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체리마루 > 동양사상에 빠져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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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평점 :
이 책은 그가 성공회 대학에서 고전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한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누군가가 바로 내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대화체로, 존대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라 읽기가 편했다. 그런데 내가 ‘강의’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하루에 하나의 이야기를 음미하듯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 번 읽을수록, 갈고 닦을 수록 진가를 발휘 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고전강독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고전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미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기에 과거의 일을 교훈삼아 우리 당면과제를 재조명해야 한다. 유명한 역사학자 카 역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정의하지 않았던가?
동양의 기본 사상은 자연에 대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이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산과 들, 강, 바다 같은 풍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연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이며 최고 최대 개념을 구성한다. 또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한다. 생성과 소멸은 통일되어 있는 질서이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의 순환과정 속에 놓여있고,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합창할 때를 생각해보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누군가가 불협화음을 만들거나, 지나치게 큰 소리로 노래한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또한 동양사상은 현실주의와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다. 동양적 가치는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즉, 사회성에서 구해지고 인성의 고양 역시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면서 자기를 키우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남을 밟고 일어서는 서양의 사상과는 정말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이 앞서나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반성해봐야 할 문제이다.
주역의 괘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점은 산지박괘였다. 박괘는 64괘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 박괘가 절망의 괘이면서도 그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이야기하는 괘라는 것이다. 산지박괘 다음이 지뢰복괘인데 땅밑에 우레(씨)가 묻혀 있는 형상으로써 잠재력(복)이 땅 밑에 묻혀있는 형상인 것이다. 즉 복이 다시 돌아옴을 나타낸다.
지금 한창 어려운 상황인 나는 이 내용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항상 나쁜 일이 계속 있었으니까 다음부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라고 막연히 스스로를 위로 하곤 했는데 나쁜 일 다음에 또 나쁜 일이라서 ‘나한테 마가 끼었나’ 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할 때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실패한다는 것은 다음번에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니 겉으로 보기에는 잎사귀와 줄기가 다 병이 든 식물처럼 암담한 상태지만 그 뿌리에는 미래를 대비한 좋은 영양분이 숨어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복이라는 열매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너무 암울한 상황들을 희망으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나는 극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그래서 지금의 고통이 밑거름이 되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결과를 믿고 싶다. 그리고 모두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자의 논어도 관심이 많았다. 공자가 죽어아 나라가 산다는 충격적 제목의 책도 있지 않았던가? 과거 우리 조선 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인 유교이기에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과연 공자가 죽어야지 나라가 살 수 있는 걸까? 관료층이 지배에 필요한 덕목들만 뽑아서 백성들을 교화시켰기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임금을 최우선으로 군신관계를 중요시 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믿음을 최우선으로 했던 공자의 사상을 소개해볼까 한다.
자공이 공자에게 ‘경제, 군사, 백성들의 신뢰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라고 묻자 군사, 경제, 백성들의 신뢰를 꼽았다.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지금 국민들을 위한답시고 탁상공론이나 벌이고 있고, 선거때마다 공약을 내세우지만 지키지 않는 정치인들은 깊이 반성해야할 것이다.
다음은 맹자의 의에 대한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흔종에 쓰이기 위해 끌려가는 소를 보고 왕이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데, 흔종 의식을 폐할 수는 없고 그 소를 양으로 바꾸라 했다 한다. 맹자는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가는 것은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왕이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대신 양으로 바꾸라 했다며 그것이 인의 실천이라고 했다. 나는 이 구절을 왕 자신과 만남이라는 관계가 있기에 소에게 특혜를 준 것이며 일종의 낙하산,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것이라고 어리석게 해석했는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왕이 소를 구한 것은 보았기 때문이고 보았다는 것은 만났다는 것이고 이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얼마 전 일어난 쓰레기 만두 파동을 보자. 그 만두를 만든 사람이 만두를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봤다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더 이상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만남이 없기 때문에 쓰레기 만두가 누구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불량식품을 만들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만남이 없고 관계가 없기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자꾸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을 다시 한번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노자의 도와 자연에 대해 알아보자.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나는 이 구절을 보니 이상하게도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시의 내용은 관념적이던 존재가 누군가에게 꽃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음 으로써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철학적 내용의 시였다. 그런데 노자는 오히려 이를 거꾸로 말하고 있다. 이름 지어진 것은 참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 못한다. 사람들끼리의 약속일 뿐이다. 이름, 즉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고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곳에 진정한 도가 있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일 뿐이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이지만 그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는 무가 있다는 진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이며 통일체라는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무엇을 분류하지 않는 사유들, 그야말로 노자의 사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어떤 이름이 지어지면 그 틀에 맞춰서 사물을 대하게 된다. 이름이 사물의 속성을 전부 드러내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이름이 진실로 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냥 부르기 위해서, 편의상 지어진 것이다. 오히려 이름은 나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어리고 귀여운 이름인 내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깜찍한 모습을 상상하지만 나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은 이름과 느낌이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오히려 내게 붙여진 표지가 나를 이해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진리를 나보다 수천년 전의 사람인 노자가 터득하고 있었다니 성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페이지를 조금 할애해서 ‘우리나라의 사상에 대해서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지은이 스스로가 식민사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양고전을 택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고전도 그에 포함되어야 되지 않을까? 물론 중국 사상이 고대 동양사상의 원류이므로 우선이 되야 하고, 한국 사상까지 다루다 보면 흐름을 잃고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기 쉽지만, 역시나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어느샌가 서양의 사고방식에 빠져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일까? 동양사상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화란 이런 것이구나, 과연 과거의 일에서도 지금 현재의 일에 도움이 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동양보단 서양이 낫지, 라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던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동양사상도 서양의 합리적 사고방식에 전혀 뒤지지 않았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기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동양의 사상을 접하고 싶은 이라면 입문서로서 이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나역시 이 책을 계기로 관련 분야를 더욱 탐색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