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진 기자의 인물탐험] 개그우먼 김미화
외모 학벌 가난 뛰어넘은 ‘개그계의 대모’
미디어다음/ 심규진 기자
나는 언제나 ‘개그우먼’야구방망이, 일자눈섭으로 남편을 호령하던 '순악질여사' 김미화씨. 24년 방송 경력에 TV토크쇼 '김미화의 U',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진행하는 무게감 있는 방송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개그맨 시절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당찬 에너지는 여전하다. MBC 라디오국에서 만난 그는 방송 프로그램의 안주인보다 열정 넘치는 끼로 무대를 휘어잡는 개그콘서트의 대모가 더 어울려 보인다.
"제가 방송을 한다고 해서 아나운서나 기자보다 더 잘할 수 있겠어요. 흉내내기일 뿐이죠. 그러나 개그우먼한테 이런 걸 맡겼더니 잘 못하더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어요. 열심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죠."
'나는 개그우먼이다'라는 정체성을 단 한순간도 부인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자기 중심을 확실히 잡으면서도 왕성한 호기심만큼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3개월 천하로 단명하는 개그맨이 부지기수인 마당에 김미화만큼 장수하는 개그맨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성' 개그맨으로 더더욱 그렇다.
김미화의 경력은 여러 면에서 특별하다. 그다지 예쁘지 않은 외모로 화장품 광고를 찍은 최초의 개그우먼이다. 직접 프로그램 제안서를 써서 개그 프로그램을 기획해 낸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여성단체부터 환경단체에 이르기까지 사회운동, 대안운동에도 열심이다. '대충대충' 넘어가는 법 없이 뭐든 열정적으로 똑부러지게 해낸다는 점에서 존경받는 연예인이다.
"특별히 출세욕이 있다거나 욕심이 많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개그에 대한 열정이 저의 시야를 많이 넓힌 거죠. 대학에 간 것도 개그에 대한 저질시비가 한창이었을 때 내가 못 배웠다고 전체 개그계가 욕먹는 게 아닐까 싶어 더 많이 배워보자는 노력에서였어요. 시사프로그램을 맡게 된 것도 개그맨한테 맡겨도 신뢰할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죠."
못 배웠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게 싫으니, 더 많이 배우며 성장하고, 개그맨이 할 수 있을까라는 세상의 의구심엔 최선의 대답을 주기 위해 노력할 뿐이란다.
돌이켜보면 개그우먼 김미화의 삶은 역류한 적이 없었다.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자는 주의란다. 그래선지 그의 말투에선 느끼함이나 과장됨이 없이 담백한 장맛이 느껴진다.
시련- 극복하라. 김미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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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
서울 수유동에서 자란 그는 폐병에 걸린 아버지와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동네 아이들과 바깥에서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사람들을 불러모아 개그맨 흉내로 웃음을 주는 일이 가장 큰 낙이었다.
"찰리 채플린, 배삼룡, 서영춘 선생님을 존경해요. 어렸을 적부터 개그맨이 꼭 되고 싶다고 강렬히 열망했고 그 꿈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레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아요."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받거나 아이들과 싸우고 선생님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도 소녀 김미화를 지켜준 건 '웃음'이었다.
"짜증내고 화내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죠. 대신 아이들과 신나게 까불고 재미있게 해 주었어요. 그러면 제 편이 생기고 인기가 많아지고 친구가 많아지더군요."
고달픈 이웃에게 웃음으로 삶의 활력을 주는 개그철학은 어린 시절부터 체화된 것이다. 단순히 인기에 대한 동경이나 연기자가 되기 위한 징검다리로 개그맨이 되는 대개의 연예인 지망생들과는 출발부터 달랐던 셈이다. 가난이나 학벌, 외모 등에 콤플렉스를 느껴 삐뚤어지기 쉬울 법한 성장환경이었지만 그를 지켜준 것은 개그맨을 향한 꿈과 강한 모성이었다.
"어머니가 아주 강한 분이셨어요. 안 해 본 장사 없이 저희들을 키우셨고 가난하지만 한 번도 약하거나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애정- 연대하라. 김미화처럼첫 단추를 잘못 채운 것은 결혼이었다.
스물 셋 어린 나이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 가난하고 상처받았던 가정사에 대한 도피심리나 보상심리가 잘못된 결정으로 몰아간 것 같기도 하다고. 하지만 인기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외면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남편과의 만남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건 언론들이었죠.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알았지만 당시엔 연예인에게 사생활도 용납되지 않던 시절이었잖아요. 이혼하거나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한순간에 퇴출당하던 시절이니까. 계속 고름을 방치했던 거죠. 겁이 나서."
커리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정사의 불행을 연장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남편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여성으로서 직면하기 힘든 불행한 개인사를 고백했을 때, 일반적인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따라붙는 악성 댓글이 그다지 없었던 것은, 그의 열정과 진심을 대중들도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제 호적이 호주제로 인해 잘못돼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도 특별히 대중의 관심을 끌거나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었어요. 여성단체 활동을 하던 차에 자연스레 '나도 호주제의 피해자'라는 얘기가 나온 거죠. 그런데 그 일로 가족들이 너무 마음이 상해서 하마터면 가족을 잃을 뻔 했어요."
성공한 사람이라면 귀족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힘겨웠던 과거를 말끔히 씻어내고 싶어하는 게 당연지사 아닐까.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고, 매니저 없이 홀로 일을 처리하며, 금전적 보상이 없는 사회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여성들과 강하게 연대하면서도, 개성 강한 남성 후배들을 한데 아우르는 리더십도 발휘한다. 뿌리를 인정하고, 시련과 장애물을 정면 돌파하는 용기, 그가 '동지'들과 연대할 수 있는 이유일 거다.
"누가 여성 개그맨은 아이디어를 못 짠다고 했나요? 누가 여성은 예뻐야만 한다고 했나요? 그런 고정관념들과는 싸우고 제 목소리를 냈어요. 그런 편견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하게 됐고요."
관계- 처세하라. 김미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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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
김미화는 단순히 개그우먼이라는 수식에 자신을 가둬두지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했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인내가 필요하기도 했다. 얼굴이 못생겨서 안된다는 PD에게는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짠 개그코너를 들고 갔고, 나이가 들어서 안된다는 애기를 들었을 때는 중장년층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세상만사' 기획서를 들고 갔다.
"개그콘서트를 만들었을 때는 후배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자는 생각이 컸어요. 지금은 개그콘서트를 시작으로 방송 3사에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 생겼으니 정말 뿌듯하지요."
개그계의 대모, 여왕벌로 칭송되는 그의 처세술의 비결은 무엇일까. 부당함에는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서돼, 누군가를 아프게 찌르는 일은 가급적 피한다.
"잘못이나 부당한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경쟁을 피하지도 않고요. 순악질 여사 할 때 김한국씨와도 많이 싸웠죠. 좋은 개그를 위한 긍정적인 싸움이었던 거에요. 그러나 뒤에서 남 얘기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자라서 개그를 못한다거나 소품처럼 있어야 한다는 성차별에는 당당하게 맞섰어요. 제 기준에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냉정하게 다시 보지 않습니다."
성공- 진취하라. 김미화처럼20년이 넘는 방송 연륜만큼 더해진 것이 있다면 성공한 여류인사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따뜻한 인격이다. 방송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친한 누나처럼 안부를 살뜰히 챙긴다. 꼭 자상한 선생님 같다.
그의 과거를 이야기 하는데만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현재와 미래를 얘기할 시간도 없이 빠듯하게 진행된 인터뷰. 그는 "저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려졌잖아요. 잘 써주세요"라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마흔 셋의 나이에도 소년같은 젊음과 활력이 넘치는, 씩씩한 뒷모습이 이렇게 얘기하는 듯 했다. "진취하라. 김미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