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내가없는 이 안 > 경고! 지금 웃는 게 다가 아닙니다
-
-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글쎄, 뭐랄까...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은 한마디로 이렇다. 대학 다닐 때 3년 동안 농촌활동을 다녀오면서 매번 느끼던 나의 누추함이 더욱 남루해진 옷을 껴입고 패션쇼라도 하듯 멋들어지게 걸어오는 걸 봐야 하는 난처함이다. 띠용,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면서, 네가 도대체 뭐라고 그렇게 고개 쳐들고 있나, 하는 자책하는 심정이 든다는 거다. 그런데 그 움츠러들고만 싶은 느낌이 들어 난처해하고 있는 내 앞엔 진짜로 웃기는 리마리오 같은 인물이 더듬이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어쩌랴, 웃었다 정신 차렸다, 다시 참을 수 없는 웃음을 뿜어야 하는, 이 해괴한 느낌을 마구 간질이듯 주입하는 소설이다, 이거다.
땅을 파봐라, 그곳에 네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씨감자가 싹을 틔우고 있을 테니... 뭐 온통 시멘트 천진데 어떻게 하냐고? 아 그럼 철물점서 망치라도 사서 깨보라 이 말이다, 그 밑에 뭐가 있겠냐고? 이런 답답한 친구 같으니...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
아니 이 뜬금없는 뒤통수 때리는 소리는 뭔가? 갑자기 작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옴짝달싹못하고 선 내가 망치를 들고 있는 모양이 아닌가. 작가는 정말 땅이라도 파서 이런 씨감자 같은 글들을 틔워내는 모양이다. 현실을 등돌리지도 않으면서 머릿속에 온통 본드를 불어넣어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몽롱해 있는 듯한 그의 이 소설들은 그 정체가 대단히 궁금하다. 그의 소설에는 3류 매춘의 선두주자인 보도방을 운영하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나오고, 이리저리 모아놓은 아이들이 코묻혀서 벌어오는 돈을 갈취해 상납하는 앵벌이들이 나오고, 이제 좀 제집처럼 드나들던 감옥살이에서 벗어나보려다가 우연히 의도하지도 않은 본드를 다시 불게 된 잡범 출신이 나오고, 이 죄많은 세상 주님만 섬기면 된다는 신앙으로 똘똘 뭉친 최순덕이가 나오고, 기가 막히게도 검은 소에게서 정자를 받아 아이를 낳은 감자 같은 여자가 나온다.
도대체 작가의 이력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책의 앞날개를 본다.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이 작가는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인생들을 어디서 다 긁어왔을까 싶다. 문체를 말하자면, 이 역시 소설이라는 테두리를 뛰어넘고 메롱, 혀를 쑥 내밀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액자소설의 형식은 너무 클래식한 편이라 말할 계제도 아니고, 랩 형식으로 후렴구까지 넣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노래를 하는 것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형식은 물론, 경찰서에 끌려서 취조실에서 작성하는 듯한 형식, 경건한 성경과 같은 편집과 문어체 옷을 입혀 신앙의 맹목성을 꼬집는 형식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발칙하고도 다양한 형식들은, 마치 처음 보는 열대지방 과일을 보며 사먹을까 말까 생각하게 하는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거다. 나처럼 별로 웃지 않는 사람이라도 웃을 수 있게 하는 리마리오 같은 기이한 이 소설의 유머 뒤에,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 탄산음료 마실 때 톡하고 쏘는 것만 있던가.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그 이후의 꺼억 하고 올라오는 트림이 민망하기만 한데, 꼭 그짝이다. 단편 <버니>에서 여자를 사는 남자들의 종류를 이야기할 때 남자도 아닌 내가, 성매매를 해본 적도 없는 내가, 그 참을 수 없는 트림으로 눈물이 다 났다. 거기 그런 남자들이 나온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남자들은 별말 없이 여자와 우직하게 자고 일어나는데, 꼭 배운 놈들 가진 놈들이 별걸 다 캐묻는단다. 혹은 기자랍시고, 작가랍시고, 감독이랍시고, 그들의 아픔을 쪽쪽 빼먹어 자기의 양분으로 채우고 나면 조용히도 아니고 요란스럽게도 여자를 산단다. 얼마나 기똥찬 상품을 내놓으려고 그럴까 싶은 이맛살 속에 괜히 신맛이 올라오고 가슴이 아파 죽겠는 거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온 길에는 그런 기막힌 과오가 없는지 슬그머니 뒤돌아보고 싶은 거다. 네가 뭘 얘기해주고 싶다고 농촌활동 가서 어깨에 힘을 주나 말이다.
리뷰다운 글이 아니라서 마지막으로 덧칠을 해보려 한다. 이기호의 소설은, 푸하하 웃고 나서 돌아서려는데 돌연 가슴속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서늘함의 정체가 뭔지 아는가. 바로 내 속에 숨겨둔 위선을 소라속 파먹듯 쏙 빼내어 조롱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