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닌 책 잘 벼려 이젠 쓰려고요”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⑦ ‘삼성비서실’ 저자 박세록

경기도 고양시 가장동 그의 집은 완벽하다. 2만권 장서. 거실, 안방, 주방옆방, 서고, 서재 등 다섯 곳에 펼쳐진 책들은 분야, 시리즈, 책 크기대로 정리정돈돼 있다. 바닥에 놓인 책이 없다. 단 한 곳 예외, 주방옆방 구석에 몇 권. 더도말고 덜도말고 책꽂이와 책의 양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셈.

박세록(70)씨.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작고)의 비서를 지냈다. 그 인연으로 <삼성비서실>(미네르바기획, 1997)을 쓰고 펴냈다. 그룹 안에서 삼성전자, 제일기획 등 주로 창업선발대로 활약했다. 이쯤이면 아하! ‘삼성맨’이다. 그 가운데서도 고갱이. 옷차림 역시 흐트러짐 없다. 8월 초순 무더위에도 연노랑 세미 정장이다. 그래서다. 거실 책꽂이 위에 앉은 고운 먼지가 슬픈 것은…. 일주일쯤 된 느낌.

“요즘 <일리아드 오디세이> <겐지 모노가타리>를 읽었어요. 일리아드는 50년만입니다. 감각을 벼리기 위해서죠.”

토마스 만이 일흔한 살에 <선택된 인간>을 썼고 윈스턴 처칠 역시 일흔 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는 말은 그 사람들이 그의 거울이라는 의미다.

<부기 도입사>, <이병철 평전>, <연애 문화사>, <미인의 역사>, <이름 문화사>. 이 책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박씨가 쓰려는, 앞으로 나올 예정인 까닭이다. “죽기 전에 정리해야죠. 가을부터 착수할 겁니다.”

거실 책꽂이에는 메모로 가득한 바인더 노트가 16권. 노트의 등에는 사무관리, 비서론, 산(경기, 강원충청, 영호남), 명승지, 성, 바다, 일기, 연구경영, 연구등산, 회계, 연애, 미인, 실크로드, 집시, 탱고 등 제목이 달려있고 권마다 다닥다닥 견출지에는 세부사항이 구별돼 있다. 그 가운데 ‘연애’를 들춰보니 “남성은 권총자살 여성은 투신자살(보봐르, <제2의 성> 31쪽). 윤심덕의 자살방법은 여성적인 방법이다”라는 메모가 눈에 띈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분야는 개화기. “1890년대 서구문화의 유입은 4~5세기 불교의 도래보다 더 큰 변화입니다.” 한국사를 근본부터 뒤흔든, 역사상의 일대 장관이라는 거다. 쓰려고 하는 부기, 연애 분야에서 그 파노라마를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70년대 초부터 심혈로 모아온 자료는 그쪽이 가장 많다.

부기는 자본주의의 바탕에서 그 시스템을 움직여 왔으면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부문. 아무래도 다루기 어렵고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70년대초부터 심혈로 자료 모아

서양 부기가 처음 들어오기는 19세기 말 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을 통해서라고 추정된다. 부기 단행본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08년(융희2년). <신편 은행부기법>(임경재, 휘문관), <실용 가계부기>(민천식, 휘문관), <실용 상업부기>(임경재, 휘문관)가 그것. 일본 것을 그대로 들여와 편역했다. 이어서 나온 것이 1908년 <사개송도치부법>(현병주, 덕흥서림). 송도 상인들의 용어를 빌어와 복식부기를 설명하고 있다.

부기를 국내에 정착시킨 사람으로 윤정하를 꼽는다. 한국의 첫 회계사(당시 명칭 계리사)다. 1938년에 낸 <조선세무요람>이 그의 저서. 학문적으로 정착시킨 이는 김순식(메이지대 상업부 졸업, 고려대 교수 역임). <상업부기요람>(엄송당서점, 1937)을 냈고 해방 뒤 <부기요강>(동지사, 1948)을 썼다.

“개성(송도)부기는 복식부기가 아닙니다.” 그의 어투는 단호했다. 개성부기가 복식부기라는 오류를 빚어낸 장본인으로 현병주와 윤근호를 꼽았다. 1908년 현병주가 서양 복식부기를 부연하면서 송도치부법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 빌미가 되었고 1984년 윤근호가 <한국회계사 연구>(한국연구원)에서 ‘용어의 차용’을 ‘사실의 부합’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증거로 <장책>을 제시했다. 80년대 청계천 경안서림에서 구입한 이 장부는 어느 개성상인이 작성한 1887~89년 3년치 외상장부. 여기에는 복식부기의 기본이 되는 단위의 통일이 구현돼 있지 않다. 물량은 물량대로, 화폐는 화폐대로, 따로 기술돼 있어 아퀴를 맞출 수 없다. “단위가 일관되지 않으면 장부의 객관성이 없거든요. 1원 단위까지 정확히 맞출 수 있어야 하는데 송도치부법은 그렇지 않아요.”

이러한 학문적 오류는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되지 않는 탓이다. 80년대 이전까지는 장책 자료가 많이 유통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무렵 민족주의 사관이 득세하면서 국수주의로 흐른 영향도 없지 않다고 본다.

‘연애’ 역시 개화기를 엿보는 만화경이다. <매천야록>에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키스’가 언급돼 있다. 이광수의 글을 보면 그가 하라다 미노루의 연애 관련 글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하라다는 1920년 엔런 케이의 <연애와 결혼>을 번역 출간했다. 박씨는 ‘연애’를 통해 한국의 여성운동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해탄에서 김우진과 정사한 윤심덕, <김연실전>의 이연실,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등이 대상일 터. “한국의 여성운동이 5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선진국 수준에 이른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안방의 한쪽 벽을 차지하는 철학 서적 역시 문화 이입사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는 컬렉션이다. 1950년 이전에 나온 것들은 대부분 모았다. 능력과 필요를 갖춘 사람이면 넘길 생각도 있다. 거의 완벽하게 모았던 임진왜란 관련 책은 더 절실한 친구의 아들한테 양도한 바 있다.

감식안 무뎌져 이젠 필요 책만 사

돋보기를 쓰는 그는 책을 볼 때 별도의 커다란 돋보기를 집어든다. 6년쯤 전부터다.

2001년 그는 넉달동안 사실상 장님으로 지낸 적이 있다. 왼쪽 눈이 포도막염으로 실명한 터에 오른쪽 눈의 시신경에 마비가 온 것. 충격이었다. 책 수집광에다 영화광인 그한테 눈은 생명줄. 심각한 고민을 했다. 고민이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살아서 무얼 하겠는가. 밤낮이 뒤바뀌고 열흘동안 몸무게가 5㎏이나 빠졌다.

실명해서도 업적을 낸 사람들을 떠올렸다. <임꺽정>의 홍명희, ‘아랑페스 협주곡’의 호아킨 로드리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오스트롭스키 등등. 삶의 방식을 비디오 체제에서 오디오 체제로 전환했다. 휴대용 녹음기를 사고 성경테이프 등 각종 오디오북을 샀다. 다행히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밑져야 본전, 세브란스병원에서 회복확율 20%라는 왼쪽 눈을 수술해 0.2의 시력을 얻었다. 세상을 다시 얻은 기분.

그는 요즘 영화관은 물론 헌책방에 안 간다. 책에 대한 의욕을 잃었을 뿐더러 좋은 책을 찾아내던 동물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 최소화한 필요를 새책방에서 채운다. 대신 그동안 사들인 책을 진하게 본다. 업데이트된 책은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책>(들녘), <유서필지>(돌베개) 등 ‘책에 관한 책’. 책꽂이 틈에 가로뉘어 끼여 있다. 이쯤에서 ‘책꽂이-책의 완벽한 일치’ 수수께끼가 풀린다.

가혹한 줄 알면서 던진 질문. “계획한 책을 과연 쓸 수 있겠는가?” 토마스 만, 윈스턴 처칠은 그래서 언급됐고 감각을 벼리고 있다는 말도 그래서다.

그는 이야기하던 중, 김두한을 괴롭힌 일본인 형사가 미와 경부라는 설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김두한(1918~1972)이 깡패생활을 하던 40년대에 미와는 함경도 경찰국장을 끝으로 경찰을 그만두고 총독부 고문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미와는 1884년생으로 나이차가 서른 넷, 김두한이 20대일대 미와는 환갑노인이었다. 박씨가 이를 일일이 확인해준 책은 <조선공로자명감>(민중시론사, 1935). 20여년 전 인사동에서 10만원에 샀다는 베게만한 책이다. 그리고 부기도입사를 설명하기 위해 1908년에 나온 책들을 20초도 안돼 뽑아왔다. 또 책꽂이를 둘러보던 중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책 <국어 및 조선어를 위해>가 제자리에 없음도 금방 알아냈다.

여자 대신 책과 결혼한듯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 사실의 정확성, 각종 전거의 위치 등을 꿰고 있는 만치 소기의 저술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마침 찾아온 고서연구회 후배 노영식(53)씨는 “보통 사람들은 재미없어 하지만 누군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의 자료를 오랫동안 모아 가치있는 컬렉션으로 만든 분”이라며 “그 자료가 저술로 꼭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 고전을 읽어야 해요. 영화 2000편을 봤지만 <돈키호테> 한편만 못하더군요. 할리우드가 패권을 잡은 이면에는 독서대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에 이사오기 전 그는 세검정에서 책과 함께 20년을 살았다. 책들이 엄청난 무게로 그를 잡고 늘어졌던 것. 그는 미혼이다. 책의 유혹이 여성의 그것보다 강렬했을까. 지긋한 그는 이미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지긋지긋한 책과.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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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미디어라고 생각해요”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⑦ 미술 저술가 이주헌씨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출판사에 “천만원 먼저 달라”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콘셉트·문체·구성, 책마다 달라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이주헌이 말하는 내 책은…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전 2권, 개정판, 학고재 펴냄

“미술 글쟁이로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책이요, 제게는 정말 ‘효자 같은 책’이죠. 이 책이 나온 이후에도 예상외로 미술관 기행에 대한 책이 나오지 않아서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실용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요.”




미술로 보는 20세기

학고재 펴냄

“현대 미술 자체를 사람들이 어려워하니까 정면으로 미술을 다루기 보다는 20세기의 사회, 문화현상들을 보여주면서 이를 담은 작품들을 소개해 이해를 높이고자 했어요. 또한 미술이 이처럼 우리 삶을 담는 그릇임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전 2권, 학고재 펴냄

“미술사책이나 미술개론서가 많지만 낯설고 어렵다는 분들 많아요. 그래서 조금 더 쉽게 전달하려고 중요한 장르와 양식, 사조를 골라서 설명했어요. 그러면서 지식과 함께 감상도 할 수 있게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 책이에요.”




화가와 모델

예담 펴냄

“예술도 결국 예술가란 인간이 만든 것이니 예술가의 삶을 이해하는 것도 예술을 이해하는 또하나의 방법이라고 봤어요. 예술가의 삶이란 것에서 중요한게 모델과의 관계인데, 이게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었는지, 그리고 그 뒷이야기는 어떤 것인지 들려주고 싶어서 쓴 책입니다.”




그림 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

예담 펴냄

“일상의 여러 순간에 그냥 한번 가볍게 보고 지나쳐도 좋을 그림 이야기를 써본 거에요. 미술이란 게 우리가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고, 친구와 전화하듯 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소개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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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은 똥싸듯 싸야 해요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⑥ 논술강사 정윤식씨

서재는 내밀하다. 그곳에는 책들이 특별한 규칙 아래 도열해 필요할 때 뽑힐 수 있게 되어 있다. 손때 묻은 권권의 사연들은 적절한 어둠과 침잠을 요구한다. 주인 외의 수선한 눈길이 머물면 그 사연들은 가뭇없이 사라져 부끄러움은 초라하게 내면화한다. 그래서일 거다. 책쟁이들이 서재 공개를 꺼리는 까닭은….

젊은 책쟁이 정윤식(31)씨 역시 자신의 책무지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처음 선뵌 곳은 종로구 동숭동 오피스텔. 그곳에는 그의 현재와 미래가 일렁거렸고 정씨는 당당했다. 일주일 뒤 두번째 찾아간 서초구 양재동 본가. 책방으로 꾸민 옥탑방에는 서른 살 과거가 고여있었고 그는 몹시 수줍어했다. 무의미하다며 세기를 그만두었다는 그의 말을 무찌르고 권수를 헤아리자 함께 거들기는 했지만 막상 7500여권으로 판명되자 어리둥절해했다. 얼결에 벌거벗기운 것처럼. 그 나이에 적잖은 숫자다.

책탐은 대학 1학년 때 시작됐다. 겨울방학 때 25일동안의 인도 선교여행 중 고수를 만났다. 책은 도서관이나 책상에서나 읽는 줄 알았는데 고수는 이동하는 짬에 일곱 권의 책을 읽어냈다. 그때 자신도 어불려 다섯 권을 읽었다. 어려서 추리소설이나 퀴즈풀이를 읽었고, 사춘기 때는 연애편지에 인용하기 위한 책읽기에 지나지 않던 그한테 귀중한 첫경험이었다.

그 뒤 권장도서 또는 각주를 따라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옮겨다니던 그한테 한 사람이 스승처럼 다가왔다. 천리안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나귀’라는 필명의 박 아무개씨. 내공이 무척 높은 것을 알고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싸부’로 모시고 싶다고…. 그가 읽은 책을 따라읽다가 그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교인 가운데는 책읽는 사람이 적은데다 취향이 편중돼 있는 터에 자기처럼 많은 책을 읽고 교리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 것. 두번째로 놀란 것은 그의 나이가 또래임을 알고나서. ‘이럴 수도 있구나.’ 기독교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독교 관련 책을 ‘무지하게’ 읽게 되었다. 엠티를 가서도 프린트해온 서평을 ‘줄쳐가며’ 읽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정씨가 좋아한 것은 그가 권한 책이 아니라 그의 고민이었다.

이담에 허영만 작가론 쓸 생각

동호회에서 만난 또 다른 스승. 책을 두고 채팅을 하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니 무불통지, 책에 관한 계보를 줄줄이 꿰어 40대 이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역시 또래였다. 막힘이 없을 뿐더러 누구든 필요한 사람한테 책을 나눠주었다. 형편이 넉넉치 않을 터인데 ‘너 그 책 읽어봤어?’ 하면서 아무데서나 사서 스스럼없이 건네주었던 것. 그한테 책이란 물성은 중요한 게 아닌 듯했다. (얼마 전 4년만에 통화를 했다. 자신이 어설프고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인간 또는 생활을 중요시하는 이를 보면 찔립니다. 저는 읽은 것은 꼭 실천해야 한다, 자료적 가치는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스트레스죠. 어쩌면 책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는 대학에서보다 헌책방과 헌책동호회에서 더 많은 것을 읽고 배웠다. 만화, 기독교, 에스에프, 베스트셀러 등 관심사를 따라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학생 신분에 호주머니가 얇은 터, 서울시내 헌책방은 가리지 않고 다녔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배낭을 메고 순례했다. ‘숨책’ 동호인들과 함께 무박2일은 예사였다. 그가 공익으로 근무했던 한 지하철 역사가 아지트였다. 또래의 동호인들은 인문학, 소설·영화, 태극권·요가 등 저마다 깊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어서 서로 길잡이가 돼 주었다. 그의 특장은 만화. 한 만화가게에서는 여기에서 저기까지 400권을 쓸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3년. 기본으로 읽을 만한 책은 거의 더텄고 웬만한 관심사의 것은 다 구했다.

“어떤 책이 좋다 나쁘다 하는데, 쉽게 말할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면 그만이라고 봅니다.”

그가 가진 책 가운데 만화가 2200권으로 가장 많고 단행본은 과학소설(에스에프), 기독교가 각각 500여권으로 단일항목으로는 가장 많다. 책을 대하는 태도, 책의 모둠이 신세대 책쟁이답다.

만화는 자료적인 성격인데다 먼지가 많이 나 종이상자에 넣어 쌓아두었다. 그가 가장 고이는 것은 허영만. 이담에 본격적인 작가론을 쓸 생각이다. 분단, 대학교육, 경제성장 등 시대의 고민을 함께하고 끝없는 상상력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가라고 했다. <오! 한강>은 짜릿짜릿하다. <식객>과 <사랑해>는 많이 사두고 사람들한테 선물한다. (작가나 출판사가 자신의 공덕을 알 턱이 없지만….) 다른 책은 몰라도 만화를 선물해서 실패한 적이 없다. 대개는 나중에 만나면 내용과 느낌을 공유하기 때문. 돈을 많이 벌면 권가야의 <해와 달>, 박흥용의 <그의 나라>, 윤승기의 <맘보 파라다이스> 등 끊기거나 서둘러 끝낸 만화를 다시 그리게 하고 싶다. 절판된 박흥용의 <검>은 제본해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있다.

그는 에스에프가 빨리 절판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소재가 가상세계일 뿐 플롯이나 메시지에서 다른 소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상상력이나 논리에서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 30~40대가 좋아하는 것도 그런 탓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시계태엽 오렌지> <솔라리스> 등은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명작입니다. <화성연대기>는 아름다운 시처럼 읽히죠.” 무협지 가운데 김용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영웅문> 3부작은 역사적 배경과 캐릭터의 설정이 뛰어나 세 번을 읽어도 새로웠다.

정씨는 현재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논술대비학원 대표강사. 우연히 얻은 직업이어도 책읽기와 밥벌이가 일치해 그는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이다. 그동안 읽은 책을 싸고 있다고 표현했다. “신체의 건강은 똥 색깔로 판명되듯이 책읽기의 건강은 책싸기로 알 수 있어요. 싸기는 곧 생각하기, 쓰기, 말하기로 구현되죠.”

SF 명작 많은데 너무 빨리 절판

그는 두 가지 꿈이 있다. ‘어떻게 물을 것인가’와 ‘세계의 대입 출제경향’ 정리하기. 학생들한테 싸기를 가르치기만 할 게 아니라 자신도 싸야 한다고 믿는다.

탈무드에 나오는 ‘굴뚝 소제를 마치고 나온 청소부 가운데 검뎅 묻은 사람과 묻지 않은 사람 가운데 누가 세수를 하겠는가’라는 질문. 랍비가 원하는 궁극적인 답을 끌어내 깨달음을 유도할 수 있는 씨앗이 담겨있는 형태이다. 또 예수가 부활 뒤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같은 질문을 던진 것 역시 고도로 계산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정리하면 면접평가, 인성계발에 유용하리라 본다.

한달 도서구입비 50만~60만원

매스컴에서 수능의 문제점 등을 얘기하면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의 예를 드는데, 정작 그들의 시험문제와 답안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독일의 아비투어, 미국 사립고교 졸업시험, 일본의 주요대학 논문시험 등 자료를 구해 번역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문제점과 개선할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요즘 건강을 해쳐 강의를 잠시 쉬고 있는 정씨는 고민이 있다. 전에는 기독교, 헌책방, 논술 등 그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 어느 것도 시덥잖다. 누군가 그한테 미친듯이 매달릴 무엇을 제시해주거나 나아갈 방향을 넌지시라도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신이든, 여성이든, 또다른 무엇이든.

시간이 아쉽다는 그는 장 보고 밥 짓는 게 번거로워 집에서는 주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중국음식을 배달해 먹는다. 대신 밖에서 식사를 할 때는 번듯하게 먹는다. 근자는 구간보다 신간을 주로 구입하는데 시간도 줄일 겸 일목요연하게 검색할 수 있는 인터넷서점을 이용한다. 한달 도서 구입비 50만~60만원. 책이 넘치면 버리기보다는 공간을 넓힐 생각이다. 결혼해서는 무엇보다 넉넉하게 두개 이상의 방을 서재로 만들 생각이다. 책은 그에 어울리는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무엇보다도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환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영만의 <사랑해>를 선물하마고 했다. 신혼부부한테 권한다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겠는가. 혜화동 오피스텔과 대학로 큰길 중간에 있는 지하서점에 들렀다. 주인과는 구면인 듯 건강은 어떠냐며 인사를 나눴다. 아니나 다를까 나오면서 책 한권을 집어들었다. 필요해서였을까? 인사치레였을까? 아니면 버릇일까?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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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새 인연 맺어주기 아직 두 다리 성성합니다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⑤ 책 중간상 김창기

책은 물건이다. 그 물건은 펼쳐져 읽힐 때 책이 된다. 마지막 장이 덮이면 책은 다시 물건이 된다. 책이 책됨은 무척 짧다. 책은, 책으로서보다 책이 되려는 기다림으로 존재한다. 책은 곧 그러함일 터이다.

기다림은 책방 혹은 책꽂이에 존재한다. 읽힘과 읽힘 사이가 밭을수록 책은 제값을 한다. 읽힘과 읽힘 사이에서, 즉, 책-책, 책방-책방, 독자-독자 사이에서 책을 책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간상. 시쳇말로 ‘나카마’라 한다.

그들은 변두리에서 도심으로 책을 나른다. 수집가들한테 직접 전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책의 값을 높인다. 중간상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존재한다. 두곳의 책값 사이가 그들의 삶터다.

고급 중간상은 이에 더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책을 공부하기도 하며 뜸을 들여 책이 무르익기를 기다린다. 한 때에서 또 다른 때로 책을 옮기면서 생산되는 부가가치는 두 곳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보다 훨씬 크다.

지난 7월 12일. 월계동 자택에서 만난 중간상 김창기(68)씨는 느긋했다. 하늘이 터진듯 비가 쏟아져 어차피 일하기는 틀렸기 때문. 40여년 이 일로써 어엿한 집을 마련하고 1남4녀를 쑬쑬하게 키워 대학을 졸업시킨 관록이 보여주는 자신감이 깔리지 않았을까. “예순여덟 나이에 현역으로 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하시오.”

1968년 스물아홉 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신설동 대광학교 근방을 지나다가 화재가 난 집에서 끄집어낸 쓰레기 더미에 우연한 눈길이 멎었다. 불타고 물에 젖어 뭉그러진 종이를 펴보니 누군가의 유묵. 3000원을 달라는 인부한테 주머니에 있던 1500원을 탈탈 털어주고 넘겨받았다.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보자고 해서 보여주었더니 자기한테 팔라고 했다. ‘쓸 만한 물건인 모양이군.’ 집으로 가져와 알아보니 추사였다. 그 사건이 김씨를 중간상으로 만들었다. 김씨는 그것을 우연이라 했지만 평생 직업이 되었으니 운명일 터다.

“80년대 말까지는 괜찮았지요. 헌책을 찾는 사람이 많아 헌책방이 많았거든요. 중고교 참고서나 대학 교재를 주로 취급했는데 한 뭉치면 하루 일당이 나왔어요.” 교재에서 생기는 기본벌이 외에 옛 시집, 소설, 잡지, 광고물에서 생기는 수입은 덤이었다. <해파리의 노래> <님의 침묵> <진달래 꽃> <화사집> 초판본 등 웬만한 책은 다 만져보았다.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구경 못하지만….

중간상이 책 욕심 내면 안되죠

그는 스크랩북을 가져왔다.

1933년 천안 우체국 집배원의 1년치 일기 세 권. 10년 전 청계천 노점에서 구입해 간직하고 있다.

‘9월 25일. 공산당 대공판 개정. 피고 264명이라는 미증유의 큰 공판. 신의주에서는 조봉암 등 공판에 기만권의 서적을 최 변호사 일인이 뒤적거린다고. 밤에는 태양극장 구경갔다. 인기 중심은 최승희양. 그 신기한 기능. 참으로 귀엽고 칭찬을 아낄 수 없다.’

필적과 내용으로 보아 고학력자인 듯하다. 당시 집배원의 생활상 외에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의 울분이 행간에 배었다. “값지게 활용할 수 있는 기관에 기증할 생각도 있어요.”

이밖에 ‘민형소송규칙’(융희 2년, 의진사 발행) ‘재건국민운동본부 화보’(1963년, 운동본부 발행) 등 소책자, ‘대한민국 건국강령 공포서’(1947년), ‘박애원 취지서’(1947년) 등 유인물은 그가 폐지와 헌책 더미에서 구해낸 것들이다.

“중간상이 책 욕심을 내서는 안 되죠.” 그한테 책은 흐르거나 잠시 머무는 존재. 그런 탓일까. 그의 집에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어디선가 꺼내온 이것들은 책이라고 하기는 뭣하고 그나마 때와 때 사이에 좀 길게 머무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리 욕심이 없기로서니 이것뿐일까, 라는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왕 보여줄 것 다 보여주마, 면서 자리를 옮겼다. 오랫만에 누리는 안복. 40년에 걸쳐 자신의 욕심을 줄이고 책들을 졸여 남긴 것이니 어련할까. 그의 절제와 인내는 범인이 이를 수 없는 ‘저만치’에 있었다.

그가 중간상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자산은 오토바이와 부지런함, 그리고 책을 보는 안목. 오토바이를 빼고는 단순한 만큼 어려운 것들이다.

현재 그가 타고 다니며 헌책방 사이를 오가는 오토바이는 여섯 대째. 98년에 구입해 7년 만에 주행거리가 13만킬로미터다. 눈, 비가 와 쉬는 날을 제하면 하루 60~70킬로미터를 달린 셈이다. 81년에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업그레이드해 88시시를 거쳐 125시시급이다. “오토바이로 바꾸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군요. 아무래도 서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인들과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좋은 책을 더 구할 수 있었어요.”

그의 일과는 식전에 고물상과 헌책방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슷한 처지라면 먼저 보는 사람이 아무래도 유리하기 때문. 아침식사를 하고는 본격적인 순회. 60~70년대 강북에는 헌책방이 무척 많아, 미아리 바닥(삼양동, 종암동, 장위동, 길음동, 정릉동)만 해도 40~50군데. 그곳만 돌자 해도 하루가 꼬박 걸렸다. 주인과의 친분, 책이 나오는 정도에 따라 매일 또는 며칠만에 들르는 집이 구분됐다. 미아리 이오서점, 정릉 동학서점, 길음시장 노씨책방, 문화책방, 홍제동 대양서점은 매일 들르던 곳이다. 서점의 위치에 따라 넘치고 부족한 책이 각각 달라 그것을 맞춰주는 것이 그의 몫. 소화하기 힘들거나 제값을 받기 힘든 책을 빼주는 것도 일이다. 대학교재는 청계천 헌책방가로, 한적이나 왜정때 나온 책은 인사동의 계림서점, 통문관, 문고당, 고문당 등으로 옮겼다.

“대학 나온 분을 능가하는 노력을 했어요. 짧은 여름동안 대하소설 세 질을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어요.” 부인 김양자(67)씨는 남편이 책만 아는 학자타입이라고 말했다. 늘 보이는 책은 당일 처분하고 희귀해 보이는 책은 집으로 가져와 ‘검토’를 했다. 내용은 물론 지은이와 발행연도, 희귀성 등을 알아보면서 그는 안목을 키워갔고 서지에 관한 한 ‘박사’가 되어갔다. 말하자면 헌책방은 그의 삶터였고 학교였다.

그가 40년 넘게 그 동네에 머문 것은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상거래 덕이 크다. 턱없이 비싸게 부르는 것은 그냥 지나치고, 알아서 쳐달라면 쳐줄 만큼 쳐주었다. 터무니없이 싸게 부르는 것은 남긴 돈에서 일부를 돌려주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재미보다 더한 재미는 없다. “발이 넓어 좋아하는 책, 이문이 많은 책 구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서점보다 자유롭고 벌이도 괜찮았지요. 오래하다 보니 아는 것도 많아지고요.” 미아리서 6년, 정릉서 6년(고미당). 책방은 외도였을 뿐이다.

여섯번째 오토바이 13만km 주행

동학서점, 이오서점, 세전항서점…. 늙은 주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책방들은 시나브로 없어졌다. 더불어 어울릴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혜화동 혜성서점, 수유리 신일서점, 청계천 경안서점, 성동서점, 중앙서점, 상연서점 주인들 역시 김씨와 함께 늙어간다. 공진석씨, 미아리 김씨, 아현동 윤씨, 청량리 조씨(생존) 등, 서점을 누비던 내로라는 중간상들 역시 세상을 떠나거나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은 사람은 김씨뿐. 성북동, 정릉, 한남동, 수유리, 연신내 등 재개발이 되면서 쏠쏠한 책이 고여있다가 흘러나오는 물좋은 곳도 없어졌다. 게다가 대학생들이 헌책방을 멀리하면서 헌책방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전성기에 비해 1/10로 줄어 10리에 하나 있을까 말까.

헌책방 대부분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어 희귀한 책을 올리는 마당. 밝은 눈과 부지런함으로 서점과 서점 사이에 존재하던 중간상의 시대는 저물고 김창기씨 역시 그 시대의 끝에 서 있다. 골목골목 들어선 헌책방들이 선하고 고물상인의 가위질 소리가 들리는 듯 그의 표정은 아련해졌다. 그는 자신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그렇지만 문화사업의 한축이 시들어가니 서글프다고 했다.

“직접은 아니지만, 필요한 사람한테 책이 돌아가 생명력을 얻게 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해요. 책들이 내 손에 머무는 동안 즐거웠고요.” 회고의 말로 마무리하기는 뭔가 어색했을까. “인생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 아닌가요. 두 다리가 성한 한 계속 돌아다닐 겁니다.” 그는 현역이었다.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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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없는 원시인 “글감은 ‘최신’만 써요”




[한겨레]
한국의 글쟁이들/⑤ 과학저술가 이인식

이인식(61)씨는 오로지 책으로 승부를 거는 직업 저술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찍 저술가로 나선 축에 드는 이다. 90년대 중후반 전업 저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인 90년대 초반부터 과학저술가로 글을 써왔고, 과학책을 쓴 것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87년부터다. 올해로 그가 과학저술가로 활동한 꼭 20년째를 맞았고, 그동안 펴낸 책이 스무 권을 넘어섰다.

이씨는 이달 펴낸 최신작 <미래교양사전>으로 국내 과학책 시장에서 자신이 개인 브랜드로 통하는 드문 필자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냈다. 600쪽 가까운 두께(576쪽), 3만원에 육박하는 가격(2만9000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간 2주만에 5000부 넘게 팔렸다. 과학책들이 보통 2000~3000부를 넘기기 힘든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판매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씨는 자신이 “아직 진정한 저술가가 아니”며, “우리나라에 아직 과학저술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진정한 저술은 온전히 책으로 내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데, 자신은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한 것들을 책으로 낸 것이 많기 때문에 아직도 저술가라기 보다는 칼럼니스트에 그친다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칼럼을 묶어 낸 거에요. 지금까지는 책을 위한 저술만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책이란 안읽히면 끝입니다. 하지만 칼럼은 원고료도 나오고 기본적으로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 위험부담이 적은 편이니까 칼럼으로 써서 책으로 내온 것이죠.”

이씨의 자평은 그만큼 국내에서 ‘과학 출판’이 열악한 분야이고 그래서 ‘과학저술가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지금까지 신문, 잡지에 쓴 원고지 1만매 이상의 칼럼들은 이인식이란 이름을 알린 1등 공신이었던 동시에 저술가이면서도 책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의 산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번 <미래교양사전>은 모처럼 처음부터 책으로만 기획해 쓴 책이다. 이씨는 앞으로 칼럼 연재보다는 책 저술에만 전념할 계획이다. 글쟁이 생활 20년, 나이 환갑에 저술가로서 제2의 도전에 나서는 것이다.

석사 학위도 없지만 저서 20권 넘어

이씨가 책 저술에 전념하기로 한 것은 이제 지명도나 수입면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기 때문다. 이는 반대로 지금까지는 버텨내듯 글쓰기를 해올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씨 스스로도 지난 세월에 대해 “저술가로서 어느 정도 보상은 받았다고 본다”면서도 “폄훼당해 좌절하고 섭섭해하며 살아야 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쨋든 과학책으로 이렇게 먹고 살 수 있으니 보상받은 것이고, 국가 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으니 또한 보상받은 것 아니겠냐”는 설명이다.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는 그가, 그것도 가장 엄밀성과 학문적 권위를 요구하는 과학 저술에 뛰어든 이상 이겨내야만 했던 마음고생의 대가일 것이다.

이씨가 과학저술가로 나선 것은 개인적인 꿈이기도 했지만 생활인으로서 피치 못할 선택이기도 했다. 40대 중반까지 이씨는 대기업에서 이사까지 오른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짬짬이 전자공학이란 전공과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전문성을 살려 컴퓨터 잡지계에서 제법 알아주는 필자로도 활동했다. 글쓰기의 매력에 점점 빠져든 이씨는 결국 “태어나서 해보고 싶은 것은 해보고 죽자”는 생각에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92년 8월 <정보기술>이란 과학잡지를 창간했다. 좋아하는 과학잡지도 만들고 과학 저술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퇴직금에 빌린 돈까지 더해 털어넣은 잡지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1년 반만에 잡지를 폐간한 뒤, 이씨는 과학저술가란 미지의 길에 승부를 걸었다. 고시생들 다니는 독서실에서 혼자 수험생처럼 과학공부를 하면서 글쓰기 수련에 돌입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집중적으로 과학을 공부하면서 이씨는 94년부터 <한겨레> 등 주요 일간지에 과학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씨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과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글쟁이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고 김정흠 교수 등 과학대중화에 관심을 가진 몇몇 대학교수들이 시간을 쪼개 대중적이고 짧은 칼럼을 간간이 쓰는 정도였다. 이씨는 대학교수란 타이틀도, 박사학위도 없었지만 대중적 글쓰기와 저널리즘 감각을 무기로 재미와 정보를 함께 주는 과학칼럼을 지향하고 나섰다. 과학이란 분야가 일반인들에게는 책은 물론 신문기사조차 어렵게 느껴지던 터였기에 알기 쉽게 ‘핵심 정리’를 해주는 듯한 이씨의 칼럼은 금세 호응을 얻었다. 언론은 이씨에게 ‘과학칼럼니스트’란 호칭을 붙여주며 환영했다. 이후 이씨는 10년 넘게 이 분야에서 일급 필자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씨가 과학기술을 논하면서도 운전면허도 없고, 휴대폰도 안쓰며, 글도 원고지에 펜으로 쓴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최신 과학정보나 흐름에는 누구보다도 빠르다는 평을 듣는다. “과학저술가는 과학지식의 얼리어답터(초기 수용자)이자 전파자여야 한다”는 철학 덕분이기도 하지만 최신 과학기술이란 게 누가 먼저 관심을 갖고 다루느냐가 승부처이기 때문에 늘 최신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운 결과다. “테크놀로지는 정보전쟁이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교수들도 몰라요. 늘 먼저 보고 공부하는 게 ‘장땡’입니다.” ‘최신’ 못잖게 이씨를 짓누르는 단어가 ‘정확’이다. “과학저술의 기본은 ‘학문적 정확성’과 ‘언론의 민첩성’이고, 프로 과학저술가로서의 기본은 ‘자기 것에 대한 책임’과 ‘완벽’뿐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글에 오류가 있으면 개망신을 당해요. 그래서 항상 책임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찾는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이씨의 글쓰기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는 누가 이미 쓴 주제나 소재는 쓰지 않는 것. 무엇이든 처음으로 써야 ‘독창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섞지 않기. “개똥철학은 피한다”는 취향에 따라 글에 사적 경험담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이씨가 주력하는 분야가 ‘공학’과 ‘미래’ 두 분야다. 자신이 공학도 출신에 기업에 근무했던 탓도 있지만 “한국을 먹여살릴 미래산업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내 과학출판 풍토에 대한 불만도 작용한다. 이씨가 보기에 현재 국내 과학책 출판의 문제점은 △기초과학 중심 △과거 지향 △생물학 치중 풍토다. 이런 분야도 중요하지만 이쪽 책만 나오는 것은 분명 문제라는 것이다.

“다윈을 지금 떠들어봤자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거죠. 학교에서 다 배우는 것을 또 중언부언할 필요가 있나요? 지금 현재 과학계의 살아있는 이슈나 기술 문제가 중요한데 국내 과학책들은 죽은 옛 과학자들의 전기나 한가한 동물이야기만 중복출판되고 있어요.”

‘생활속 공학’ 문학처럼 풀어내고파

저술가로서 이씨의 바람은 ‘한국의 헨리 페트로스키’로 불리는 것이다. 세계적인 공학기술 저술가로 생활속에서 지나치기 쉬운 공학기술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설명하는 페트로스키처럼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이공계 학생들에게 공학의 재미를 가르쳐주는 책을 쓰는 것. 이게 저술가로서 그가 갖고 있는 소명의식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이인식이 말하는 내 책은…

사람과 컴퓨터(절판)

까치 펴냄(1992)

“첫 책은 아니지만 대표작이자 출세작. 과학 저널리즘이란 데에 충실했던 책인데, 요즘 각광받는 나노기술이나 인공생명 등 첨단 분야를 그 때 자세히 소개한 것은 지금 다시 봐도 자랑스럽다.”





아주 특별한 과학에세이

푸른나무 펴냄(2001)

“그동안의 과학 칼럼들은 원고지 5~7매 분량의 쪼가리글 수준이었다. 정보만 있는 짧은 글이 되어버리는 단점을 극복하고 과학의 재미를 강화하고 싶었다. 보통 단편소설이 70매 정도인데, 그 절반이면 되겠다고 생각해 한 주제당 35매짜리 과학칼럼을 시도했다. 지금도 논술용 책으로 팔리고 있다.”





이인식의 성과학 탐사

생각의나무 펴냄(2002)

“성(性)을 학제간으로 접근해봤다. 생물학, 생식의학, 인류학, 정신의학 등 성을 다각도로 보면서 그 본질과 현상을 고찰했다. 개인적으로 들인 생각보다 덜 팔린 편이어서 아까워하는 책이다. 보급판을 낼까 고민중이다.”





이인식의 과학나라

김영사 펴냄(2004)

“<한겨레>에 매주 한번씩 151회, 3년 동안 연재한 칼럼을 모았다. 대한민국 과학 칼럼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일 것이다. 학교에서, 교실에서 못배우는 ‘시사과학’을 담고자 했다. 논술용으로 최적이라고 본다.”





미래교양사전

갤리온 펴냄(2006)

“과학책을 쓰다보니 과학만 공부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미래 분야는 더욱 그랬다. 경제, 문화현상, 군사도 알아야 한다는 판단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얻은 지식을 보태 펴낸 책이다. 2050년까지 인류사회를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이론, 아이디어, 지식을 집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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