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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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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그가 성공회 대학에서 고전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한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누군가가 바로 내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대화체로, 존대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라 읽기가 편했다. 그런데 내가 ‘강의’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하루에 하나의 이야기를 음미하듯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 번 읽을수록, 갈고 닦을 수록 진가를 발휘 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고전강독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고전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미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기에 과거의 일을 교훈삼아 우리 당면과제를 재조명해야 한다. 유명한 역사학자 카 역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정의하지 않았던가? 

 동양의 기본 사상은 자연에 대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이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산과 들, 강, 바다 같은 풍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연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이며 최고 최대 개념을 구성한다. 또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한다. 생성과 소멸은 통일되어 있는 질서이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의 순환과정 속에 놓여있고,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합창할 때를 생각해보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누군가가 불협화음을 만들거나, 지나치게 큰 소리로 노래한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또한 동양사상은 현실주의와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다. 동양적 가치는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즉, 사회성에서 구해지고 인성의 고양 역시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면서 자기를 키우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남을 밟고 일어서는 서양의 사상과는 정말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이 앞서나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반성해봐야 할 문제이다.

 

 주역의 괘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점은 산지박괘였다. 박괘는 64괘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 박괘가 절망의 괘이면서도 그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이야기하는 괘라는 것이다. 산지박괘 다음이 지뢰복괘인데 땅밑에 우레(씨)가 묻혀 있는 형상으로써 잠재력(복)이 땅 밑에 묻혀있는 형상인 것이다. 즉 복이 다시 돌아옴을 나타낸다.

 지금 한창 어려운 상황인 나는 이 내용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항상 나쁜 일이 계속 있었으니까 다음부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라고 막연히 스스로를 위로 하곤 했는데 나쁜 일 다음에 또 나쁜 일이라서 ‘나한테 마가 끼었나’ 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할 때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실패한다는 것은 다음번에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니 겉으로 보기에는 잎사귀와 줄기가 다 병이 든 식물처럼 암담한 상태지만 그 뿌리에는 미래를 대비한 좋은 영양분이 숨어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복이라는 열매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너무 암울한 상황들을 희망으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나는 극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그래서 지금의 고통이 밑거름이 되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결과를 믿고 싶다. 그리고 모두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자의 논어도 관심이 많았다. 공자가 죽어아 나라가 산다는 충격적 제목의 책도 있지 않았던가? 과거 우리 조선 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인 유교이기에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과연 공자가 죽어야지 나라가 살 수 있는 걸까? 관료층이 지배에 필요한 덕목들만 뽑아서 백성들을 교화시켰기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임금을 최우선으로 군신관계를 중요시 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믿음을 최우선으로 했던 공자의 사상을 소개해볼까 한다.

 자공이 공자에게 ‘경제, 군사, 백성들의 신뢰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라고 묻자 군사, 경제, 백성들의 신뢰를 꼽았다.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지금 국민들을 위한답시고 탁상공론이나 벌이고 있고, 선거때마다 공약을 내세우지만 지키지 않는 정치인들은 깊이 반성해야할 것이다.

 

 다음은 맹자의 의에 대한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흔종에 쓰이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보고 왕이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데, 흔종 의식을 폐할 수는 없고 그 소를 양으로 바꾸라 했다 한다. 맹자는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가는 것은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왕이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대신 양으로 바꾸라 했다며 그것이 인의 실천이라고 했다. 나는 이 구절을 왕 자신과 만남이라는 관계가 있기에 소에게 특혜를 준 것이며 일종의 낙하산,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것이라고 어리석게 해석했는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왕이 소를 구한 것은 보았기 때문이고 보았다는 것은 만났다는 것이고 이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얼마 전 일어난 쓰레기 만두 파동을 보자. 그 만두를 만든 사람이 만두를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봤다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더 이상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만남이 없기 때문에 쓰레기 만두가 누구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불량식품을 만들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만남이 없고 관계가 없기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자꾸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을 다시 한번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노자의 도와 자연에 대해 알아보자.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나는 이 구절을 보니 이상하게도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시의 내용은 관념적이던 존재가 누군가에게 꽃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음 으로써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철학적 내용의 시였다. 그런데 노자는 오히려 이를 거꾸로 말하고 있다. 이름 지어진 것은 참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 못한다. 사람들끼리의 약속일 뿐이다. 이름, 즉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고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곳에 진정한 도가 있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일 뿐이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이지만 그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는 무가 있다는 진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이며 통일체라는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무엇을 분류하지 않는 사유들, 그야말로 노자의 사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어떤 이름이 지어지면 그 틀에 맞춰서 사물을 대하게 된다. 이름이 사물의 속성을 전부 드러내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이름이 진실로 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냥 부르기 위해서, 편의상 지어진 것이다. 오히려 이름은 나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어리고 귀여운 이름인 내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깜찍한 모습을 상상하지만 나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은 이름과 느낌이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오히려 내게 붙여진 표지가 나를 이해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진리를 나보다 수천년 전의 사람인 노자가 터득하고 있었다니 성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페이지를 조금 할애해서 ‘우리나라의 사상에 대해서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지은이 스스로가 식민사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양고전을 택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고전도 그에 포함되어야 되지 않을까? 물론 중국 사상이 고대 동양사상의 원류이므로 우선이 되야 하고, 한국 사상까지 다루다 보면 흐름을 잃고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기 쉽지만, 역시나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어느샌가 서양의 사고방식에 빠져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일까? 동양사상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화란 이런 것이구나, 과연 과거의 일에서도 지금 현재의 일에 도움이 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동양보단 서양이 낫지, 라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던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동양사상도 서양의 합리적 사고방식에 전혀 뒤지지 않았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기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동양의 사상을 접하고 싶은 이라면 입문서로서 이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나역시 이 책을 계기로 관련 분야를 더욱 탐색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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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관계론으로 고전일기 그리고 딴지걸기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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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지루하다는데 나는 동양고전에 관심이 많았다.몇자 안되는 글의 함축성이 좋았다.그 깊이를 다 알수는 없으나 넘겨짚은 이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거기에 어디가서 몇자 읊어주면 그럴싸 하게 보였다.대학들어가면서 당연히 그쪽 관련 수업을 찾아들었다.그래봤자 결국 교양수업 몇개 일 뿐이니 고전에 대한 나의 이해가  남들 보다 뛰어나다 말할 수는 없다. 대학가서 웃겼던 건 비슷한 고전강독을 서너차례들었다는 것이다.지금 그 강의 명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대개 <동양 사상의 이해> <동양문화사><중국 정치의 이해> 뭐 이런 것들이었다.그런데 이 강의가 전부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수업들이었다.<동양사상의 이해>야 그렇다 치자.이름이 그럴싸 해서 들었던 <동양문화사>강의. 첫 시간 교수님은 "동양문화의 핵심은 중국이다.그리고 중국 사상의 근원이 형성된 곳은 춘추전국 시대 즉 제자백가의 시대이다."이런 말로 한 학기 강의의 개괄을 하셨다.그리고 한한기 동안 신영복 교수 <강의>의 목차와 유사한 수업이 진행되었다.더 웃긴건 <중국 정치의 이해>였다.나는 처음에 문화대혁명,모택동,주은래,등소평 ...뭐 이런 거 나오는지 알고 수업신청했다.그런데 왠 걸.또 첫 수업시간에 강사는 "이 강의는 사마천의 <사기>가 텍스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한 학기 동안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만 한참 했다.당연히 논어,맹자,한비자 이야기가 빠질리 없다.중간 고사는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한자 많이 쓰여있는 <사기 열전> 독후감이었다.결국 비슷 비슷한 강의를 세차례나 들었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것과 땡땡이가 많았다는 것.제대로 배웠다면 훨씬 좋은 리뷰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을.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개인적 경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품 등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분이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벅찬 감동과 충격은 아직도 남아있다.뿌연 안개같은 실타래를 시퍼런 칼로 두동강 내는 느낌이었다.나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또한 다시금 풀무질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해주었던 글이다. 이 책 <강의>에서도 신영복 교수의 선명함은 드러난다.실천을 가장 우선시 하는 그의 현실적 세계관과 변혁을 위한 끝없는 자기성찰이 돋보인다.그는 단순한 어구풀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는 동양 고전을 우리의 현실과 새로 만들어야 할 세계에 이입 시킨다.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고전,바로 이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하나 하나 따로 짚어 말할 바는 아닌 듯 하다. 동양 고전을 읽는 신영복 교수의 독법에 대한 부분이 더욱 중요하다.이 책은 단순한 강독이 아니기 때문이다.책 서문에서 신영복 교수는 분명히 자신의 독법을 밝히고 있다.그것은 '관계론'이다. 신 교수는 유가,도가,법가등 이곳에 등장하는 사상의 한 구절 구절을 인용하며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관계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존재론'이다.신영복 교수는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존재론'에 있다고 밝힌다.즉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 존재의 실체성을 부여하고 그 개별 존재들이 사회안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합리와 이성에 기댄다는 것이다.반면 동양 사상의 근원은 '관계론'으로 규정한다.동양사상의 근원이 되는 고전들은 공통되게 인간성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또한 나와 타인,나와 자연,나와 사회라는 관계망을 대전제로 하는 철학인것이다.주역의 효를 예로 들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주역 이외에도 저자는 논어,맹자,노자 그리고 불교의 연기론까지 거론하며 모든 것이 '망'이라는 관계를 다루고 있고 그 중요성에 대한 담론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계론'에 대해 저자가 중요시하는 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가장 큰 문제 제기는 상품자본주의 사회에 있다고 하겠다.대개 소비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비해 저자는 상품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이 상품 자본주의는 서구식 근대화를 의미한다.저자는 '관계론'이라는 동양의 가치관을 이용하여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의 폐해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의 리뷰어들과 서평들이 신영복 교수의 글에 대해 딴지를 걸지 않고 있다.글의 내용과 그의 알려진 인품을 고려하면 쉽사리 딴지걸기가 쉽지 않다.나 역시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굳이 비판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사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보는게 나을성 싶다.

 

우선 언제가도 한번 말했지만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관계론'강화라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우리사회는 관계의 그물망이  지나치게 촘촘하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신교수가 말하는 관계성의 인식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그가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거시적이고 형이상학적 관계성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그것이 속도와 소비로 집약되는 현대의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기때문이다.관계성의 회복을 통한 소외의 극복이라 볼 수 있다하지만 문제는 그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형태로 변형되는 가를 살피는 것이 또한 땅에서 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우리 사회는 의식적인 면에서 전근대적 양상을 많이 따르고 있다.굳이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단 전근대적 보수성이 관계망의 형태를 띠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양상을 띤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신영복 교수는 현재 우리사회의 개인들이 분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맞는 말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가장 분자화 되어있다고 보는 젊은 층을 예로 들어보자.그들이 제멋대로 인 것 같지만 대개는 보수적 가부장제 하에 종속화 되어 있다.과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의식의 전근대성은 여전하다.가족중심주의와 혈연중심주의가 그들 분자화되어 있는 개인에게도 내재화 되어있다.또한 사회를 나가보자.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지방대 출신으로 아무리 능력좋아도 대기업 사장되기 힘들다.여러가지 기회의 차별도 있겠으나 우선 학연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그 학연이라는 것은 무었인가.관계망이다.부정적인 관계망이며 망국의 네트워크이다.그런데 그 내부에서는 상호이익이라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앞서서도 말했지만 신영복 교수의 관계망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늘 낙관적인 미래를 말하고 희망을 전파하기에 이러한 변질은 나의 우려이자 노파심일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서 개인은 약하고 집단은 힘이 세다.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의 개인은 혼자 있으면 다 바보가 된다.그러다가도 몇몇이 모이면 목소리가 커진다.우리 몇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다는 식이 된다.통속적인 예는 길거리에서도 볼수 있다.조금 확대하면 이는 집단주의 정서와 곧바로 연결된다.신교수의 네트워크가 늘 낙관적인 방향으로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그것은 폐쇄적 집단주의 성향을 띤 관계망으로 발전되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묵자의 예를 들어보자.이 책에서 묵가는 겸애와 반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적 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거기에 계급적으로도 하층계급이 주를 이루었기에 괜히 민중적으로 보인다.그래서 그런지 어떤 분들은 묵가의 사상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묵가의 진보적 속성이 현재 벌어지는 우리사회의 이슈들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몇몇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이다.

(묵가는) 실천의지를 추동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와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방어전을 펴기 위해 축성을 하고 방성기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이에 부적을 써서 그걸 가지고 적을 이길 수도 있다고 믿었다.귀신의 존재를 실재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묵가를 일종의 사교집단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이것은 당대에도 비주류였고 유가전통에서도 어긋나기 때문에 후대가 탈색시킨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그리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부적이니 귀신이니 하는게 가능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동학 또한 그러한 신비주의가 있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개인의 의지는 철저히 배재된 집단자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살길이 있었으나 거자의 신념을 위해 묵가의 민중들은 생사여탈권 마저 넘긴 상태가 된 것이다.옛날에는 의를 지키기 위해 다 그랬다고 말할 수 있을까.지금보다 신념과 가치가 존중받았던 시대였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다.즉 이러한 비판도 현시대적 관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한 개인의 생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묵가의 사상은 분명이 현대에 돌아봐야할 여러 가치들을 제공해준다.하지만 묵가의 이러한 사교적 모습,또는 작은 병영사회적인 모습에 대해 저자는 그다지 알려주지 않는다.묵가라는 집단 관계망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희생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또한 이 책은  강의의 편의상 그랬겠지만 너무 도식적 구조를 많이 따르고 있다.즉 이분법을 피한다고 하면서도< 서구=존재론=상품자본주의=부정의 대상/ 동양=관계론=화동의 사회=복원의 대상> 과 같은 대립구도를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다.신영복 교수는 이를 당파성으로 설명한다.하지만 강의의 편의상이거나 또는 당파성의 필요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이런 이분법적 대립각은 너무 용이한 길을 찾으려는 편의주의적  설명이라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이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정당한 비판이라 보기 어려울 수 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읽으면서 생겼던 몇 몇의 의문과 주관적인 감상을 옮겼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에 더 급박하게 필요한게 무었인가를 두고 내 견해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더 많은 '개인'이 필요하다고 본다.우리사회가 압축근대의 암호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사회 각 영역을 지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불합리성이 너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또한 대다수 개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시 부정적 관계론의 그림자이지 싹수없는 개인의 존재감이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고전이 현대에 요구하는 것이 개인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주의의 근원도 이러한 자기성찰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는 관계론이라는 틀(당파성)을 가지고 읽어낸 한 가지의 길일뿐이다.고전의 바다는 넓고도 넓다.퍼담아도 퍼담아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도 한다.나 역시 한바가지 쯤 퍼 담고 싶은 바람은 있다.하지만 아직은 형편없이 부족하다.스스로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날은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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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감옥으로부터의 고전 <강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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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후 20년 만에 출소하게 된다. ~~사색은 독재 시절의 장기수들의 생활을 알려준, 치가 떨리는 육성 증언이었다.


  이 ‘강의’는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길고도 깊은, 그러나 단속적인 독서를 통한 저자의 사색을, 대학 강의와 어울려 적은 글이다. 그 내용에 들어가는 고전들은 시경,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법가 등인데, 각 고전에 따른 독법을 나름대로 이끌고 있는 매력이 있다.


1. 왜 온고지신인가?

  온고지신.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내려는 자세는 동양의 학문적 전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21세기 담론에서처럼, 미래를 무조건 희망적이고 새로운 긍정적인 무엇인가가 다가올 것처럼 여기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고전을 읽는데 있어서도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는 단순한 온고지신을 뛰어 넘어 <온고창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옛것을 배워 새로운 것의 창조로 나아가야 한다는 발전적 논의라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서양의 패권적, 자본 중심의 ‘존재론’이 몰아온 폐해를 지적하고, 우리 고전에서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모아 ‘관계론’을 중심으로 <오래된 과거 속에서 짚어볼 수 있는 창의적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2. 소라 껍데기로 보는 고전의 나선

  올 여름 방학을 고전을 읽는 방학으로 보냈다. 여러 가지를 체계적으로 섭렵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다. 노자, 주역, 중용 등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은 것은 나름대로 손익이 있었다. 이익은 내 나름대로 읽는 관점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고, 손해는 체계적으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리 이 책을 읽었다 한들 뾰족한 체계를 갖추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지만.

  몇 권의 고전을 읽고 다시 본 ‘강의’는 참신했다. 대학 강의 내용이어서 한계가 있었지만, 고전의 다이제스트로서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고전을 시작하는 입문서로 활용한다면, 개론서로서는 충분히 가치로운 책이란 생각이 든다. 대학 1학년 때쯤, 내가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지금쯤 좀더 동양철학에 가까워졌을 수 있었을 것인지... 아니면 역시나 마르크시즘에 경도된 책들밖에 읽지 못했을 것인지...

  고전을 공부하는데 순서가 있을 수 없다. 진리의 바다를 찾는데 지름길이 없듯이... 쉬운 책도 있을 수 없고,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있을 수도 없다. 예전엔 한자의 난이도에 따라서 커리큘럼을 짰다지만, 요즘처럼 번역이 많이 이뤄진 시대엔 나름대로 취향에 맞게 취사선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고전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고전을 몇 글자 안다고 해서 아는 체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고전의 독법은 마치 소라 껍데기를 타고 오르는 나선과 같이 조금씩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느낌으로 읽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 구절에 얽매이지 말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현대적 관점에서 나와 연관짓고 우리 사회와 연관짓고 나아가 글로벌 시대의 세계와 관련지어 성찰적 관점을 세우는 것이 신영복 선생님께서 제시하는 동양 고전의 독법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강을 건너는 비유를 오늘 아침에 읽었는데, 이 글의 마무리에서도 다시 그 이야기를 만난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라... 뗏목에 얽매이지 말고... 중요한 것은 강을 건너는 것이지, 뗏목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뗏목 자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3. 백가 쟁명, 수많은 담론의 시대 - 그 존재론과 관계론 사이에서...

  운동 경기를 마치고 나면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닌 동료들의 우정이고, 학업이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은 수업 내용이 아닌 교사와 학생의 <관계>이고, 어부에게 있어서 남는 것은 고기가 아닌 <그물>이라고 했다. 이 책은 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그물에 관한 철학을 하려고 했다.

  물론 말말말...의 시대였던 만큼 각 고전에서 대표적인 구절들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할 수 있겠으나, 이 강의가 가지는 진정한 가치는 그 고전과 다른 논리의 차이점, 그리고 고전이 현대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관계론>이란 주제로 밝혀보려 한 데 있다고 하겠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변화의 관계망, 주역.

  사회 변동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총합한 논어의 관계론적 해석.

  공자의 개인적 ‘인’을 사회적 관계로 규정한 맹자의 ‘의’의 인간관계 원리.

  비유의 바다로 민초의 전략전술이자 정치학인 동양 사상의 정수, 노자.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책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임을 이야기 형식에 담은 우화, 장자.

  노동 계급을 대표하던 검소한 실천집단 묵가의 반전 평화론.

  유가의 ‘자기 수양’의 틀을 벗어나 ‘사회 참여’로 나아가는 법치 교육학, 순자.

  변화된 현실에서 인의의 정치 주장하는 것을 수주대토로 여기는 법가, 한비자.


  그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는 동양 철학서들은 나를 주눅들게 하기도 하지만, 이제 신역복 선생님의 이 강의를 좇아 가장 낮지만 지향해야할 지점인 고전의 <바다>로 닻을 올린 것을 즐겁게 생각한다. 쑥풀 우거져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운 숲속에서 나와 나란히 걸어가는 친구를 만난 느낌이랄까...


4. 대로를 향하는 하나의 ‘골목’이기를 자처하는 <강의>

  책의 말미에 불교와 신유학에 대한 아쉬움을 실어 두었지만, 사실 그 강의만으로도 다른 책 한 권이 될 법한 내용이기에, 나는 ‘강의 2’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 겨울부터 관심을 갖고 보던 불교 서적들과 복잡하기만 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신유학에 대해 다시 강의를 듣고 싶은 희망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막연하기만 하던 고전의 우주에 이제 몇 개의 점이나마 찍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읽는 동안에는 점 사이의 희미한 선이 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한 <정신 건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고전을 통해 읽을 수 있는 동양적 삶의 궁극적 가치가 <인성의 고양>이라면, 군중 속에서 고독한 현대인이 놓치기 쉬운 정신 건강을 ‘인간 관계와 사회, 역사’의 관계론 속에서 궁극적으로 찾아가는 바다로의 여행길에 고전과 함께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희망을 갖는다.

  고전을 읽는 것이 이렇게 가치로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두고 탁본을 찾으러 집으로 향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다시 문제는 <현실>, <지금>, <여기>이며, 나와 우리 사회로 귀결되는 것이다. 여기에 온고 지신이 온고 창신으로 다시 나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 훌륭한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대로를 향하는 하나의 <골목>’이기를 자처하시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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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클리오 > 과거에서 찾아낸 현재와 미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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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누구나 들어봤으나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책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 책은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나 들어봤음직한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법가 등의 책을 목차에 넣고 있다. 동양철학을 총망라하는 이 대단함 앞에, 한동안 책을 펴기를 망설였다. 책을 펴기를 어렵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에 와서 왜 꼭 중국 고대 철학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고대의 고전을 생각하면 동시에 어쩐지 한가한 날을 보내는 사람들의 好古 취향 같은 괜한 선입관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치열함에서 한발짝 물러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허나 이러한 동양고전을 함께 읽어줄 저자는, 감히 나따위가 '치열함'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분이기에, 역시나 쇄를 거듭하며 찍히는 책에 대한 믿음을 더하여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저자는 고전을 읽는 이유를 역사를 아는 이유와 같은 곳에서 찾는다. '우리 자신, 혹은 한 시대가 갇혀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전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우리의 시대가 최고의 진보라 생각하고, 길어야 몇 백년 안된 습관이나 생각을 마치 원래 타고난 본성이어서 절대 바꿀 수 없을 것처럼 여기며 살기 쉽다. 자신만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 습성을 버리는데, 다른 시대의 앞서갔던 사람들의 치열한 사고의 흔적인 고전의 효용이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저자는  우리가 그동안 지겹게 생각해왔던 것처럼 한구절구절의 해석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의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데 고전 읽기의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에서 나아가는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로 가서 현재를 거리를 두고 살펴보고 거기서 미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며 교과서에서 피상적으로 외웠던 혼란기 사상가들의 주장이 살아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고의 사상은 정서와 감정의 차원에 있으며', '진정한 앎이란 경험속에서 만나고 실천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언급되었듯이, 이들 주장이 저자의 입을 통해 내 경험과 만나는 쉽지 않은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교과서와 달리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각 사상가의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시경>을 읽으면서는 고대와 현대를 하나로 잇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을, <서경>에서는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자극, 불편함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주역>에서는 많이 어려웠지만 그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입장과 여러 관계들을 생각했고, 무엇보다 저자 역시 인간관계론의 정수라고 말했던 <논어>의 해석을 읽으면서 요즘 나의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는 원인은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있다는 반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해 보았다. 대항,비판담론으로서의 노장사상과 난무하는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을 비판하는 법가에 대한 이야기도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또한 평화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상징으로 알고 있던 묵자가 그 겸애를 위해 개인적인 애정은 철저히 배격했으며, 일사분란한 (군대식?)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무척이나 충격이었다.

사실 이 많은 사상가들의 주장을 축약하여, 그것도 다른 이의 해석을 통해 살펴보고 다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사상에 대해 다 알기는커녕, 실제로 말하자면 책 속의 내용조차 어려운 부분은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덮고나니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동양고전의 이해'에 깊은 비중을 두고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현 시대를 전망하는 저자의 인식, 그리고 어떤 방향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에 대한 느낌과 공감과 더 주가 되어야 될 듯 싶다. 이 책을 읽는 뿌듯함이나 즐거움은 '단 한 권의 책을 통한 동양고전 마스터'에 있는 것가 아니라, 오히려 평생을 삶에 있어 자신을 유지하고 부끄럽게 살지 않으려 애쓴 한 사람의 달관한 듯 그러나 미래에 대해 엄청나게 열정적인 삶의 이야기를 그것도 구수하고 재미있는 어투로 듣는데 있다. 또한 그것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생각해보며,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생각해보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동양고전에 대해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전개해나가는데 있어 그는 철저히 고전 속의 주장을 해석해나가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 책들을 언급하면서 반복되게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난세에 대한 묘사)과 현재를 비교해보라'는 그의 주문은, 책의 마지막에 와서는 마치 성경구절을 언급하며 지금이 말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언뜻언뜻 연상시키기도 했다. 또한 과거에서 미래 찾는다는 책의 출발점답게도 고전에서 얻을 바를 찾는 것을 넘어 순간 우스운 말로 '복고주의 예언자'스러운 면모가 아닌가 싶기까지 했으나, 개인적이고 순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오히려 그는 책의 많은 부분을 현실에 기초한 탄탄한 실천을 위한 반성과 전망에 할애했으니 말이다.

여러가지 가슴에 와닿는 새로운 가르침을 이 책에서 얻었지만 특히 기억나는 두 가지를 말하면서 마칠까 한다. 하나는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이라는 지적이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에 내부에 변화의 원동력이 없다는 문장을 읽으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존 관념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또 하나는 내가 계속해서 마음 속에 간직하고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생각, '교묘히 꾸며도 본색이 드러나므로, 결국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말씀. 나의 거품과 과장을 남들이 모르기만을 바라는 것을 그만두고, 이제는 좀더 조용히 탄탄하게 내실을 기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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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꽃도둑 > 가슴으로 읽히는 책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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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 교수는 올해 63세다 겨울방학 때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저 겨울나무처럼 가만히 있고 싶다고 했다. 순간 그가 4년 가까이 독방에서 지내면서 벽을 마주하고 앉아 명상을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입을 굳게 닫고 내면 가장 깊숙한 중심부로 들어앉아 자기함몰이 아닌 자아도취나 자가당착도 아닌 자기발견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온유하면서도 강한 정신적 세계를 구축한 한 인간의 모습에서 신이 마저 느껴짐은 왜일까? 삶의 변두리, 인간이 흘러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인 감옥에서 20년이라는 수감 생활을 통해서  깎고 깎여진 둥근 시간 속에 자신의 몸을 맞출 줄 아는 겸손과 절제를 채득한 탓일까? 시련을 견디며 악에(원망이나 자포자기 등) 편승하지 않은 그 온유한 성품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73년 3월에 신영복 교수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용》을 여러 번 읽었으니 《맹자》《춘추》, 허균의 《호민론》《실학》등의 책을 읽고 싶으니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동양철학 독서는 1968년 수감되던 얼마 뒤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동양철학에서 찾아낸 것이 '관계론'인데  그것은 철학적 개념보다는 신영복 자신이 몸소 겪으며 사유한 경험의 총체이다 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자신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 가족과 선후배 그리고 제자들에게서 처음 '관계'라는 키워드를 찾아내었는지 모른다. 보고 만나고 아는 사이였으니 측은지심이 생긴 것이리라.
그는 늘 동양철학을 늘 곁에 두었다고 한다. 읽으면서 점점 경도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자유의 몸이 되어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10년 강의하고 속도, 효율, 물질이 인간성을 앞질러 가는 요즘에 과거가 아닌 미래모색이라는 궁극적 답을 발견할 수 있는 텍스트로 '고전읽기'를 하자며 《강의》텍스트를 전 국민 상대로 내놓았다. '관계론'이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무엇이 관계인가, 무엇이 참된 앎인가,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보다 사회구조 속의 관계론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영복 교수는 논어를 통해 노자를 통해 맹자를 통해 조곤조곤 들려준다. 신영복 교수는 더 나아가 고전 다시 읽기로 '근대에 대한 반성' (서양은 중세 바로 보기 운동이 일어 났다고 한다) 과거를 그저 과거로만 묻어 버려야 하는 '시간에 대한 반성'으로 읽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책은 내게 몇 가지를 일깨워 주었다. 첫째 동양철학의 전체적 흐름에 대한 이해이다  둘째 고전을 두고 자구해석이나 해설이 아닌 전체 속에서 키워드를 끄집어내어 '고전 다시 읽기'로서의 재해석을 한 점이다. 이것은 곧 학자들마다의 관점의 차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통찰력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셋째 동서양이 갖는(또는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점이다
나는 되도록 책을 읽으면서 비판과 옹호의 두 축을 세워놓고 거기에 합당한 이유와 개념들을 가두려 한다. 신영복의 《강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등에서 화두로 삼은 '관계론'의 관점이 모두에게, 어느 곳에나 적용될 수 있는 건지 의아심이 들었다. 현 사회는 신영복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물질이, 효율이, 속도가 인간성을 앞질러 가는 시대이다. 서구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운동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쟁도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저질러지고 그것이 패권주의로 나타나 말이 세계화이지 결국 물질 종주국으로의 속셈이 있는 것이다. 힘의 논리로 이루어진 세계화는 이미 서양적 사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영복 교수의 '관계론'이 현 사회에서 얼만큼 설득력을 지닐 것인가. 조화와 균형, 절제와 겸손, 도덕성과 인,의,예,지를 중시하는 동양사상이 다만 책 속에서만 함몰되어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 어떤 패러다임도 형성되지 않는 사상과 이론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이든, 생산현장이든, 세계시장이든 뛰어난 독창성과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 같은 한 개인이 세계의 시장을 석권하기도 하고 미국이라는 한 나라에 의해 세계가 좌지우지되는 형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 현실은 일단 인정하자. 그렇다면 과도한 생산과 소비, 전쟁 등의 메커니즘으로 세계가 돌아간다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문제인 것이다. 인간성의 황폐화, 지구의 황폐화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리라. 특히 요즘 아이들을 볼라치면 참을성도, 생각의 힘도 없는 거의 반 기계화된 머리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물질에 반응하는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사유의 힘이 무엇인지도 모르거니와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나 아닌 누군가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중 하나인 기계의 힘은 막강하다. 뇌 세포를 경직되게 만들고는 나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한다거나 사유를 통한 자기성찰 따위의 접근을 아예 막고 있는 것이다.

물질이 정신에 앞서는, 독창성이 보편성에 앞서는 시대에 신영복 교수가 화두로 삼은 '관계론'은 삶에 대한 반성이자 시대적 당면 과제로 절실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지나친 염려도 희망도 아닌, 그의 《강의》를 읽다보면 내가 어느새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강의》는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나름대로 터득한 독법이랄까?... 《강의》는 가슴으로 이해하며 읽으면 잘 읽히는 책이다. 척박해지면 다시 이 책을 꺼내어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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