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곱스카야 공작부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홍대화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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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이 작품의 발췌본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후 동일한 번역자에 의한 완역본이 나왔음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어쨌든 미완성작이지만. 과거 발췌본에 대한 단상에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영웅>과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주인공의 이름, 그의 첫사랑 여인의 이름. 그리고 주인공의 성격 등. 그럼에도 선입관에 매몰되지 않고 순전한 시각으로 이 소설을 바라본다면 나름대로 재미와 독자성을 지니고 있음을 곧 발견할 수 있다.

 

페초린은 전형적인 귀족 가문이다. 외모는 내세울 게 없지만 예리한 지성으로 신랄한 언변을 구사할 줄 안다. 작가가 곳곳에 설정한 인물평에 따르면 확실히 그는 보통 이상으로 탁월한 지적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우연한 계기로 페초린과 결부되어 필생의 적이 되는 하급관리 크라신스키는 여러모로 페초린과 대조적 인물이다. 그는 한미한 가문과 궁핍한 생활에 힘겨워하며 어떻게든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의 두드러지는 외모와 적절한 언변은 귀족 못지않지만 출신의 한계에 좌절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페초린은 자신을 배신한 첫사랑 베라, 즉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잊지 못한다. 반면 사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네구로바를 교묘히 이용한다. 페초린과 크라신스키, 페초린과 네구로바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페초린이 결코 선량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선과 악의 심성을 모두 지닌, 어쩌면 가장 전형적인 보통의 성격이 아니겠는가.

 

소설은 크라신스키에게서 페초린, 네구로바, 그리고 베라 등으로 화자의 시선에 따라 이야기의 초점이 이동하는 구조를 따르고 있다. 화자는 각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 과거사를 샅샅이 훑으면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데, 때로는 자신이 인물을 잘 모른다는 식으로 시치미를 뚝 떼기도 한다. 한마디로 불성실한 관찰자에서 전지적 시점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작가는 페초린과 인물들의 관계에만 치중하지 않고 러시아 귀족사회의 생활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극장의 오페라 관람과 무도회, 만찬 장면을 통해 독자는 당대 귀족들의 일상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더구나 네구로바와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통해 귀족사회에서 사교계의 역할과 비중의 중요성, 반려자를 만나기 위한 창구로서의 무도회에 임하는 젊은 여성들의 필사적 노력 등.

 

나는 크라신스키에 깊은 동정과 공감을 품는다. 하마터면 마차에 치여 죽을 뻔하고 낯선 귀족들 무리에서 익명의 모욕을 당하면 누구라도 분노와 적개심을 품지 않겠는가. 그런 그를 페초린이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사고와 행동의 준거는 귀족 사회의 전형성과는 유를 달리하므로. 페초린이 알지 못한 채 크라신스키의 집을 찾아가서 그와 맞닥뜨리는 대목은 이 작품의 매우 극적인 장면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네구로바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외모나 지성 등에서 빼어나지는 않지만 중간 이상이며 처신에 있어서도 지탄받을 점이 없는 어느 모로 보나 표준적인 귀족 여성이다. 작가는 러시아 귀족처녀가 어린 나이에서 사교계에 등장하여 노처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날카롭게 제시한다. 제때 제값을 받고 결혼을 하지 못하면 페초린 같은 이의 악의적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불쌍한 네구로바,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타이틀인 리곱스카야 공작부인, 즉 베라 자신의 이야기는 제한적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그녀가 페초린을 기다리지 않고 떠난 이유와 공작부인이 된 현재, 페초린에 대한 감정 등은 일체 언급이 없다. 다만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짐작케 할뿐이다.

 

저는 당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더구나 세상에 모든 것이 잊히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어요. 특히 슬픔은요.” 공작부인이 말했다. (P.122)

 

작중의 인물은 모두 행복하지 않다. 페초린도, 네구로바도, 공작부인도, 그리고 크라신스키도. 자신의 내면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현실에 타협하는 대가는 내적 불만감이다. 물론 크라신스키는 현실을 부정하고 타개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내면은 한층 갈등과 모순에 젖어든다.

 

우리는 레르몬토프의 창작 동기와 전개 의도를 알지 못한다. 작품은 본격적인 전개 단계에서 문득 중단되는데, 무수한 할 말들이 자리 잡을 곳을 몰라 방황하는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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