. 어떤 신성한 이유들을
내세워도 이것은 정말 신의 방종이며 모순이다. 신화와 역사는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의 것
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음이나 의혹이 아닌 절대적인 맹신인 것이
다.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유혹하려 했던 사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
만 소설 속의 아하스 페르츠는 결코 사악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민요섭도 마
찬가지다. 그들은 신앙에 의혹을 품었을지언정 배고픈 민중 속으로 몸소 뛰어들어 그들에게
빵을 제공했다. 두드리는 자에게 현실 속에서 구원의 문을 열어준 이는 신이 아니라 그들이
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신은 신의 이름으로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것을 창
조한 신, 심지어 그가 사탄으로 몰아세운 모든 악마들도 사실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무
엇이란 말인가. 이 이해할 수 없는(신의 아들이라면 이해했겠지만, 사람의 아들인 필자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인상적인 비유와 현란한 수식의 말씀으로 덮어버리려는가.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민요섭의 종교로의 회귀를 조금은 갑작스럽게 결정짓는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의 최후는 분명하게 결론짓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들에 대한 몫일 테다. 작가
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부정을 방대한 지식과 깊이 있는 사유로 펼쳐
보인다. 그리고 최종 선택은 책을 읽는 이들의 판단에 맡긴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의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과 의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의
간극을 열어 보이고 신과 인간에 대한 환기를 통해 맹신에 대한 경종을 울린 것까지가 작가
가 제시한 전부다. 그 다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무수한 문제들은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열려
있는 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떠올랐다. 난장이 가
족이라면 어땠을까.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래서 사회와 어떤 방
식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 중 어느 것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 테두리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절대적 권력자들이라면 테두리 밖의 인간들에게 무
엇을 선택하게끔 종용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하스 페르츠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를 것은
없다는. 절대자와 맹신자, 카인, 그리고 헐벗고 배고픈 '사람의 아들'들은 여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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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려고 집은 책들마다 어쩜 이리....읽었던 책인고.. 정신머리 없는것도 알아줘야하지만 무엇보다 읽고 난후에도 내 정신과 육체에 깊게 새겨지지 않아있는 감동의 가벼움때문에 더 화가난다. 읽을때는 어머 너무 좋다! 라고 침을 튀겨가며 주위 사람들에게 아는것 없는것 어디서 얼핏 들은말까지 더해서 잘난체 플러스 밥맛없는 체까지 하며 떠들어댔을꺼면서... 지금은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니...췟.... 여튼 그래서 집어든 책 그냥 꼽지 않고 복습중이다. 이번엔 좀 새겨보자 가슴팍에...깊게.....

그리고 무슨 책을 읽으면 좋을까..뒤척뒤척..이다보니 리뷰들이 장난 아니다. 그냥 한편의 또 다른책을 읽는듯 재미있다. 오늘 발견한 비숍님의 서재에는 보물같은 리뷰들이 잔뜩 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퍼나르다보니 너무 많이 퍼날랐나보다. 이제 리뷰에 대한 리뷰를 달아야하나..^^;;; 열심히 리뷰읽고 좋은책 선택하고 땡스투 눌러 그것에 보답해야지 국자이야기와 성령충만기의 리뷰들 엄청난것들 디기 많다. 아...책 안읽어도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은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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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imji > 한국소설에 밝은 미래 있을지니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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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을 뒤흔든 한국소설,을 꼽으라 하면 단연 이 작품집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에는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여하튼, 재미와 입담, 특이성, 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면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보편타당한 재미,라는 것이 있는가 고민해본다. 재미가 있다,라는 부분은 개인차가 무척이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심오하고 복잡한 이야기구조를 재미있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한바탕 큰 웃음을 만들어주는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해피엔딩이 재미있다고, 연인이 헤어져야 재미있다고 하는 독자들, 누군가 죽어나가야만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답이 없음으로 끝나야 재미있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나같은 경우는 흐지부지-오리무중의 인물이 나오는 걸 재미있어 하기도 하므로 나 역시도 그 개인적 성향이 강한 독자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재미, 보편타당한 재미있음,은 불가능한가? 나는 아무래도 있다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이기호의 소설집 이 <최순덕 성령충만기> 때문인 듯 싶다.
  적어도 내가 말하는 재미는 웃음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웃음 이면에는 새하얀 백지 상태가 아닌 적절한 메시지를 수반한 웃음이어야 유쾌하게 웃을 수가 있다(그것이 실소이든, 비소이든). 그리도 수다스러워야 한다. 침묵으로 일관되는 웃음(재미)은 그로테스크로 빠지기 십상이니까. 인물의 비루함이나 정상적이지 못한 우스개의 행동도 재미있지만, 그들의 사고체계의 비정상화, 비일상화도 웃음을 지어낸다. 또한 그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우스개 행동들, 그 행동들로 인해 펼쳐지는 정상적인 일상 속에서의 좌충우돌적인 상황들이 그 재미를 배가 시킬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흔쾌히 동의하는 재미는 일단 입담이어야 한다. 거짓말처럼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 정말이야? 라고 되물어도 능청스럽게 정말이라니까- 라고 맞장구치는 상대에게 듣는 이야기처럼, 그런 밑도끝도 없는 이야기의 속도성, 집중력이 잘 어울어진 이야기 말이다. 이기호의 소설이 그런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작가의 소설들은 모두 재미있다. 단연코 재미있다. 

  어슴푸레하게 어떤 계보를 떠올려본다. 성석제, 김영하, (김종광), 박민규, 그리고 이기호. 이들의 특징은 앞서 말한대로 소설 속의 입담 만큼은 둘째하면 서러울 작가들이다. 이야기가 정말인지 궁금해지는,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진짜인지 의심해보고 싶은 이야기들. 거짓말도 적당해야 믿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도통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펼치므로 독자들을 계속 헤매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하는 가독성과 그 이야기 속에 교묘히 숨겨져 있는 메시지를 찾게끔 만드는 집요함, 그런 것들을 유발시키는 작가들과 작품들. 그래서 독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소설을 '재미있다'와 '입담이 좋다'라고 평하곤 한다. 나 역시 그 생각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진짜에 대한 거짓말을 구사하고, 그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보이기 위해 진짜 거짓말을 보탠 거짓말을 펼쳐 도대체 진짜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하고, 그래서 그 진짜를 찾는 것이 소설의 메시지로 통하게 한다면, 김영하는 분명하고 정확한 이야기라고, 어디 흠잡을 데 없는 거짓말을 펼쳐 놓아 독자로 하여금 깜빡 속게 만드는, 그러나 그 속임수의 이면에는 극명한 메시지가 거대하게 서 있어 독자에게 기함을 터트리게 만드는, 아주 명석한 도시인다운 재미를 구사한다. 김영하가 도시적 이미지의 재미라면 김종광은 반도시적인 이미지로, 이건 정말이야- 라는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보여지는 일화들을 거침없이 내뱉어주므로 호탕한 재미를 만들어 준다. 박민규는 현실과 환상/가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어디가 진짜고 어디가 거짓말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그런 의미 자체로서의 진실을 말하는 재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기호의 재미는? 김영하의 도시적 감수성에 깃든 냉철한 관찰에 의한, 성석제의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구사하며 김종광의 능청스러운 리얼리티의 거침없는 진술력, 박민규의 모호한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한 거짓말도 얼마간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 이기호의 소설에는 확실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형식의 특이성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한 형식이 서술구조와 메시지의 확고한 자리매김에 밑바침이 되어주는, 또 다른 구성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제작인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경우가 그러한데, 페이지를 2단으로 구성하고(성경책처럼), 서술어미를 또한 성경과 흡사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성과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다고 쉽게 치부될 문제는 아니겠으나, 적어도 그런 형식이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는 독자를 아주 손쉽게 속이는(거짓말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아주 부합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햄릿 포에버'의 경우에는 문/답으로 구성되어 마치 희곡을 읽는 듯한 이미지를 차용해 소설 내적 서사구조에 용이하게 흡입하게 만들고, '버니'의 경우는 리듬감을 살린 한 곡의 랩('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나를 찾아왔어, 사무실로 왔어, 우릴 보러 사무실로 왔어, 그녀의 매니저도 왔어, 좆나리 멋진, 크라이슬러 미니 밴을 타고 왔어, 매니저의 양아치들도 함께 왔어,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 p.7)처럼 소설 전반을 구사하고 있다. 
  일단 독자는 그런 생경스러운 형식에 놀라고 긴장하게 하나, 그 긴장은 오히려 이야기의 흡입에 일조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독자의 낯설음은 재미있다,의 의미로 편입되게 된다. 물론, 근간은 이야기구조이며, 그 이야기구조 속에 숨겨진 메시지다. 하지만 적어도 그 메시지까지의 진입을 용이하게 돕는 일을 작가 스스로 자청해서 구사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그것이 한낱 소설의 형식을 실험하는 치기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라딘의 소개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절에서 길러진 고아 소녀('머리칼 전언'), 지하철 앵벌이('옆에서 본 저 고백은'), 생활에 찌든 무능한 가장('최순덕 성령충만기'), 자기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모르는 청년('백미러 사나이'), 민통선 근처서 감자밭 가꾸기에만 여념이 없는 순박한 아낙('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등 사회 주변부에 놓인, 교양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막돼먹은' 사람들의 삶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마치 작정을 하고 '막돼먹은'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고집하는 작가 의식은 무엇인가를 고려하는 일도 이기호의 소설을 읽는, 그래서 그 재미의 이유를 찾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들의 삶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갖자는 일차적인 목적의식에 의해서? 정상적이지 못한 것도 존재한다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왜 독자가 그런 생각을 해야하는가(왜 작가는 그런 생각을 유도하는가). 내가 뭐라고,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내가 도대체 뭐라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곱씹으며 나의 삶을 반추하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내가 뭔데. 그것이 바로 이기호 소설이 부여하는 재미 이면에 있는 메시지이며, 또한 그 메시지로 인해 나의 재미가 그저 백짓장처럼 말끔한 유쾌함이 아닌, 깊고 진중한 즐거움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느새 독자도 작가가 펼쳐놓은 거짓말과 허구의 현실 속에서(그러나 그 허구의 현실이 사실 현실의 현실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한바탕 신나게 같이 나뒹굴었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호의 소설은 재미있다. 보편타당한 재미,라는 것이 있다면 작가의 소설은 그에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머리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재미있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조금 더 세심히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미지, 그 인물들의 행동반경의 속해 있는 실재의 현실, 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문체의 실험, 그리고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독자 스스로의 생각의 잣대와 그 잣대를 만들어 준 아주 무섭고 끔찍한 선입관과 더 나아가 그런 선입관을 만들어준 저 깊은 무엇에 대한 탐닉. 그것들을 세심히 찾아낸다면 이기호의 소설들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말만 잘 한다고 해서, 거짓말을 감쪽같이 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을 단순히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사람, 재미있는 소설이 되기위해서는 분명 핵심이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독자의 몫이다. 그 몫을 찾아낸 사람만이 작가 이기호의 소설에 진정한 박수를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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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내가없는 이 안 > 경고! 지금 웃는 게 다가 아닙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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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뭐랄까...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은 한마디로 이렇다. 대학 다닐 때 3년 동안 농촌활동을 다녀오면서 매번 느끼던 나의 누추함이 더욱 남루해진 옷을 껴입고 패션쇼라도 하듯 멋들어지게 걸어오는 걸 봐야 하는 난처함이다. 띠용,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면서, 네가 도대체 뭐라고 그렇게 고개 쳐들고 있나, 하는 자책하는 심정이 든다는 거다. 그런데 그 움츠러들고만 싶은 느낌이 들어 난처해하고 있는 내 앞엔 진짜로 웃기는 리마리오 같은 인물이 더듬이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어쩌랴, 웃었다 정신 차렸다, 다시 참을 수 없는 웃음을 뿜어야 하는, 이 해괴한 느낌을 마구 간질이듯 주입하는 소설이다, 이거다.

땅을 파봐라, 그곳에 네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씨감자가 싹을 틔우고 있을 테니... 뭐 온통 시멘트 천진데 어떻게 하냐고? 아 그럼 철물점서 망치라도 사서 깨보라 이 말이다, 그 밑에 뭐가 있겠냐고? 이런 답답한 친구 같으니...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

아니 이 뜬금없는 뒤통수 때리는 소리는 뭔가? 갑자기 작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옴짝달싹못하고 선 내가 망치를 들고 있는 모양이 아닌가. 작가는 정말 땅이라도 파서 이런 씨감자 같은 글들을 틔워내는 모양이다. 현실을 등돌리지도 않으면서 머릿속에 온통 본드를 불어넣어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몽롱해 있는 듯한 그의 이 소설들은 그 정체가 대단히 궁금하다. 그의 소설에는 3류 매춘의 선두주자인 보도방을 운영하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나오고, 이리저리 모아놓은 아이들이 코묻혀서 벌어오는 돈을 갈취해 상납하는 앵벌이들이 나오고, 이제 좀 제집처럼 드나들던 감옥살이에서 벗어나보려다가 우연히 의도하지도 않은 본드를 다시 불게 된 잡범 출신이 나오고, 이 죄많은 세상 주님만 섬기면 된다는 신앙으로 똘똘 뭉친 최순덕이가 나오고, 기가 막히게도 검은 소에게서 정자를 받아 아이를 낳은 감자 같은 여자가 나온다.

도대체 작가의 이력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책의 앞날개를 본다.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이 작가는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인생들을 어디서 다 긁어왔을까 싶다. 문체를 말하자면, 이 역시 소설이라는 테두리를 뛰어넘고 메롱, 혀를 쑥 내밀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액자소설의 형식은 너무 클래식한 편이라 말할 계제도 아니고, 랩 형식으로 후렴구까지 넣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노래를 하는 것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형식은 물론, 경찰서에 끌려서 취조실에서 작성하는 듯한 형식, 경건한 성경과 같은 편집과 문어체 옷을 입혀 신앙의 맹목성을 꼬집는 형식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발칙하고도 다양한 형식들은, 마치 처음 보는 열대지방 과일을 보며 사먹을까 말까 생각하게 하는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거다. 나처럼 별로 웃지 않는 사람이라도 웃을 수 있게 하는 리마리오 같은 기이한 이 소설의 유머 뒤에,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 탄산음료 마실 때 톡하고 쏘는 것만 있던가.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그 이후의 꺼억 하고 올라오는 트림이 민망하기만 한데, 꼭 그짝이다. 단편 <버니>에서 여자를 사는 남자들의 종류를 이야기할 때 남자도 아닌 내가, 성매매를 해본 적도 없는 내가, 그 참을 수 없는 트림으로 눈물이 다 났다. 거기 그런 남자들이 나온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남자들은 별말 없이 여자와 우직하게 자고 일어나는데, 꼭 배운 놈들 가진 놈들이 별걸 다 캐묻는단다. 혹은 기자랍시고, 작가랍시고, 감독이랍시고, 그들의 아픔을 쪽쪽 빼먹어 자기의 양분으로 채우고 나면 조용히도 아니고 요란스럽게도 여자를 산단다. 얼마나 기똥찬 상품을 내놓으려고 그럴까 싶은 이맛살 속에 괜히 신맛이 올라오고 가슴이 아파 죽겠는 거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온 길에는 그런 기막힌 과오가 없는지 슬그머니 뒤돌아보고 싶은 거다. 네가 뭘 얘기해주고 싶다고 농촌활동 가서 어깨에 힘을 주나 말이다.

리뷰다운 글이 아니라서 마지막으로 덧칠을 해보려 한다. 이기호의 소설은, 푸하하 웃고 나서 돌아서려는데 돌연 가슴속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서늘함의 정체가 뭔지 아는가. 바로 내 속에 숨겨둔 위선을 소라속 파먹듯 쏙 빼내어 조롱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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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담배 꼬나문 표지 폼하고는..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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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라니까 근방에 있는 환자(?)들이 무슨 신앙 간증서인지 안다. 나 원 참..행복하신 분들...이런 착각을 하는 분들께 표지의 담배 꼬나문 친구가 답을 한다.'메롱' 이라고. (특정 종교에 누가 되는 말을 하면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되긴 힘들다.^^; 그래도 ^^)

젊은 작가 이기호는 소설 읽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메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작가는 기존의 소설이 가진 서사나 영혼의 울림을 위한 모종의 심각함,인위적으로 영롱한 표현을 위한 작가의 뼈빠지는 노력에 고개를 돌린다.마치 역사의 광풍 중 고갱이만을 겪으며 살아왔다는 듯 술자리에서 후배세대들에게 자기 과시와 자기위안을 동시에 부풀려대는 투쟁가 세대의 '침튀김'도 이 작가에겐 없다.물론 과거로 부터 유산을 많이 수혜받지 않았다고 늘 신선한 것은 아니다.단절은 새로운 건축이 바탕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법이다.작가는 각 단편마다 새로운 문체나 전달형식을 통해서 새로운 작가의 도래를 알린다.

우선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장점은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이 책은 1년가야 책 한두권 안 읽는 책 알레르기 환자들에게도 그냥 툭 건네주기에 부담없을 정도다.책 보는데 습관을 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읽는 행위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그러므로 장편보다는 단편,복잡하고 관념적인 서사보다는 사건이나 에피소드중심,우울한 정서보다는 밝고 딱 떨어지는 경쾌함을 선호한다.물론 이건 내 개인적으로 책 안보는 사람에게 책선물할 때 기준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시비를 걸면 할 말은 없다. 이 책의 문학성을 폄훼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최순덕 성령충만기>라는 단편은 위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흔히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사람을 '이야기꾼'이라고 한다.우리 소설가중에서 가장 대표적 이야기꾼이라 하면 성석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최순덕 성령충만기>로 작가 이기호 역시 이야기꾼의 그룹에 명함을 하나 파게 되었다.그러니 당연히 기존의 맹주들과 비교되는 것은 수순일 지도 모른다. 가장 많은 비교는 역시 성석제와의 비교일 것이다.내가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아니니 딱 잡아 어떤 부분이 같고 다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개인적인 느낌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성 싶다.

우선 둘 다 소재를 잡고 해학적으로 상황과 인물을 연출하는데는 탁월하다고 생각한다.이 두 작가 모두 소설의 소재를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 낮은 곳에서 엉뚱함을 발휘하는 사람들로 선정한다.그리고 이 들의 행위와 주변 관계를 통해 인간들이 가진 가식과 욕망의 추리함,세태의 허무맹랑함을 해학적으로 풀이한다. 차이가 있다면 성석제의 인물들이 조금더 현실성을 갖는 다는 것이다.이기호의 인물들 역시 현실에 바탕을 둔 듯하다.하지만 그의 글이 갖는 비현실적 상황 설정(<머리칼전언><백미러사나이>)과 허구임을,즉 소설임을-드러내는 문체(<버니><최순덕성령충만기><햄릿포에버>로 인해 주인공이 갖는 현실과의 붙박이성이 조금 떨어져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소설의 형식면에서는 많은 작품집을 낸 성석제와 이기호를 비교한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성 싶다.하지만 보편적 시각으로 봤을 때 성석제가 보수적인 형태를 띤다고 보인다.이기호의 경우 특히 이 첫작품집에서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첫 작품<버니>는 랩 체라고 해야 할 것 같다.랩의 라임을 구사하 듯이 보도방 삼촌이 된 주인공과 보도방 출신 가수 순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한 장이 넘어 갈 때마다 랩의 후렴구 처럼 동일한 대사가 반복된다. 랩의 라임을 만드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것이 단어의 운율이다.대개 동일 음운의 반복을 기본으로 친다.그렇다 보니 <버니>를 읽는 사람들은 랩을 하듯이 리듬감을 가지고 읽게 된다.<버니>의 경우는 음악만 붙인다면 장편의 노래 가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랩의 정서와 랩에서 사용되는 단어와 라임의 구성이 훌륭하다.<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과거 영한판 성경책처럼 이단 구분 형식과 각절명 넘버링을 하고 있다.이런 형식은 클라스 후이징의 <책벌레>라는 소설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듯 하다.거기에 문체 역시 성경에서 쓰는 의고체를 쓰고 있어서 복음서의 패러디 인상을 강하게 한다.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이 책은 총8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단편들은 성격상 크게 둘로 나뉜다.문체적 실험과 해학성을 높인 글과 마치 박상우의 소설과 같은 느낌을 주는 환상/그로테스크가 살아 있는 소설들이다.(<햄릭><머리칼전언><발밑으로...>) 둘 다 매력이 넘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이미지가 선명하여 후자쪽이 눌리는 듯 하다.허나 긍정적인 측면을 보자면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소설의 영역과 주제의 범위가 한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비춰진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단편은<버니><햄릿포에버><백미러사나이>등이다.요즘 시의성으로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과 연계성이 있는 <백미러사나이>가 인상적이다.박대통령 장례기간에 생긴 상처가 박대통령의 눈이된다.주인공은 박대통령의 힘으로 평탄한 인생을 누려간다.하지만 결국 자신의 눈을 침범하려는 과거의 눈과 대결하게 된다.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도 밝힌 그의 편벽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작가는 주인공의 얼치기 운동권 참여를 통해 당시 운동권 내부의 얕음에 대해 비웃음고 있다.하지만 중심적인 풍자는 결국 아직도 자신의 눈이 아니라 박대통령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뒤통수에 달린눈에 의지해 역사를 과거로 돌리려는 사람들에게 작가로써 통렬한 풍자의 칼날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박대통령에게 자신의 눈을 맡겨버린 뒤로 뛰는 주인공 이시봉을 공원이나 약수터에서 뒤로 뛰는 노인들에 빗댓건은 중의적으로 의미심장하다.

결론적으로 사족하나 덧붙이자.오랜만에 즐거운 소설,한 번에 쭈욱 읽어버릴 수 있는 소설을 만났다.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신인으로서의 신선함 감각과 풍자정신에 조금 더 깊은 내공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뛰어난 감각만으로도 물론 성공적인 작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멋진 해학과 풍자정신이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부조리함을 흩고 올라온다면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군에 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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