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예술가라는 사실은 그가 온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떠맡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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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부르즈아 는 70세에 미술에 입문해 90세에 전성기를 맞이하신 분이다.

아마 30-40대에 내공을 쌓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나도 90이 되어도 좋고

이세상 사는 동안 단 한번의 전성기를 맞이하지 못해도 좋다.

그래도 나의 30대를 더욱 건강하고 알차게 살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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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코코죠 > 골때리는 소설집 하나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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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볼짝시면, 이 소설집은 아주 물건이다. 물건도 그냥 물건이 아니라, 숫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거나 차마 시도하지 못한 잔인한 농담이고, 우습다 못해 슬며시 뒷골이 땡기는 서슬퍼런 담론이다. 이런 소설을 읽었을 때면 별다른 감탄사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이마를 탁 때리면서 이렇게 외치면 되는 것이다.

"아, 그거 골때리네!"

골때리는 소설집이 하나 튀어나왔다. 이기호라는 소설가의 최순덕 성령충만기. 고만고만한 나이에 고만고만한 등단, 사실 그는 크게 눈에 뜨이는 소설가는 아니었다. 내가 이기호의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아주 오래전 한 잡지에 그가 기고했던 짧은 소설 한편이었는데, 그 제목은 '속옷' 이었다. 갓 군대를 제대한 주인공은 트렁크 팬티를 반바지인줄 알고 동네에 입고 나갔다가 슈퍼집 아저씨와 시비가 붙는다. 이게 팬티냐 바지냐를 놓고 싸우다가 결국은 경찰서까지 멱살을 잡고 끌고가며 갑자기 슬픔에 잠겼다는 대충 꽁트같은 내용이었는데, 그 필체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같은 농담이라도 기가 막히게 휘영청 뽑아내는 사람이 있고, 그 반대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썰렁함을 자아내는 사람이 있다. 이기호는 전자 쪽이다. 그러니까 그의 입을 통하면 뵬 볼일 없던 이야기도 즐거운 농담이 되고 발랄한 한바탕 웃음이 된다. 그게 끝이라면 나는 이 리뷰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웃고 나면 뒷머리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이기호의 농담에는 존재한다.  어쩐지 씁쓸해지고 방금까지 웃고 있던 자신이 민망해진다. 바보같이 낄낄 웃고 있던 자신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런 의미에서 이기호는 블랙 조크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나불나불 떠들어 봤댔자 이 소설집은 직접 읽어봐야 맛이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이 어땠다느니 7.80년대의 비루한 삶에 대한 풍자와 페이소스가 눈에 띈다느니 '현실에 분노하지 못하는 인간군상들'의 슬픔이 꾸깃꾸깃 꽉꽉 눌러 담겨져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의 억지스러움과 유치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주의사항도 일러주지 않겠다.

다만 나는 이기호를 주목할 것이다. 그는 이미 정형화되어 숨막힐 것 같은 한국 문단에서 조심스럽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젊은 소설가인 것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제주도 해녀 복장을 한 처녀를 만났을 때의 신선함과 어처구니없음이 이 정도일까. 말이 많았지만 사실 이 소설집에는 한 마디면 족하다. 이마를 찰싹 후려갈기면서 이렇게-

"아, 그거 골때리네!"

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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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imji > 한국소설에 밝은 미래 있을지니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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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을 뒤흔든 한국소설,을 꼽으라 하면 단연 이 작품집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에는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여하튼, 재미와 입담, 특이성, 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면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보편타당한 재미,라는 것이 있는가 고민해본다. 재미가 있다,라는 부분은 개인차가 무척이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심오하고 복잡한 이야기구조를 재미있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한바탕 큰 웃음을 만들어주는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해피엔딩이 재미있다고, 연인이 헤어져야 재미있다고 하는 독자들, 누군가 죽어나가야만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답이 없음으로 끝나야 재미있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나같은 경우는 흐지부지-오리무중의 인물이 나오는 걸 재미있어 하기도 하므로 나 역시도 그 개인적 성향이 강한 독자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재미, 보편타당한 재미있음,은 불가능한가? 나는 아무래도 있다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이기호의 소설집 이 <최순덕 성령충만기> 때문인 듯 싶다.
  적어도 내가 말하는 재미는 웃음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웃음 이면에는 새하얀 백지 상태가 아닌 적절한 메시지를 수반한 웃음이어야 유쾌하게 웃을 수가 있다(그것이 실소이든, 비소이든). 그리도 수다스러워야 한다. 침묵으로 일관되는 웃음(재미)은 그로테스크로 빠지기 십상이니까. 인물의 비루함이나 정상적이지 못한 우스개의 행동도 재미있지만, 그들의 사고체계의 비정상화, 비일상화도 웃음을 지어낸다. 또한 그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우스개 행동들, 그 행동들로 인해 펼쳐지는 정상적인 일상 속에서의 좌충우돌적인 상황들이 그 재미를 배가 시킬 것이다. 그러나 내가 흔쾌히 동의하는 재미는 일단 입담이어야 한다. 거짓말처럼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 정말이야? 라고 되물어도 능청스럽게 정말이라니까- 라고 맞장구치는 상대에게 듣는 이야기처럼, 그런 밑도끝도 없는 이야기의 속도성, 집중력이 잘 어울어진 이야기 말이다. 이기호의 소설이 그런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작가의 소설들은 모두 재미있다. 단연코 재미있다. 

  어슴푸레하게 어떤 계보를 떠올려본다. 성석제, 김영하, (김종광), 박민규, 그리고 이기호. 이들의 특징은 앞서 말한대로 소설 속의 입담 만큼은 둘째하면 서러울 작가들이다. 이야기가 정말인지 궁금해지는,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진짜인지 의심해보고 싶은 이야기들. 거짓말도 적당해야 믿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도통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펼치므로 독자들을 계속 헤매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하는 가독성과 그 이야기 속에 교묘히 숨겨져 있는 메시지를 찾게끔 만드는 집요함, 그런 것들을 유발시키는 작가들과 작품들. 그래서 독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소설을 '재미있다'와 '입담이 좋다'라고 평하곤 한다. 나 역시 그 생각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진짜에 대한 거짓말을 구사하고, 그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보이기 위해 진짜 거짓말을 보탠 거짓말을 펼쳐 도대체 진짜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하고, 그래서 그 진짜를 찾는 것이 소설의 메시지로 통하게 한다면, 김영하는 분명하고 정확한 이야기라고, 어디 흠잡을 데 없는 거짓말을 펼쳐 놓아 독자로 하여금 깜빡 속게 만드는, 그러나 그 속임수의 이면에는 극명한 메시지가 거대하게 서 있어 독자에게 기함을 터트리게 만드는, 아주 명석한 도시인다운 재미를 구사한다. 김영하가 도시적 이미지의 재미라면 김종광은 반도시적인 이미지로, 이건 정말이야- 라는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보여지는 일화들을 거침없이 내뱉어주므로 호탕한 재미를 만들어 준다. 박민규는 현실과 환상/가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어디가 진짜고 어디가 거짓말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그런 의미 자체로서의 진실을 말하는 재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기호의 재미는? 김영하의 도시적 감수성에 깃든 냉철한 관찰에 의한, 성석제의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구사하며 김종광의 능청스러운 리얼리티의 거침없는 진술력, 박민규의 모호한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한 거짓말도 얼마간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 이기호의 소설에는 확실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형식의 특이성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한 형식이 서술구조와 메시지의 확고한 자리매김에 밑바침이 되어주는, 또 다른 구성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제작인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경우가 그러한데, 페이지를 2단으로 구성하고(성경책처럼), 서술어미를 또한 성경과 흡사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성과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다고 쉽게 치부될 문제는 아니겠으나, 적어도 그런 형식이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는 독자를 아주 손쉽게 속이는(거짓말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아주 부합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햄릿 포에버'의 경우에는 문/답으로 구성되어 마치 희곡을 읽는 듯한 이미지를 차용해 소설 내적 서사구조에 용이하게 흡입하게 만들고, '버니'의 경우는 리듬감을 살린 한 곡의 랩('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나를 찾아왔어, 사무실로 왔어, 우릴 보러 사무실로 왔어, 그녀의 매니저도 왔어, 좆나리 멋진, 크라이슬러 미니 밴을 타고 왔어, 매니저의 양아치들도 함께 왔어,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 p.7)처럼 소설 전반을 구사하고 있다. 
  일단 독자는 그런 생경스러운 형식에 놀라고 긴장하게 하나, 그 긴장은 오히려 이야기의 흡입에 일조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독자의 낯설음은 재미있다,의 의미로 편입되게 된다. 물론, 근간은 이야기구조이며, 그 이야기구조 속에 숨겨진 메시지다. 하지만 적어도 그 메시지까지의 진입을 용이하게 돕는 일을 작가 스스로 자청해서 구사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그것이 한낱 소설의 형식을 실험하는 치기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라딘의 소개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절에서 길러진 고아 소녀('머리칼 전언'), 지하철 앵벌이('옆에서 본 저 고백은'), 생활에 찌든 무능한 가장('최순덕 성령충만기'), 자기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모르는 청년('백미러 사나이'), 민통선 근처서 감자밭 가꾸기에만 여념이 없는 순박한 아낙('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등 사회 주변부에 놓인, 교양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막돼먹은' 사람들의 삶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마치 작정을 하고 '막돼먹은'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고집하는 작가 의식은 무엇인가를 고려하는 일도 이기호의 소설을 읽는, 그래서 그 재미의 이유를 찾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들의 삶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갖자는 일차적인 목적의식에 의해서? 정상적이지 못한 것도 존재한다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왜 독자가 그런 생각을 해야하는가(왜 작가는 그런 생각을 유도하는가). 내가 뭐라고,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내가 도대체 뭐라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곱씹으며 나의 삶을 반추하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내가 뭔데. 그것이 바로 이기호 소설이 부여하는 재미 이면에 있는 메시지이며, 또한 그 메시지로 인해 나의 재미가 그저 백짓장처럼 말끔한 유쾌함이 아닌, 깊고 진중한 즐거움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느새 독자도 작가가 펼쳐놓은 거짓말과 허구의 현실 속에서(그러나 그 허구의 현실이 사실 현실의 현실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한바탕 신나게 같이 나뒹굴었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호의 소설은 재미있다. 보편타당한 재미,라는 것이 있다면 작가의 소설은 그에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머리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재미있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조금 더 세심히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미지, 그 인물들의 행동반경의 속해 있는 실재의 현실, 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문체의 실험, 그리고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독자 스스로의 생각의 잣대와 그 잣대를 만들어 준 아주 무섭고 끔찍한 선입관과 더 나아가 그런 선입관을 만들어준 저 깊은 무엇에 대한 탐닉. 그것들을 세심히 찾아낸다면 이기호의 소설들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말만 잘 한다고 해서, 거짓말을 감쪽같이 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을 단순히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사람, 재미있는 소설이 되기위해서는 분명 핵심이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독자의 몫이다. 그 몫을 찾아낸 사람만이 작가 이기호의 소설에 진정한 박수를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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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호밀밭 > 웃고 있는 삐에로를 닮은 소설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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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을 묶은 소설집의 제목은 작가와 잘 어울리곤 한다. 신경숙의 소설집 제목은 은근함이 있다. <딸기밭>이나 <종소리>는 은은한 매력이 느껴진다. 은희경은 <타인에게 말걸기> <상속>과 같이 약간은 냉소적인 제목의 소설집을 냈었다.(<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는 은희경의 두 번째 소설집의 제목은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이었어야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김연수는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서정성을, 김영하는 <오빠가 돌아왔다>로 호방함과 호기를 내보인다.

제목만으로 마음을 끄는 소설집이 있다. 이 소설집도 제목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끌 만하다.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호기심이었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다소 예민한 제목이다. 이 제목을 어떤 간증처럼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소설집을 사서 표제작부터 읽는 일은 드문 편인데 이 책은 최순덕의 이야기부터 읽고 싶었다. 최순덕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처럼 2단으로 구성된 심상치 않은 편집이 눈길을 끌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노니>로 시작하는 성경을 본뜬 편집과 구성이 독특했다.

단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초콜릿 상자를 여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8편의 작품은 얌전하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초콜릿과는 다르다. 줄을 맞춰 있지도 않을뿐더러 줄을 서라고 해도 제대로 설 것 같지 않은 초콜릿이다. 금박의 포장지를 뚫고 나올 만큼 개구쟁이 같고, 몸에 붙은 아몬드를 흔들어서 툭툭 털어 버릴 것 같은 자유분방함이 있다. 사실 이 소설들은 달콤함이나 이국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초콜릿보다는 땅에서 자라는 감자처럼 흙 냄새가 나는 소설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실체도 알기 힘든 고독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스로 마이너리그라고 자책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쨍하고 해뜰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도 아니고 허황된 희망에 부풀어서 사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현실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지만 현실에 뿌리내리지는 않은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은 땅 밑으로도 사라질 수 있고, 머리카락의 힘으로 하늘로 떠오를 수도 있고 뒤로 걸어 다닐 수도 있다. 어느 날 스타가 되어서 나타날 수도 있고, 햄릿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은 이시봉, 최순덕, 순희, 순녀 등으로 도시적이거나 세련된 느낌을 주는 이름들이 아니다. 순한 이름으로 독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딱딱한 현실이 아닌 조금은 몽롱한 환상의 세계에 반쯤 기대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웃고 있어도 정말로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삐에로 분장을 한 것과 같다. 하지만 풍선처럼 둥글둥글한 삐에로 옷을 벗으면 마른 몸매가 드러날 것만 같고, 삐에로의 분장을 지우면 울고만 있을 것 같은 슬픔이 느껴진다. 잘 읽히는 재미난 문장이 속도감 있게 다가오지만 마냥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소설들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들을 읽고 마음이 허탈했다거나 쿵 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읽는 사람은 웃어도 쓰는 사람은 웃으며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 소설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이 소설, 저 소설을 기웃대며 읽고 있다. 한 달 간 거의 소설만 붙들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과 저 소설이 합쳐지고, 저 소설 주인공이 이 소설 주인공과 겹쳐져도 별 무리 없이 연결되는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집만은 좀 달랐다. 이 소설들은 신생아실에 엄마 이름 이기호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올망졸망 모여 있는 아기들과도 같다. 이 소설들이 이기호라는 이름표를 단 8명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절대로 일란성 쌍둥이는 아니다. 누구는 키가 크고, 누구는 얼굴이 길다. 누구는 벌써 옹알이를 하고 있는가 하면 누구는 발만 꼼지락거린다. 비슷비슷한 8명, 혹은 10명의 쌍둥이를 낳은 엄마는 누구에게는 파란 옷을 입히고 누구에게는 머리핀을 꽂아서 구별을 해 주어야겠지만 이 쌍둥이들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누구는 웃고 있고, 누구는 울고 있는, 개성 강한 쌍둥이들이다.

흥부네 집 자식들처럼 못 먹고 못 입고 있지만 그래도 심성 고와 보이는 쌍둥이들을 만난 기분이다. 지금은 흥부네 자식이지만 언젠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부잣집 도련님, 아가씨로 변신할 꿈을 간직하고 있는 쌍둥이들. 다음에는 더 고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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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이 기호는 호기롭구나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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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하고도 구슬프게 졸라리 재미난다. 그럼에도 웃음 뒤끝에 남는 한숨. 능글맞고 빙충맞고 되바라지고 소외된 떨거지 잡것들이 푸덕푸덕 날겠다고 오지게 부대끼는 모습들이 가득하다. 값지고 비싼 고래고기의 열두 가지 맛보다 더 찰지고 쫄깃하고 흐벅진 닭똥집 씹는 맛처럼 이기호의 첫 소설집은 탱탱하고 올곧게 독자들에게 잘 전달된다. 맛깔스럽고 영양가도 풍부하고 요리솜씨도 일품이라 하겠다.

다만 염려되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재기 넘치고 독특한 전달방식이다. 이 소설집의 빼어난 매력이, 차후 작가의 작품창작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 형식에 내용이 잠식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노파심이 생긴다. 산속 기도원에서 열심히 통성기도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진납세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오열과 통곡으로 눈물과 땀범벅,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고도 섹시한 도취 와중에 방언과 환상의 은사까지 맛본 다음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담배에 불 땡기면서 친구에게 "야, 오늘 은혜 졸라 땡기지 않았냐? 필 제대로 받았다야, 담배맛 죽이네." 나부리는 것처럼 소설 읽으며 설사 방귀 싸는 것처럼 웃어재끼다가 빡세고 푸석푸석한 삶을 살다보니 거룩한 은사, 소설의 감동이 날아간다. 다음 소설의 변주가 형식으로 이어질지, 내용으로 이어질지는 두고봐야 할 것, 다시 강림할 은혜를 기다리듯 목을 빼고 똥꼬 닦고 이기호의 다음 소설을 기다리리라.

웃길 수 있다는 건 슬픔을 안다는 거이고, 웃는다는 거는 슬프다는 거이다. 그러니 웃지만 말고 울었다는 흔적에 대해서도 손길을 내밀어야 하겠다. 멋드러진 출발, 걸판진 입담과 재주와 속내로 잘 갖춰진 새로운 소설가의 시작에 흔쾌히 짧은 Ÿ셉떳꼭?기도를 보낸다.

부디 열라 오래 살아 벽에 똥칠할 때까지 남는 소설 많이 쓰고, 쓰고 아픈 존재들의 생활까지  꾹꾹 안아 챙겨 내고 작고 여린 웃음 전해 길이 길이 아니게 될 때까지 서로 서로 살아 보세~

* 다른 분들 리뷰 보니 훌륭하고 칭찬일색 할 말마저 별로 없고 그냥저냥 뻘쭘하네. 그냥 한 번 외쳐보세, 고저 이거 맛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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