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새 인연 맺어주기 아직 두 다리 성성합니다


[한겨레] 한국의 책쟁이들/⑤ 책 중간상 김창기

책은 물건이다. 그 물건은 펼쳐져 읽힐 때 책이 된다. 마지막 장이 덮이면 책은 다시 물건이 된다. 책이 책됨은 무척 짧다. 책은, 책으로서보다 책이 되려는 기다림으로 존재한다. 책은 곧 그러함일 터이다.

기다림은 책방 혹은 책꽂이에 존재한다. 읽힘과 읽힘 사이가 밭을수록 책은 제값을 한다. 읽힘과 읽힘 사이에서, 즉, 책-책, 책방-책방, 독자-독자 사이에서 책을 책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간상. 시쳇말로 ‘나카마’라 한다.

그들은 변두리에서 도심으로 책을 나른다. 수집가들한테 직접 전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책의 값을 높인다. 중간상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존재한다. 두곳의 책값 사이가 그들의 삶터다.

고급 중간상은 이에 더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책을 공부하기도 하며 뜸을 들여 책이 무르익기를 기다린다. 한 때에서 또 다른 때로 책을 옮기면서 생산되는 부가가치는 두 곳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보다 훨씬 크다.

지난 7월 12일. 월계동 자택에서 만난 중간상 김창기(68)씨는 느긋했다. 하늘이 터진듯 비가 쏟아져 어차피 일하기는 틀렸기 때문. 40여년 이 일로써 어엿한 집을 마련하고 1남4녀를 쑬쑬하게 키워 대학을 졸업시킨 관록이 보여주는 자신감이 깔리지 않았을까. “예순여덟 나이에 현역으로 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하시오.”

1968년 스물아홉 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신설동 대광학교 근방을 지나다가 화재가 난 집에서 끄집어낸 쓰레기 더미에 우연한 눈길이 멎었다. 불타고 물에 젖어 뭉그러진 종이를 펴보니 누군가의 유묵. 3000원을 달라는 인부한테 주머니에 있던 1500원을 탈탈 털어주고 넘겨받았다.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보자고 해서 보여주었더니 자기한테 팔라고 했다. ‘쓸 만한 물건인 모양이군.’ 집으로 가져와 알아보니 추사였다. 그 사건이 김씨를 중간상으로 만들었다. 김씨는 그것을 우연이라 했지만 평생 직업이 되었으니 운명일 터다.

“80년대 말까지는 괜찮았지요. 헌책을 찾는 사람이 많아 헌책방이 많았거든요. 중고교 참고서나 대학 교재를 주로 취급했는데 한 뭉치면 하루 일당이 나왔어요.” 교재에서 생기는 기본벌이 외에 옛 시집, 소설, 잡지, 광고물에서 생기는 수입은 덤이었다. <해파리의 노래> <님의 침묵> <진달래 꽃> <화사집> 초판본 등 웬만한 책은 다 만져보았다.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구경 못하지만….

중간상이 책 욕심 내면 안되죠

그는 스크랩북을 가져왔다.

1933년 천안 우체국 집배원의 1년치 일기 세 권. 10년 전 청계천 노점에서 구입해 간직하고 있다.

‘9월 25일. 공산당 대공판 개정. 피고 264명이라는 미증유의 큰 공판. 신의주에서는 조봉암 등 공판에 기만권의 서적을 최 변호사 일인이 뒤적거린다고. 밤에는 태양극장 구경갔다. 인기 중심은 최승희양. 그 신기한 기능. 참으로 귀엽고 칭찬을 아낄 수 없다.’

필적과 내용으로 보아 고학력자인 듯하다. 당시 집배원의 생활상 외에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의 울분이 행간에 배었다. “값지게 활용할 수 있는 기관에 기증할 생각도 있어요.”

이밖에 ‘민형소송규칙’(융희 2년, 의진사 발행) ‘재건국민운동본부 화보’(1963년, 운동본부 발행) 등 소책자, ‘대한민국 건국강령 공포서’(1947년), ‘박애원 취지서’(1947년) 등 유인물은 그가 폐지와 헌책 더미에서 구해낸 것들이다.

“중간상이 책 욕심을 내서는 안 되죠.” 그한테 책은 흐르거나 잠시 머무는 존재. 그런 탓일까. 그의 집에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어디선가 꺼내온 이것들은 책이라고 하기는 뭣하고 그나마 때와 때 사이에 좀 길게 머무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리 욕심이 없기로서니 이것뿐일까, 라는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왕 보여줄 것 다 보여주마, 면서 자리를 옮겼다. 오랫만에 누리는 안복. 40년에 걸쳐 자신의 욕심을 줄이고 책들을 졸여 남긴 것이니 어련할까. 그의 절제와 인내는 범인이 이를 수 없는 ‘저만치’에 있었다.

그가 중간상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자산은 오토바이와 부지런함, 그리고 책을 보는 안목. 오토바이를 빼고는 단순한 만큼 어려운 것들이다.

현재 그가 타고 다니며 헌책방 사이를 오가는 오토바이는 여섯 대째. 98년에 구입해 7년 만에 주행거리가 13만킬로미터다. 눈, 비가 와 쉬는 날을 제하면 하루 60~70킬로미터를 달린 셈이다. 81년에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업그레이드해 88시시를 거쳐 125시시급이다. “오토바이로 바꾸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군요. 아무래도 서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인들과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좋은 책을 더 구할 수 있었어요.”

그의 일과는 식전에 고물상과 헌책방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슷한 처지라면 먼저 보는 사람이 아무래도 유리하기 때문. 아침식사를 하고는 본격적인 순회. 60~70년대 강북에는 헌책방이 무척 많아, 미아리 바닥(삼양동, 종암동, 장위동, 길음동, 정릉동)만 해도 40~50군데. 그곳만 돌자 해도 하루가 꼬박 걸렸다. 주인과의 친분, 책이 나오는 정도에 따라 매일 또는 며칠만에 들르는 집이 구분됐다. 미아리 이오서점, 정릉 동학서점, 길음시장 노씨책방, 문화책방, 홍제동 대양서점은 매일 들르던 곳이다. 서점의 위치에 따라 넘치고 부족한 책이 각각 달라 그것을 맞춰주는 것이 그의 몫. 소화하기 힘들거나 제값을 받기 힘든 책을 빼주는 것도 일이다. 대학교재는 청계천 헌책방가로, 한적이나 왜정때 나온 책은 인사동의 계림서점, 통문관, 문고당, 고문당 등으로 옮겼다.

“대학 나온 분을 능가하는 노력을 했어요. 짧은 여름동안 대하소설 세 질을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어요.” 부인 김양자(67)씨는 남편이 책만 아는 학자타입이라고 말했다. 늘 보이는 책은 당일 처분하고 희귀해 보이는 책은 집으로 가져와 ‘검토’를 했다. 내용은 물론 지은이와 발행연도, 희귀성 등을 알아보면서 그는 안목을 키워갔고 서지에 관한 한 ‘박사’가 되어갔다. 말하자면 헌책방은 그의 삶터였고 학교였다.

그가 40년 넘게 그 동네에 머문 것은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상거래 덕이 크다. 턱없이 비싸게 부르는 것은 그냥 지나치고, 알아서 쳐달라면 쳐줄 만큼 쳐주었다. 터무니없이 싸게 부르는 것은 남긴 돈에서 일부를 돌려주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재미보다 더한 재미는 없다. “발이 넓어 좋아하는 책, 이문이 많은 책 구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서점보다 자유롭고 벌이도 괜찮았지요. 오래하다 보니 아는 것도 많아지고요.” 미아리서 6년, 정릉서 6년(고미당). 책방은 외도였을 뿐이다.

여섯번째 오토바이 13만km 주행

동학서점, 이오서점, 세전항서점…. 늙은 주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책방들은 시나브로 없어졌다. 더불어 어울릴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혜화동 혜성서점, 수유리 신일서점, 청계천 경안서점, 성동서점, 중앙서점, 상연서점 주인들 역시 김씨와 함께 늙어간다. 공진석씨, 미아리 김씨, 아현동 윤씨, 청량리 조씨(생존) 등, 서점을 누비던 내로라는 중간상들 역시 세상을 떠나거나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은 사람은 김씨뿐. 성북동, 정릉, 한남동, 수유리, 연신내 등 재개발이 되면서 쏠쏠한 책이 고여있다가 흘러나오는 물좋은 곳도 없어졌다. 게다가 대학생들이 헌책방을 멀리하면서 헌책방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전성기에 비해 1/10로 줄어 10리에 하나 있을까 말까.

헌책방 대부분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어 희귀한 책을 올리는 마당. 밝은 눈과 부지런함으로 서점과 서점 사이에 존재하던 중간상의 시대는 저물고 김창기씨 역시 그 시대의 끝에 서 있다. 골목골목 들어선 헌책방들이 선하고 고물상인의 가위질 소리가 들리는 듯 그의 표정은 아련해졌다. 그는 자신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그렇지만 문화사업의 한축이 시들어가니 서글프다고 했다.

“직접은 아니지만, 필요한 사람한테 책이 돌아가 생명력을 얻게 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해요. 책들이 내 손에 머무는 동안 즐거웠고요.” 회고의 말로 마무리하기는 뭔가 어색했을까. “인생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 아닌가요. 두 다리가 성한 한 계속 돌아다닐 겁니다.” 그는 현역이었다.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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