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의 잠자리는 우리집이 아니라 언니네 집이다.

며칠전 시장에서 사고가 크게 나서 앞니를 몽땅 깨뜨린 조카녀석 위로 공연차 왔는데

태양님 회식이라고 하니 저녁까지 먹고 가야겠다..한것이 그냥 하룻밤 자고 가야겠다로 바뀌어 버렸다

태양님도 회식이 끝나는 대로 이리 올것이니 부부가 함께 하는 외박! 흉될것이 없겠지 ^^

하루종일 조카와 함께 갖은 놀이를 다 하다가 되돌아 보니 조카보다 내가 더 신나서 놀이를 한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어릴때는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도구들이 있으니 정말 신이 났다. ^^

매직콘 이라고 해서 물로 붙이는 친환경 옥수수교구가 있고(우리 어릴때 쓰던 수수깡의 발전된 형태랄까..),

모래 그림 그리는 형형 색색의 모래들, 도미노, 젠가, 만능 블럭, 옥스포드 블럭...등등..

정말 쉴새 없이 놀았다. 지금 저 녀석은 읽기 선생과 함께 (읽기 선생=지 엄마) 책 읽기에 돌입 자려고

준비중에 있다. 얼굴만 보면 싸우는 모녀지간이면서 책 읽기 만큼은 지 엄마를 선호 한다. 특별한 비법이

있나본데 나도 아기 갖기 전에 꼭 전수 받아야겠다.

우리집은 보일러를 거의 안켜고 사는데 이집은 덥다 더워..

울 태양님 오시면 미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지금 형부가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오신다고 연락이 왔다 으흐흐흐

그거 먹고 맛있는 잠속으로 빠져들어야지..근데 울 태양님은 회식 언제 끝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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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지하철에서 읽을 책에 대한 엄격한 규칙들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이건 내 안에서 나오는 규율이 아닌 남들의 눈을 인식한 그런 것이다.

일단 그렇게 좋아한다던 만화책은 제외를 시킨다. 혼자서 낄낄거리고 나를 모르는 온라인상과

나와 절친한 몇몇 사이에서는 열변을 토하며 만화를 지지하면서도 지하철에서 서른 넘은 아줌마가

만화책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짓기에는 웬지.... 어쨋든 그래서 미안하게도 제외를 시킨다.

또 베스트  셀러 또한 제외!! 누구나 다 읽는 책은 싫다! 뭔가 독창적이게 보이고 싶다 ^^;;

야한것도 안된다! 그 들중 읽은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다보니 인문서들이 주를 이루고 나도 모르게 난 이런책도 본다..라는 뻐김을 마음에 품고

책읽기를 하게 된다. 정말 신기하게도 집에서는 안읽히던 책이 지하철에서는 쭉쭉 잘 읽히기도 하는데

그게 정말 이해가 되는건지 남들 눈 의식해서 그냥 막 페이지를 넘기는건지는 알수 없다.

그런데 어제....

용기를 내서 만화책을 들고 나갔다.

약속시간이 다되서 집에서 읽던 만화책을 들고 나간것이다. 지금 못읽으면 죽을것 같은걸 어쩌나..^^;;

헌데 만화책 보는것도 나쁘지 않더군!

그동안 입으로만 만화는 제9의 문화다! 라며 떠들고 정말 좋은 만화책이 많습니다!! 떠뜰어 댔던거

많이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만화를 음지에서만이 아니라 양지의 세계로 끌어 올려야겠다!

생각하게 되면서 (지하철에서 만화한번 본걸 가지고 꾀나 호들갑이다 ^^;;;) 오늘도 나가면서 만화책을

가지고 나갈 생각을 해본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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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3-0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하철에서 뭐 보면은 어지럽고 토 쏠려서 되도록 안보는 편이에요. 물론 버스나 자동차에서는 당연히 가만히 있어도 토 나올 것 같구요.. 지하철에서 자연스럽게 뭐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더라구요.. 저는 짜투리 시간 활용하려고 지하철에서 책 읽으면 평소에 읽는 것 보다는 더욱 피곤하기에, 남는 시간 활용이 아니라 피곤한 짓 만들기가 되버려요... 휴. 만화책이던, 인문서 건(인문서는 더 집중해야 하니까 더 멀미납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참 부럽네요

비로그인 2006-03-0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철에서는 잡지 위주로 놀거리를 챙기지요.
책이라면 소설보다 인문도서가 더 좋습니다...;;; 이상합니다...;;;;

이쁜하루 2006-03-0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찾아서님/ 저는 지하철은 멀미가 안나는데 버스는 아주 쥐약이였죠! 지금은 저만의 비법을 터득하여 차안에서도 책 잘 읽는답니다. ^^ 신기하게도 짜투리시간에 읽는책이 정말 잘 읽혀요! ㅋㅋ

이쁜하루 2006-03-03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아하~~ 놀거리!! 전 왜 그게 잘 안되는지..역시 너무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지라..^^;; 어제 만화책 한번 꺼내보고 난뒤에는 정말 나의 즐길꺼리를 들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히히
 
미녀는 야수 5 - 완결
마츠모토 토모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하하~~ 에이미의 평범치 않은 행동과 모습들은 마치 애완동물 같다. 거기 나오는 기숙사 친구들도 모두들 에이미 때문에 애완동물 한번 키워봐! 하는 생각들을 한다지! ㅋㅋ 난 이 만화를 읽으면서 와닝과 시몬느 그리고 에이미의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기숙사 생활 이야기인지라 더욱 좋았다. 대학교 2학년때 기숙사에 산적이 있었는데 밤마다 과자 까먹고, 사발면 먹기 지겨워서 봉지라면 해먹고(라면을 부신 후 물을 부어 먹음), 기숙사가 조금 으슥한데 있어서 남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데려다줬던 기억! ㅋㅋ 뭐 이런 생각들이 나면서 추억에 젖을 수 있었다.

이 만화에서 가장 포인트를 두고 봤던건 와닝의 변해가는 모습이였다. 소년원에 다녀왔다는 둥, 칼부림을 냈다는 등의 안좋은 소문을 이끌고 다니는 와닝의 무표정이 편견없이 대하는 에이미로 인해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변해간다.  마음에 항상 미움의 대상으로 남아있던 아버지도 에이미 덕분에 미워할 틈도 사라져 버리고, 괜찮아 괜찮아~~ 너는 좋은 오빠였어 동생은 행복했을꺼야~ 라는 에이미의 주문같은 말에 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파하던 와닝은 상처를 회복해 간다.

뭐 순정만화의 대표적인 캐릭터! 평범한 여학생에 딥따 잘생기고 똑똑한 남학생!! 그렇지만 여타 순정만화하고는 살짝 질이 다르다고나 할까!  좀더 완성도 높은 결말이였다면 좋았을껄 역시..급히 끝낸 듯한 마무리..고거이 좀 걸린다. 그래도 역쉬 소장가치가 아주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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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테스 > 서늘한 미인 - 따뜻함을 전하는 희망의 전도서
서늘한 미인 - MBC 김지은 아나운서가 만난 스물한 명의 젊은 화가들
김지은 지음 / 아트북스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 서늘한 미인을 다시 읽고 있다.
제목과는 달리 가슴 깊이 따뜻한 글들..
서늘한 미인을 읽으면 김지은 아나운서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감성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읽을 때마다 나는 참 많이 슬프다.
21명의 예술가들도 걱정되고, 김지은 아나운서도도 걱정되고..
(뭐 세상에서 제일 걱정되고 믿을 수 없는 인간 나이긴 하지만..)
요즘같이 쿨한 세상에 예술이란걸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그 사람들보다 더 예술가같은 대책없는 공중파 방송 아나운서..

이.. 대책없음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는 ㅡㅡ;;

이 책에 소개된 21명의 예술가들이 이 미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예술을 지켜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니 혹 상업적인 그 무엇과 타협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 예술의 진실 -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 - 만은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예술이 이 미친 세상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를 바라고, 그들의 건강한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나쁜 변화 때문에 미셸이 상처입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난 미셸님의 팬이니까..
사람들이 고흐의 모든것이 담긴 그림들을 돈이라는 족쇄를 채워 호사가의 거실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고, 예술이 누구에게나 밥이 될 순 없겠지만, 배고픈 예술가들에게 종교가 아니라 밥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늘한 미인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책이 철저히 마이너의 감성으로 쓰여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이 책 '서늘한 미인'과 아나운서 김지은을 사랑하는 이유다.
미셸 뚜르니에를 좋아해서 미셸이라는 닉네임을 쓴다는 그녀의 촌스럽고 소녀적인 취향이 나는 좋다.
부디 가진자들이 예술을 자신의 명예와 권력, 지적인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김지은 아나운서처럼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런 마음으로 예술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작품안에 들어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과의 소통은 그들을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시킬 것이고, 그러면 세상도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예술의 희망이다..
나는 이 책 서늘한 미인이 그런 희망의 전도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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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술

 

소설을 읽는 법


소설은 단숨에 읽는 것이다. 바쁜 사람이 장편 소설을 읽을 때에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될 수 있는 대로 짧은 시간에 읽도록 노력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가운데는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생각하면서 맛보듯이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읽는다’ 라기보다는 책의 사건이나 인물에서 무의식의 만족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다.


빨리 읽을 것. 그리고 작품에 몰입하여 읽는 데 열중할 것. 몰입한다는 것은 문학에다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작품이 작용하는 대로 맡기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완전히 작중 인물이 되어, 어떤 사건이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인물의 행동을 긍정할 수 없더라도, 자기의 세계를 떠나 그 사람의 세계에서 살려고 노력하면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자기가 완전히 그 세계의 인물이 되었을 때 해도 좋다.


빨리 읽지 않으면 이야기의 통일성을 놓치기 쉽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세부(細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물이나 사건은 이야기의 ‘명사(名辭)’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독자는 그러한 것을 잘 알아서 각각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도고 싶은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전쟁과 평화》를 읽기 시작하면,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의 등장인물이 자꾸 나타나서 마음 약한 독자는 도중에 단념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치 우리가 새로운 거리에 이사 가거나 파티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은 것으로서ㅡ 어떤 인물이나 모두 기억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소설의 인물의 대다수는 다만 배경에 있으면서 주요 인물의 움직임을 돕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다 읽을 무렵에는 누가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며 잊지 않게 된다. 피에르, 안드레이 나타샤, 마리 니콜라이 등의 이름은 다 읽고 난 훨씬 뒤까지도 언제나 기억에 떠오를 것이다.


또, 사건이 아무리 뒤얽혀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마침내 알게 된다. 여기에서 자자의 조력도 크다. 저자는 플롯의 전개에 빠져서는 안 될 사건을 독자가 놓치는 일이 없도록 여러 가지로 궁리를 짜놓는다. 중요한 것은, 가령 이야기의 발단에서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처음부터 분명해서는 안 된다. 소설은 인생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실제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모두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과거로서 되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되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사건의 관련과 행동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인생과 비슷하다는 것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까지다. 등장인물은 책의 밖에서까지는 살 수 없다. 《전쟁과 평화》가 끝난 뒤에 피에르와 나타샤가 어찌되었느냐고 물어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한정된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까닭에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이야기다. 글자를 못 읽더라도 이야기는 귀로 들을 수 있다. 또, 자기 자신이 창작하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픽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 불가경한 것인 모양이다. 어째서일까? 하나는, 픽션이 현실의 욕구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욕구까지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번거로운 논의를 피하고 간단히 말해두겠다.


사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어떤 인간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인물이 벌을 받거나 보복을 당하거나 했을 때도 필요 이상으로 공감하거나 반발하거나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인물이 유산을 받는 등의 행운을 입게 되는 것을 기뻐하거나 하는 것은, 독자가 그 인물에 공감을 가지고 자기와 동일시(同一視)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때, 자기도 유산을 받고 싶다는 것은 접어두고 다만 그 책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좀더 열렬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연애 소설을 애독하며, 강한 자유로운 사랑으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자기 동일성을 느끼고 만족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의 사랑의 불완전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또, 두 부분의 사람은 선천적으로 가학성(加虐性)이나 자학성(自虐性)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작중 인물의 승자(勝者)나 패자(敗者)의 어는 쪽에 자기동일(自己同一)을 느낌으로써 충족된다.


인생은 반드시 정의(正義)가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선인(善人)이 괴로워하고 악인(惡人)이 영화를 누리는가?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사람들을 커다란 불안에 빠뜨린다. 소설이나 희곡 속에서 정의가 존재하고 인생의 혼돈(混沌)이나 불쾌한 상황이 바로잡히는 데에 우리는 만족한다.


작가는 신(神)처럼 작중 인물을 지배하여 제각기의 인물에 적합한 보수(報酬)나 벌을 준다. 좋은 소설은 이 점에서 조리가 있으며, 위대한 작가는 정의(시적 정의라고나 할까)를 틀림없이 수행함으로써 독자를 납득시키고 또 만족시킨다.


비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선량한 주인공이 가혹한 운명에 떠돌아다니면서도 마침내 자기의 운명을 깨달아간다. 셔우드 앤더슨의 소설도 《어째서인지 나는 알고 싶다》는 제목으로 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많은 문학 작품의 제목으로서도 통용된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의 인생이 붕괴되고 나서 그 어째서를 깨닫는 것이 보통인데, 독자는 그러한 고통을 맛보는 일 없이 그가 얻은 깨달음을 서로 나누어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픽션을 비평함에 있어서는 어떤 개인에게만 특유한 내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책과 거의 대부분의 사람의 갚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을 분명하게 구분하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자와 같은 책이야말로 각 시대, 각 세대를 통하여 계속 살아가는 훌륭한 문학이다. 인간성이 변하지 않는 한, 이러한 문학은 정의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가지게 하며 깨달음을 얻게 하고 불안을 진정시키며 만인의 욕구에 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는 과연 완전한지 어떤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훌륭한 문학의 세계는 완전하다.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또 언제까지나 이 세계에서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인정(人情)일 것이다.


여기서, 적극적 독서의 그 네 가지 질문을 생각해내고 문학에 적용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첫째 물음, 이 책은 전체로서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 대답은 이야기의 플롯의 통일성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둘째 물음, 무엇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작중의 인물이나 사건을 독자가 자기의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물음, 이 책은 전체로서 혹은 부분적으로 진실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작품의 시적 진실(詩的眞實)에 대하여 독자가 내리는 판단이 대답이 된다. 즉, 그 작품이 독자의 지성도 감정도 만족시키고 있는가? 독자는 작품의 미(美)를 음미했는가, 또 그 이유, 이것이 대답이다.

넷째 물음, 거기에 어떤 의의가 잇는가? 이 물음을 소설이나 시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생각이다. ‘교양서’의 경우, 대답은 독자의 ‘행위’에 있었다. 실천적인 책의 경우는 실제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지만, 이론적인 책의 경우는 정신상의 행위가 요구되었다. 즉, 만일 그 책의 결론이 독자의 견해의 수정을 요구한다면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를 아무리 잘 읽어도 행위를 요구당하는 일은 없다.


확실히 문학이 독자에게 가지가지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일도 있다. 정치든 경제든 도덕이든, 전무서보다 소설을 읽는 편이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는 일도 흔히 있다. 오웰의 《1984년》은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며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新世界)》는 기계 문명에 대한 풍자며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收容所群島)》는 소련의 관료제에 숨어 있는 잔인한 비인간성(非人間性)에 대하여 수많은 조사·보고보다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책은 언제나 발금(發禁)이나 검열(檢閱)을 당하였다. ‘전제 구주는 웅변으로 자유를 설파하는 학자보다도 농담을 냅다 하여 인심을 지배하는 술주정꾼 시인을 두려워한다.’(E. B. 화이트)


하지만, 이러한 실제적 효과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으로 행동을 이끄는 일은 있어도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문학은 예술 작품이다. 예술의 목적은 그 자신 이외에는 없다.


만일 어떤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무슨 행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거기에는 그러한 감정을 낳는 논술이 잠재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보는 것이 좋다. 시나 소설에는 알 수 없도록 슬며시 논술이 숨겨져 있는 일이 있다. 그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감동하거나 반응하거나 하는 것이 좋지만, 그 때 자기는 작품 이외의 것에 관심이 향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을 정말로 잘 읽기 위해서는 오직 그 세계를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2006. 02. 15

푸 른 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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